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직지심체요절
☞‘직지(直指)’ 인연들 2편 : 박병선, 조선일보 보도 클릭!!
by 김지지
직지심체요절(직지)은 현존하는 전 세계 금속활자 책 중 가장 오래전 발간된 책이다. 19세기 말 주한 초대 프랑스 영사 빅토르 콜랜 드 플랑시를 통해 프랑스로 건너가 70여년 동안 우리의 기록과 기억에서 사라졌던 ‘직지’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72년 <고려 금속활자본 세계최초 공인>(5월 28일자) 제목의 조선일보 보도를 통해서였다. 이후 ‘직지’는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78년 앞선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았고 ‘직지’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임시직 사서인 박병선은 국내에서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세기 말부터 최근까지 ‘직지’를 거쳐간 온갖 인연들을 살펴본다.
■백운화상… ‘직지’의 저본(底本)을 서책으로 간행한 ‘고려말 3대 화상’
백운 화상(白雲 和尙)·1298~1374)은 고려말 태고 보우(1301~1382), 나옹 혜근(1320〜1376) 스님과 함께 ‘고려말 3대 화상’으로 불린다. 백운은 법호이고 법명은 ‘경한’이다. ‘화상(和尙)’은 수행을 많이 한 스님을 높여부르는 표현이다. 백운 경한, 태고 보우, 나옹 혜근은 동시대 스님들이다. 세 스님은 생전에 서로 돕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지냈다. 다만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백운은 보우·나옹에 비해 덜 유명했다. 보우와 나옹이 엘리트 코스를 받고, 왕사(王師)로 추앙받고, 진영(초상화)이 남아있는 것과 달리 백운은 왕사가 된 적도 없고 진영도 없다. 그러다보니 백운은 태고·나옹의 도움을 받아 고려의 공민왕을 만나기도 하고 주요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기도 했다.

백운은 전라도 고부 출신이다. 10대에 출가했다는 것 말고는 50대까지 이력이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행적은 ‘백운화상어록’과 ‘고려사’에 수록된 단 한 줄의 문장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 권54 오행지에 의하면, 1346년(충목왕 2년) 5월 경한이 왕명을 받들어 기신제(역대 국왕이나 왕후의 기일에 각 능에 지내는 제사)를 주관했다는 내용이다. 백운은 50대 중반 나이인 1351년 원나라에 가서 임제종 법손인 석옥 선사 문하에 1년간 머물다 돌아왔다. 석옥 선사는 태고 스님의 유학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백운은 원나라로 유학가기 5년 전인 1346년 충청도 청양의 장곡사에서 금동약사여래좌상을 제작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완성된 불상은 단아하고 정제된 당시 조각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어 지금도 고려말 불상 연구에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백운은 불상이 완성된 후 홍색 비단에 작성한 발원문(신이나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은 글)을 불상 내부(복장)에 넣었다. 몽골침탈기라는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무병장수 등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 했던 고려 사람들의 염원과 노력을 담았다. 발원문은 600여년 동안 불상 안에서 잠자고 있다가 1958년 복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폭 48㎝에 길이가 10m가 넘는 1,058㎝의 발원문에는 1346년(고려 충목왕 2년)이라는 시기와 장곡사 불상을 조성하게 된 경위가 적혀 있다.
발원문 끝에는 불상 제작에 관여하거나 시주한 사람 1078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앞면에 941명, 행간여백에 39명, 뒷면에 98명이다. 왕족을 비롯 고위 관료나 왕실 관련자들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군부인(郡夫人), 하위직 무관 등 지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모든 계층이 망라되었다. 행적이 확인되는 사람들도 다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후궁인 안경옹주 박씨가 있다.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인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의 장수를 기원하는 발원자도 있다. 발원문 말미에는 백운화상이 직접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백운(白雲)’ 수결(Sign)이 그림처럼 보인다. 얼핏 말풍선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한자 ‘白雲’임을 알 수 있다. 금동약사여래좌상과 내부에서 나온 복장유물들은 202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직지(직지심체요절)… 백운 화상의 책을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
백운 화상은 1372년 역대 불조(佛祖)들의 법어와 설법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상하 2권으로 책(초록)을 엮은 뒤 1376년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했다. 스승의 열반 후,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의 책을 금속활자로 간행했다. 명칭은 ‘백운화상 초록 불조 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이었다. 직지를 인쇄하고 1년 뒤 우왕 4년(1378년) 6월에는 ‘직지’ 금속활자본과 똑같은 목판본 상하 2권이 경기 여주의 취암사에서 간행되었다. 직지의 전체 내용을 알 수 있게 된 것도 이 목판본 덕분이다.
