
↑ ‘직지’ 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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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박병선… 잠자고 있던 직지를 발견하고 고증 끝내
‘직지’가 1955년 한국에서 유학 온 박병선의 눈에 들어온 것은 1967년 어느날이었다. 박병선은 책 표지에 쓰여있는 플랑시의 메모(1377년에 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한국 책)와 책 뒷장에 적혀있는 ‘선광칠년정사칠월일…(宣光七年丁巳七月日…)’ 글귀를 보고 1377년 한국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직지는 5년간에 걸친 박병선의 고증 작업을 통해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197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도서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로써 직지는 세계 교과서에 수정을 가하게 되고 박병선은 ‘직지 대모’라는 수식어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병선(1923~2011)은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경기여고와 서울대 사범대 사회생활과에서 역사를 전공한 후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62년 벨기에 루뱅대학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소르본대학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각각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만 국내 기록마다 박병선의 유럽 학력이 소르본대학, 파리7대학, 프랑스고등교육원, 피에르에 마리퀴리 대학 등으로 다른 것은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아래 내용은 박병선이 언급하거나 자신이 유일하게 감수한 어린이 도서 ‘박병선’에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박병선이 어떻게 직지를 발견하고 세계 최고임을 고증했는지를 정리한 것이다. 박병선에 따르면, 유학을 떠나기 전 스승인 이병도 교수를 찾아갔을 때 스승이 “프랑스에 가거든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프랑스가 약탈해 간 의궤를 찾아보라”고 당부했다. 외규장각은 1782년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이고,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의식과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한 일종의 백서 같은 책이다. 때로는 그림으로 이해를 돕기도 한다. 박병선은 틈나는 대로 프랑스국립도서관을 중심으로 여러 도서관을 뒤졌으나 외규장각 의궤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광칠년정사칠월일…(宣光七年丁巳七月日…)’ 글귀에 주목
그러던 중 1967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임시 사서직 제안이 들어왔다. 유네스코가 1972년을 ‘세계 도서의 해’로 정했는데 프랑스국립도서관도 소장하고 있는 동양의 책들을 정리해 1972년 전시할 계획을 세우던 중 프랑스어를 알면서 한자도 능통한 박병선에게 동양문헌실의 임시 사서직을 제안한 것이다. 박병선은 의궤를 찾을 요량으로 도서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동양문헌실 서고에는 동양에서 언제 갖고 왔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서적들도 가득했다.

박병선은 틈틈이 서고에 보관된 책들을 뒤졌지만 외규장각 도서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1967년 어느날 한쪽 구석에 파묻혀있는 직지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는 ‘直指(직지)’라는 한자가 쓰여 있었고 아래쪽에는 한국을 뜻하는 ‘COREEN’이라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누군가 프랑스어로 갈겨 쓴 ‘1377년에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문장도 표지에 적혀 있었다. 박병선이 주목한 것은 책의 맨 뒷장 간기에 적힌 ‘선광칠년정사칠월일…(宣光七年丁巳七月日…)’라는 글귀였다. ‘우왕 3년에 청주목 교외의 흥덕사에서 주조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라는 뜻이었다. 선광 7년이라면 우왕 3년 서기로 1377년이었다.
박병선은 책 뒷장의 간기를 보고 발간 시기와 금속활자인 것은 알았지만 금속활자 인쇄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직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1901년 모리스 쿠랑이 펴낸 ‘한국 서지’에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어떤 금속활자본보다 빠른 것’이라고 ‘직지’를 설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간 박병선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세계 최고(最古)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박병선은 10여통이 넘는 편지를 국내 전문가들에게 보내 물어봤지만 답이 없었다. 결국 박병선 홀로 미답지를 걸어야 했다. 박병선은 금속활자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를 먼저 알아보았다. 주물 공장을 찾아가 주물 작업을 지켜보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인쇄소에서 금속활자를 만드는 틀을 얻어다가 집에서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진흙, 지우개, 감자, 당근 등으로도 활자를 만들었다. 진흙으로 활자를 만들어 오븐으로 도자기를 굽던 어느날은 오븐이 과열되어 터지고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박병선은 3년간의 실험을 통해 나무활자, 도자활자, 금속활자의 차이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금속활자의 특징을 찾아내 직지가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전시회를 계기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세상에 알려져
박병선은 이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차에 1972년 유네스코가 정한 제1회 세계 도서의 해를 맞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5월~10월 사이에 특별도서전을 준비 중인 것을 알고 도서관 책임자에게 직지 전시를 제안했다. 도서관 측이 긴가민가하자 박병선은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테니 잘못 되면 나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도서관은 발을 빼라”며 도서관을 설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특별도서전에 직지도 포함되었다.
