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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直指)’를 거쳐간 인연들 2-①… 백운화상, 플랑시, 쿠랑, 파리만국박람회

↑ 직지심체요절

 

☞‘직지(直指)’ 인연들 2편 : 박병선, 조선일보 보도 클릭!!

 

by 김지지

 

직지심체요절(직지)은 현존하는 전 세계 금속활자 책 중 가장 오래전 발간된 책이다. 19세기 말 주한 초대 프랑스 영사 빅토르 콜랜 드 플랑시를 통해 프랑스로 건너가 70여년 동안 우리의 기록과 기억에서 사라졌던 ‘직지’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72년 <고려 금속활자본 세계최초 공인>(5월 28일자) 제목의 조선일보 보도를 통해서였다. 이후 ‘직지’는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78년 앞선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았고 ‘직지’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임시직 사서인 박병선은 국내에서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세기 말부터 최근까지 ‘직지’를 거쳐간 온갖 인연들을 살펴본다.

 

■백운화상… ‘직지’의 저본(底本)을 서책으로 간행한 ‘고려말 3대 화상’

백운 화상(白雲 和尙)·1298~1374)은 고려말 태고 보우(1301~1382), 나옹 혜근(1320〜1376) 스님과 함께 ‘고려말 3대 화상’으로 불린다. 백운은 법호이고 법명은 ‘경한’이다. ‘화상(和尙)’은 수행을 많이 한 스님을 높여부르는 표현이다. 백운 경한, 태고 보우, 나옹 혜근은 동시대 스님들이다. 세 스님은 생전에 서로 돕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지냈다. 다만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백운은 보우·나옹에 비해 덜 유명했다. 보우와 나옹이 엘리트 코스를 받고, 왕사(王師)로 추앙받고, 진영(초상화)이 남아있는 것과 달리 백운은 왕사가 된 적도 없고 진영도 없다. 그러다보니 백운은 태고·나옹의 도움을 받아 고려의 공민왕을 만나기도 하고 주요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기도 했다.

백운은 전라도 고부 출신이다. 10대에 출가했다는 것 말고는 50대까지 이력이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행적은 ‘백운화상어록’과 ‘고려사’에 수록된 단 한 줄의 문장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 권54 오행지에 의하면, 1346년(충목왕 2년) 5월 경한이 왕명을 받들어 기신제(역대 국왕이나 왕후의 기일에 각 능에 지내는 제사)를 주관했다는 내용이다. 백운은 50대 중반 나이인 1351년 원나라에 가서 임제종 법손인 석옥 선사 문하에 1년간 머물다 돌아왔다. 석옥 선사는 태고 스님의 유학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백운은 원나라로 유학가기 5년 전인 1346년 충청도 청양의 장곡사에서 금동약사여래좌상을 제작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완성된 불상은 단아하고 정제된 당시 조각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어 지금도 고려말 불상 연구에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백운은 불상이 완성된 후 홍색 비단에 작성한 발원문(신이나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은 글)을 불상 내부(복장)에 넣었다. 몽골침탈기라는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무병장수 등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던 고려 사람들의 염원과 노력을 담았다. 발원문은 600여년 동안 불상 안에서 잠자고 있다가 1958년 복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폭 48㎝에 길이가 10m가 넘는 1,058㎝의 발원문에는 1346년(고려 충목왕 2년)이라는 시기와 장곡사 불상을 조성하게 된 경위가 적혀 있다.

발원문 끝에는 불상 제작에 관여하거나 시주한 사람 1078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앞면에 941명, 행간여백에 39명, 뒷면에 98명이다. 왕족을 비롯 고위 관료나 왕실 관련자들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군부인(郡夫人), 하위직 무관 등 지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모든 계층이 망라되었다. 행적이 확인되는 사람들도 다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후궁인 안경옹주 박씨가 있다.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인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의 장수를 기원하는 발원자도 있다. 발원문 말미에는 백운화상이 직접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백운(白雲)’ 수결(Sign)이 그림처럼 보인다. 얼핏 말풍선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자 ‘白雲’임을 알 수 있다. 금동약사여래좌상과 내부에서 나온 복장유물들은 202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직지(직지심체요절)… 백운 화상의 책을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

백운 화상은 1372년 역대 불조(佛祖)들의 법어와 설법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상하 2권으로 책(초록)을 엮은 뒤 1376년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했다. 스승의 열반 후,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의 책을 금속활자로 간행했다. 명칭은 ‘백운화상 초록 불조 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이었다. 직지를 인쇄하고 1년 뒤 우왕 4년(1378년) 6월에는 ‘직지’ 금속활자본과 똑같은 목판본 상하 2권이 경기 여주의 취암사에서 간행되었다. 직지의 전체 내용을 알 수 있게 된 것도 이 목판본 덕분이다.

상하 2권 중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보관하는 것은 하권이다. 하권 첫 장도 결락된 상태이지만 마지막 장 간기에 적힌 ‘선광칠년정사칠월일 청주목외흥덕사 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日 淸州牧外興德寺 鑄字印施)’라는 글귀를 통해 간행 시기를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해석을 하면 ‘우왕 3년에 청주목 교외의 흥덕사에서 주조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라는 뜻이다. 선광 7년이라면 우왕 3년 서기로 1377년이었다. 1972년 박병선의 발견을 계기로 직지가 세상에 알려진 후 “흥덕사의 위치가 어디냐”는 궁금증이 관련 학계에서 이심전심으로 공유되었다.

해결의 단초가 나온 것은 1984년이었다. 그해 11월 청주대박물관의 한 연구원이 청주시 운천동 866번지에서 절터 하나를 새로 찾아낸 것이 단초가 되었다. 청주대박물관은 1985년 10월 본격적인 발굴 조사에 들어가 10월 초 흙 속에서 청동 금고(金鼓·쇠북)를 발견했다. 중장비 삽날에 찍혀 원상을 잃었지만 측면에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가운데 ‘갑인년 5월 서원부 흥덕사 금구 하나를 고쳐 만드는데 들어간 무게가 32근이다’라는 글씨가 새겨 있었다. ‘황룡십년 흥덕사’라고 새겨진 큰 그릇 뚜껑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로써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의 산실이 비로소 확인되었다. 직지는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받아 2001년 9월 ‘불조직지심체요절’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직지’가 구텐베르크보다 78년 먼저 인쇄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최고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류에 끼친 영향면에서는 구텐베르크와 비교될 수 없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377년 안쇄된 ‘직지’는 하권의 인쇄면수가 39장(78쪽)에 불과하고 목판활자가 섞여 인쇄되었으며 인쇄 부수도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에 비해, 1450년대 중반 완성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는 인쇄면수가 1280면이나 되고 발행부수도 200부(그중 30부는 양피지)에 달하는 데다 현재도 48부가 세계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개발된 후 반세기도 안되어 유럽 20여 개 도시에서 약 3만5000종의 책이 찍혀 나와 가히 지식의 대량보급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서양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이후 종교개혁, 시민혁명, 과학혁명 등을 통해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주요한 저술들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로 다량으로 인쇄되었다. 덕분에 루터의 주장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고 그 결과 종교개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서양은 그 후 산업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마침내 지구촌 문명을 대표하는 문명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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