상하 2권 중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보관하는 것은 하권이다. 하권 첫 장도 결락된 상태이지만 마지막 장 간기에 적힌 ‘선광칠년정사칠월일 청주목외흥덕사 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日 淸州牧外興德寺 鑄字印施)’라는 글귀를 통해 간행 시기를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해석을 하면 ‘우왕 3년에 청주목 교외의 흥덕사에서 주조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라는 뜻이다. 선광 7년이라면 우왕 3년 서기로 1377년이었다. 1972년 박병선의 발견을 계기로 직지가 세상에 알려진 후 “흥덕사의 위치가 어디냐”는 궁금증이 관련 학계에서 이심전심으로 공유되었다.

해결의 단초가 나온 것은 1984년이었다. 그해 11월 청주대박물관의 한 연구원이 청주시 운천동 866번지에서 절터 하나를 새로 찾아낸 것이 단초가 되었다. 청주대박물관은 1985년 10월 본격적인 발굴 조사에 들어가 10월 초 흙 속에서 청동 금고(金鼓·쇠북)를 발견했다. 중장비 삽날에 찍혀 원상을 잃었지만 측면에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가운데 ‘갑인년 5월 서원부 흥덕사 금구 하나를 고쳐 만드는데 들어간 무게가 32근이다’라는 글씨가 새겨 있었다. ‘황룡십년 흥덕사’라고 새겨진 큰 그릇 뚜껑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로써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의 산실이 비로소 확인되었다. 직지는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받아 2001년 9월 ‘불조직지심체요절’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직지’가 구텐베르크보다 78년 먼저 인쇄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최고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류에 끼친 영향면에서는 구텐베르크와 비교될 수 없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377년 안쇄된 ‘직지’는 하권의 인쇄면수가 39장(78쪽)에 불과하고 목판활자가 섞여 인쇄되었으며 인쇄 부수도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에 비해, 1450년대 중반 완성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는 인쇄면수가 1280면이나 되고 발행부수도 200부(그중 30부는 양피지)에 달하는 데다 현재도 48부가 세계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개발된 후 반세기도 안되어 유럽 20여 개 도시에서 약 3만5000종의 책이 찍혀 나와 가히 지식의 대량보급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서양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이후 종교개혁, 시민혁명, 과학혁명 등을 통해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주요한 저술들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로 다량으로 인쇄되었다. 덕분에 루터의 주장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고 그 결과 종교개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서양은 그 후 산업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마침내 지구촌 문명을 대표하는 문명으로 자리잡았다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직지를 구입해 프랑스로 가져간 초대 주한 프랑스 영사
우리나라에 있어야 할 ‘직지’가 어떻게 해서 저 멀리 프랑스 파리에까지 건너간 것일까? 해답의 열쇠는 1887년 11월 초대 주한 대리공사로 발령받은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1853~1924)가 쥐고 있다. 플랑시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877년 파리 동양어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통역으로 파견되어 2등영사를 거쳐 청불전쟁이 발발한 1884년부터는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관의 영사로 근무했다. 1886년 5월 3일(음력)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전권위원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와 1887년 윤4월 8일 조불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했다. 당시 조선은 프랑스를 법국(法國)으로 표기해 조약에 표기된 프랑스 국가 이름은 ‘대법민주국’이었다.

플랑시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87년 11월 초대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로 임명되어 1888년 6월 서울에 도착, 1891년 6월까지 3년 간 주한 프랑스 공사로 근무했다. 1891년 일본으로 건너가 1893년까지 주일 프랑스 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뒤 프랑스로 돌아가 본국 외무성과 모로코 탕헤르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1895년 12월 주한 프랑스 총영사로 발령받아 1896년 4월부터 1906년 8월까지 10년 4개월 간 총영사로 활동했다. 1906년 조선을 떠난 것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함에 따라 외국 공관이 모두 조선에서 철수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플랑시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조선의 대표단을 돕기 위해 1899년부터 1900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렀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총영사직을 수행하다 1906년 태국 방콕의 전권공사로 발령받아 조선을 떠나고 1907년 은퇴함으로써 30년의 외교관 생활을 마감했다.