도서관은 도록에 ‘42. 직지심경, 한국. 1377년. 1권38장, 246×170㎜ 한국도서 109, 백운(14세기)이라는 수도승에 의해 수집된 불교승려 교육 교본.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됨’이라고 표기했다. 도록에는 ‘직지’ 말고도 ‘경국대전’과 ‘여지도’도 있었다. 간단하게 소개한 직지와 달리 경국대전은 사진까지 게재한 것으로 보아 직지 보다 경국대전에 가치를 더 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전시 담당자가 ‘직지’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직지는 곧 전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되어 박병선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박병선이 그동안의 연구 자료를 근거로 일일이 설명해주자 처음에는 수긍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직지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동양학학회가 열렸을 때도 박병선은 직지가 한국에서 인쇄된 금속활자본이고 구텐베르크의 책보다 78 년이 앞선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당시 프랑스 국영 제1TV와 르몽드에서도 이 사실을 보도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프랑스 동양학회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동양학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면서 기획한 1973년 7월 ‘동양의 재보전(財寶展)’에도 ‘직지’를 내놓았다. 도록에는 직지, 여지도, 왕오천축국전을 포함해 한국 자료 20여점이 수록되었다. 두 번의 전시회를 계기로 직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박병선은 훗날 직지를 고증하기 위해 연구했던 결과를 집필해 ‘한국의 인쇄’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로도 출판되어 한국의 인쇄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조선왕실 외규장각 의궤도 프랑스에서 찾아내
직지를 세계에 알린 기쁨도 잠시였다. 조선왕실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보라는 스승 이병도의 당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박병선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외규장각을 약탈한 것을 떠올리며 해군 관련 기관에서 의궤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중 프랑스국립도서관 도서 대장에 ‘1867년 해군부에서 기증받은 책이 340여 권 소장되어 있다’는 문구를 보게 되었고 외규장각 약탈 도서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도서관 곳곳을 뒤져도 여전히 실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1978년 10월 어느날 도서관의 한 동료가 베르사유에 국립도서관 별관이 있는데 그곳에 동양의 책들을 보관해 놓은 서고가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박병선은 10월 27일 베르사유 별관으로 갔다. 서고에 들어가니 먼지가 가득하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 먼지에 쌓인 푸른빛 책들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110년 전, 고국을 떠나 어두운 서고에서 한 세기가 넘도록 묻혀 있던 조선의 고서들이었다. 세어 보니 130종 345권이었고 그중 의궤는 297권이었다.
박병선은 이 사실을 주프랑스 한국대사관과 언론사 파리특파원들에게 바로 알려 10월 28일 국내 언론에 기사화되었다. 그러자 국내 언론 기사를 본 도서관 측이 “모리스 쿠랑의 책에도 소개된 책인데 왜 당신이 발견했다고 말했냐”며 반문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1980년 박병선은 해고되었다. 그래도 틈틈이 의궤 297권의 내용을 해석하는 해제 작업에 매달렸다. 해제는 책의 저자, 내용, 체재, 출판 연월일 등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박병선은 스스로 비용을 마련해야 해서 경제적으로 쪼들렸으나 포기하지 않고 해제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10년만인 1990년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1992년 출간된 ‘조선왕조의궤’는 이런 노력의 산물이었다.