플랑시는 이렇게 13년 간(1887.12~1891.6, 1895.12~1906.8) 두 차례 주조선 프랑스 공사로 활동하면서 조선 정부로부터 경의선부설권과 광산채굴권을 획득하는 것으로 자신의 조국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면서도 조선의 문화재 수집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다양한 고서를 수집했는데 공사관 앞에 고서를 산다는 방을 써 붙일 정도로 열심이었다.
표지에 프랑스어로 ‘1377년에 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한국 책’이라고 써
이런 과정을 거쳐 ‘직지’가 플랑시 손에 들어가고 프랑스로 건너간 것으로 보이지만 언제 누구에게 구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대략적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플랑시가 첫 번째 조선 근무(1888~1891) 때 구입한 도서는 모두 파리의 동양어학교에 기증했는데 직지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째 근무를 시작한 때(1896년)로부터 플랑시가 직지를 파리만국박람회(1900년)에 전시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1899년 사이에 수중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플랑시가 첫 번째 근무(1888~1891) 때 입수했다면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이 1894~1896년에 발간한 ‘한국 서지’ 본책(1~3권)에 실렸을 텐데 본책에는 실리지 않고 1901년 발간한 부록판에 실려있는 것을 보아도 1900년 이전에 구입했음을 알 수 있다.

플랑시는 직지를 입수한 뒤 표지에 프랑스어로 ‘1377년에 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한국 책(Le plus ancien livre coreen connu, imprime avec caracteres mobiles, avec date 1377)’이라고 펜으로 기록했다. 속지에도 ‘불교 교리 내용.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인쇄본“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직지’의 역사적 가치를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직지는 1900년 4~11월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때 대한제국관에서 전시되었다.
플랑시는 박람회에 전시된 것 말고도 조선에서 수집한 서적, 회화, 도자기, 목공예품, 가구, 동전 등 2500점 안팎의 한국컬렉션을 동양어학교, 프랑스국립도서관, 기메박물관과 부속 도서관, 세브르박물관과 부속기관인 세브르 도자기제작소 등 기관에 기증했다. 그 중 플랑시의 모교인 파리동양어학교에는 세 차례에 걸쳐 보낸 서적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이 도서관에는 유럽 도서관 중 가장 많은 약 630종, 1450여 권의 한국 고서가 소장되어 있는데 서적의 대부분은 플랑시가 수집한 것이다.
플랑시의 활동은 서적 수집과 기증에 머무르지 않고 모리스 쿠랑과 함께 조선 서적의 목록을 작성하고 해제를 붙이는 ‘한국 서지(Bibliographie Coreenne)’ 발간으로도 이어졌다. ‘한국 서지’ 집필은 1890년 5월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한 모리스 쿠랑에게 플랑시가 ‘조선 문헌 일람’ 작업을 권하면서 시작되었다. 플랑시는 집필에도 상당 부분 관여해 두 사람 공저로 동양어학교 총서로 발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중간에 플랑시가 공동 필자로 참여하는 것을 사양해 쿠랑의 단독 저서로 프랑스에서 발간되었다.
■리진… 플랑시와 비극적 사랑을 한 것으로 묘사된 조선의 궁중 무희
플랑시는 제2대 주한 프랑스 영사와 공사를 역임했던 이폴리트 프랑뎅이 1905년 발간한 ‘조선에서(En Coree)’라는 책에서 조선의 궁중 무희와 비극적 사랑을 한 인물로 묘사되어 또 다른 흥미를 끌고 있다. 프랑뎅은 책에서 “한국에 근무할 때 직접 보고 들었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친구의 얘기”라며 “친구가 조선의 무희와 사랑에 빠졌다”고 썼다. 책에서 ‘Li-Tsin’으로 표기된 궁중 무희 출신의 여성이 전임 주한 프랑스공사와 결혼해 파리에서 살다가 다시 조선에 돌아와 옛 신분으로 전락한 것에 실망해 자살을 택한 비운의 여인으로 묘사된 것을 보고 후대 사람들이 프랑뎅의 친구인 플랑시를 친구로 지목한 것이다.