박병선은 해제 작업을 하면서도 의궤를 반환받아야 한다는 민원을 공론화 시키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프랑스 방송에 나가서도 한국으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지와 의궤는 각각 2001년과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의궤는 2011년 4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병선은 프랑스에 있던 외규장각 어람용 의궤 전부가 한국에 돌아온 것을 보고 그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일보… 특종 보도로 ‘직지’의 존재와 가치를 세상에 알려
‘직지’의 진본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수장되어 있고 ‘직지’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특종 보도한 것은 1972년 5월 조선일보였다. 당시 신용석 조선일보 프랑스 특파원은 루브르박물관 내에 있던 프랑스국립도서관을 드나들며 알게 된 동양서적 담당 프랑스 사서에게서 “유네스코가 정한 제1회 ‘세계 도서의 해’에 맞춰 프랑스국립도서관도 소장하고 있는 동양의 서적들을 전시할 계획인데 한국에서 오래 전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도 전시된다”는 얘기를 듣고 서고에서 책을 직접 확인한 후 “한국이 구텐베르크보다 75년가량이나 앞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창안 실용화한 거은 세계문화사에서 중요한 새 사실”이라는 내용의 특종 기사를 <고려 금속활자본 세계최초 공인>(1972년 5월 28일자) 제목으로 썼다. 프랑스 사서가 “우리는 이번 국제전을 계기로 모든 세계의 문헌, 교과서, 백과사전을 정정토록 통보, 조처할 의무가 있다”고 말해 우리의 자부심을 고양시켜주었으나 기사를 읽어보면 직지가 어떻게 도서관에 입고되었는지는 프랑스 사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도 국내 언론에 이름이 등장하지 않던 박병선 이름이 직지와 관련해 등장한 것은 그해 말이었다. 박병선이 직지를 사진으로 찍어 실물대로 복제한 80페이지 흑백사진을 갖고 귀국했다는 기사였다. 뒤이어 나온 기사는 한국서지학회가 직지를 감정한 끝에 12월 28일 금속활자본임을 최종확인하고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를 만든 문화국가임을 당당하게 자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지학자들은 뒤이어 직지 영인본 서문을 작성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는 박병선이 가지고 온 사진을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고증한 결과 금속활자 인쇄본이라고 인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연구는 한국의 서지학자들이 하고 박병선은 서지학자들의 심부름을 한 모양이 되었다. 박병선은 서지학자들에게 조목조목 따졌으나 서지학자들은 박병선의 내용을 고치지 않은 채 발표했다.

■51년 후 조선일보 보도… 박병선의 ‘직지’ 발견을 부정한 것은 경솔
‘직지’는 1967년 박병선의 눈에 띄어 1972년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게 50년간 이어온 국내 학계와 언론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2023년 4월 조선일보가 <50년만의 공개가 불러낸 ‘직지(直指) 대모’ 논란… 佛서 전시중인 직지 ‘박병선 첫 발견’ 맞나>(2023년 4월 14일) 기사에서 “박병선이 ‘직지를 발견’했다는 건 과장을 넘어 왜곡”이라는 국내 서지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여기에 2023년 4월 개최된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전시에서 ‘직지’를 50년 만에 일반에 공개한 프랑스국립도서관 측의 입장 표명, 국내 기관인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의 발언까지 기사에 소개되면서 기사는 박병선이 직지를 발견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
기사에 따르면,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952년 ‘직지’를 기증받기 이전부터 이 서적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박병선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세계직지문화협회 사무총장은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직지는 내가 찾았다고 하지 말라’고 박병선 박사 본인이 얘기했지만 2000년대 들어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고, 본인이 부각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언론에서 물으면 그냥 씩 웃고 대답을 안 했다. 기자들은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직지 대모’라고 계속 썼다. 말년이 되면서는 본인도 자신이 발견했다고 굳게 믿게 된 것 같다”고 말해 ‘박병선 직지 발견’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문제는 박병선이 2011년 타계했기 때문에 조선일보 기사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사에 언급된 한국의 전문가들이 박병선 생전에 이런 주장을 펼치지 않고 있다가 사후에 부정하는 것은 경솔하다 못해 비겁하다. 물론 박병선은 살아 있을 때 이미 성역화된 존재이고 국내 전문가들도 박병선과 이렇게 저렇게 얽혀 있다보니 반박 주장을 펼치지 못한 점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박병선의 세계적인 발견(혹은 업적)이 이렇게 몇 사람의 증언만으로 부정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전문가들이 박병선 사후에 직지 발견 부정하는 것은 비겁