이 책을 근거로 소설가 김탁환은 2006년 소설 ‘리심’을, 베스트셀러 작가 신경숙은 2007년 소설 ‘리진’을 발표했다. 동일한 여인의 이름이 각각 다른 것은 신경숙은 불어 표기 ‘Li-Tsin’을 그대로 읽어서이고, 김탁환은 Li-Tsin 뒤에 붙은 ‘Fleur d’ame’(flower of mind)라는 설명을 ‘梨心’(리심)으로 풀어 읽었기 때문이다. KBS의 역사 다큐프로그램인 <한국사 전(傳)>(2007년 6월 23일) ‘조선의 무희, 파리의 여인이 되다’ 편에서도 리진이 등장한다.
그러자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가 2020년 10월 “19세기 프랑스의 오리엔탈리즘과 21세기 한국의 센세이셔널리즘 간의 잘못된 만남이 허구 인물 리진을 실존 인물로 둔갑시켰다”며 소설과 방송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라고 일축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후 한국사傳 CP와 주진오 교수 간의 반론이 이어지면서 흥미로운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양측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주장 “파리의 조선무희’ 리진은 허구”
☞장영주 한국사傳 CP의 반론 “프랑스 조선 무희 리진은 실재했다”
☞주진오 교수의 재반론 “리진이 실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모리스 쿠랑… 조선의 서적을 집대성한 ‘한국 서지’ 발간
모리스 쿠랑(1865~1935)은 수십편의 한국 관련 저술을 남김으로써 조선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통한다. 그 중에서도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조선 서적 3821종을 집대성한 ‘한국 서지(전 4권)’를 프랑스어로 발간한 것이다.

쿠랑은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대학 법과에 입학하고 2년 후 동양어학교에서 복수 전공으로 중국어와 일본어를 전공해 파리대학(1886년)과 동양어학교(1888년)를 졸업했다. 1888년 9월부터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통역 실습생으로 근무하다가 수석 통역관을 거쳐 1890년 5월 주한 프랑스 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해 1892년 3월까지 약 21개월 동안 플랑시의 통역보좌관을 겸했다. 쿠랑은 첫 3개월 동안 이 낯선 나라가 싫어 극히 사소한 일로도 조선에 혐오감을 느끼고 빠져나갈 궁리만 하곤 했다. 그러다가 플랑시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쿠랑에게 알려주고 유럽인들이 전혀 몰랐던 서적들과 문학자료들을 보여주어 답답한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쿠랑은 플랑시가 해설을 첨부한 ‘조선 문헌 일람’ 작업을 자신에게 권하자 조선에서 머문 2년 동안 플랑시가 수집한 장서에다 상점, 세책가, 사찰, 유적 등을 답사하면서 추가로 알게 된 서적 등의 확인 작업을 거쳐 플랑시와 함께 서지 작업을 진행했다. 1892년 3월 조선을 떠나 베이징으로 전근되었다가 10월 프랑스로 돌아가 약 10개월간 파리에서 지내고 1893년 일본에 부임하는 등 동서양을 넘나들면서도 틈틈이 ‘한국 서지’ 원고를 썼다. 1896년 프랑스로 귀국 후에는 동양어학교, 기메박물관, 런던의 대영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알게 된 조선 서적도 목록에 추가했다. 그 무렵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가길 희망했지만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서지’는 플랑시가 공동 필자로 참여하는 것을 사양해 쿠랑의 단독 저술로 1894~1896년 본책 3권(3240여 종), 1901년 부록판 1권으로 총 4권이 프랑스어로 발간되었다. 쿠랑은 책의 뛰어난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1896년 프랑스 학술원상을 받았다. 쿠랑은 본책(3권) 발간 후 1899년까지 추가로 조사한 목록 580건(3241~3821번)을 추가해 다시 책자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1901년 출간한 부록판이다.
‘한국 서지’에는 ‘직지’도 수록되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3738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1책… 대 8절판(제2권만 있음) 이 책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적고 있다. ‘1377년 청주목의 흥덕사에서 주조된 활자로 인쇄됨.’ 이 내용이 정확하다면 주자, 즉 활자는 활자의 발명을 공적으로 삼는 조선시대 태종의 명(1403년 주자소 설치 및 계미자 주조)보다 26년 가량 앞서 사용된 것이다.” 여기서 ‘정확하다면’ 표현으로 미루어 쿠랑은 금속활자 인쇄 연도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쿠랑은 조선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서양인
‘한국 서지’는 고려 때의 삼국사기와 고금상정례문 등부터 조선 말의 한성순보 등까지 당시에 구할 수 있던 모든 서적을 망라했다. 서적 종류는 3821종이나 되었다. 서적의 유형에 따라 교회(敎誨, 교육부문), 언어, 유교, 문묵(文墨, 예술부문), 의범(儀範), 사서(史書), 기예(의술-농학-천문부문), 교문(敎門, 유교를 제외한 종교부문), 교통 등 9개 부문으로 분류하고 제목, 저자, 발행인, 발행연도, 소장처 등의 상세한 서지학적 정보와 문화사적 비평을 담았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유럽과 일본에 흩어져 있는 조선 서적들의 목록과 소장처도 밝혀 놓았다.