‘직지’는 1900년부터 프랑스에 있었고 1952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박병선이 발견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한 것은 사실이다. 반대로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를 사실상 방치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직지의 가치를 학술적으로 파악하고 진즉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임을 세계에 알려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소장자로서의 의무를 방기한 것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직지가 독일의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78년 앞서 인쇄된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일찌감치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고 각국의 교과서도 수정되었을 것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직지에 프랑스어로 ‘1377년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문구가 쓰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서관 소장 후 20년간 학술적으로 검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자와 동양의 금속활자에 대한 지식부족으로 검증을 못했거나 관심이 없었거나 서고에 실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박병선이 직지의 가치를 확인할 때까지 국내는 물론 전세계 모든 연구자들도 직지의 존재와 가치를 알지 못했다. 바로 여기에 박병선의 업적이 있는 것이지 ‘직지 발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고문서는 존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가치를 파헤쳐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직지의 가치를 일찌감치 전해들은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은 ‘한국 서지’(1901년)에 “1377년 청주목 바깥의 흥덕사에서 주조된 활자로 인쇄”라고 설명하면서 ‘이 내용이 정확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것은 확실치 않으니 연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한국 서지’가 프랑스에서 발간된 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국립도서관은 당연히 자기들이 소장하고 있는 직지가 정말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지 여부를 검증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자기들도 이미 존재를 알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견강부회다. 사실 박병선의 관심이 없었다면 직지가 언제 세상에 알려졌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조선일보 보도와 박병선 본인에게도 문제는 있어
이런 반론이 있을 순 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이 박병선의 주장과 달리 도서관 스스로 직지의 가치를 파악하고 1972년 전시했다는 반론이다. 그러나 생전에 박병선은 자신이 서고에 잠자고 있는 직지를 1967년 발견해 도서관 상급자한테 이를 알렸고 그래서 1972년 책 전시회에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박병선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정도의 반박이 있어야 하는데 박병선 생존 시에는 그런 반박이 없었다. 물론 당시 박병선은 도서관의 임시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직이 자신의 성과라고 주장하고 전면에 나서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개 임시직이 무언가를 찾아내도 도서관이 찾아냈다고 하는 게 일반적인 조직의 생리이자 시스템이다. 그렇다고 박병선이 도서관 서고에서 찾아냈다는 사실까지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명색이 전문가라면 박병선과의 친소 관계를 떠나 박병선의 주장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생전에 조목조목 물어 실상을 밝혀야 했다. 그렇지 않고 박병선 사후 12년이 지나 박병선이 직지를 발견하지 않았다는 발언으로 박병선의 업적을 폄훼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선일보 기사에도 문제가 있다. 박병선의 직지 발견을 부정하는 국내 전문가들의 발언이 박병선의 평소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경험이나 인상을 통해 뭉뚱그려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박병선이 주장하는 직지 발견 과정에서 무엇이 과장이고 왜곡인지를 밝혀야 하는데 그런 지적이 없다. 더구나 서지학계가 박병선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박병선이 자신의 업적을 서지학계가 가로챘다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기사의 사실 여부를 떠나 박병선에게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박병선은 생전에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도 직지 발견의 전후 사정을 직접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전문가들도 박병선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밝히는 글을 쓰지 않았다. 박병선이 쓰진 않았지만 직접 읽어보고 출판을 허락한 책은 딱 1권 있다. 아동작가 공지희가 프랑스 파리에서 박병선을 직접 만나 들은 것을 정리해 출간한 어린이 도서 ‘직지와 외규장각 의궤의 어머니 박병선’이다. 책에는 박병선이 어떻게 직지를 발견하고 고증했는지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박병선 자신이 원고를 읽어보고 추천사를 썼기 때문에 이 도서는 사실상 박병선이 쓴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직지 발견에 관한 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런데도 생전에 이에 대한 반론이나 질문 없이 이제와서 부정하는 것은 학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태도를 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