쿠랑의 의도와 책의 전체 골격은 70여 쪽에 달하는 장문의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별도의 단행본으로 발간해도 손색없는 서문에서 쿠랑은 조선의 인쇄와 제지술 발달사, 도서 제작방법 변천사, 책의 유통과정 등 책의 물리적인 면에서부터 우리나라에 불교, 도교, 유교가 전래-발전된 과정, 이두의 사용, 훈민정음 창제 시기와 관련한 논란 등까지 상세히 설명하고 자신의 의견을 더해 조선 문화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던 유럽 독자들에게 한국사와 한국사상사의 지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이 저술은 플랑시에게 공이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애초의 발상도 그의 것이며, 많은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훌륭한 조언을 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며 플랑시에게 공을 돌렸다.
이렇듯 방대한 해제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플랑시의 전폭적인 지원, 쿠랑의 한문 해독력, 중국 문헌 체계에 대한 이해가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1880년부터 조선에서 선교사업에 종사하던 뮈텔 주교와 프랑스공사관의 통역 이인영 등의 각별한 협조도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한반도를 연구한 서양 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의 자료에 대부분 의존했던 데 비해 쿠랑은 한국의 문헌을 참조하고, 전국 각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함으로써 한국학에 관한 당대 최고 권위자의 명성을 얻었다.
쿠랑은 이 외에도 조선에 관한 글과 논문을 50여편 남겼다. 특히 한국 음악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을 서구에 소개하고 1898년에는 광개토대왕 비석에 대한 30쪽의 논문을 발표했다. 광개토대왕비 전문(全文)을 프랑스어로 해석, 유럽 학계에 최초로 광개토대왕비를 소개한 이 논문에서 쿠랑은 모든 고유명사를 한국 발음으로 표기, 고구려가 한국사에 속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쿠랑이 쓴 논문에는 조선에서 사용된 화폐제도와 문자체계, 종교의식, 한·일관계 등의 분야도 포함되었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이 참가했을 때도 팜플렛에 대한제국관을 소개하는 ‘1900년 서울의 추억’이라는 글을 썼다. 1900년 리옹대학 문과대학 강사로 시작해 동양학 교수로 정착했다. 리옹대학에 유럽 최초로 한국사 강의를 개설하고 서양 최초로 한국 관광 전문 안내서를 썼다.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 플랑시가 가져온 ‘직지’도 전시
‘직지’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개관한 대한제국관에서도 전시되었다. 전시 물품 중에 ‘한국의 인쇄기술을 이용해 만든 책들’ 코너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플랑시가 빌려준 ‘직지’였다. 대한제국관에는 서적 말고도 악기, 자개공예품, 자수, 유기, 비단, 도자기, 금속공예, 금은박세공품 등 수십 점이 전시되었다. 프랑스의 주요 신문과 잡지들은 전시된 귀중품과 토속품들이 Coree란 나라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박람회 지원을 위해 1899년 프랑스로 돌아온 플랑시는 한국이 이 국제적인 행사를 무난히 치르도록 중재 역할을 했다. 자신의 개인 컬렉션 중에서 서적, 고화폐, 표범가죽, 도자기 등도 전시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파리만국박람회는 신세기를 맞아 인류가 이뤄낸 과학의 발전과 진보,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눈으로 확인하고 만끽하도록 한 당대 인류 문명의 총결산이었다. 그 해에 개통한 파리 지하철도 사상 두 번째로 열린 파리 올림픽도 박람회 행사의 일환이었다. 박람회장에는 세계 40개국의 국가관이 세워졌고 박람회는 1900년 4월 14일 개막해 11월 12일 폐막할 때까지 5000여 만명이 다녀갔다.
고종이 파리 만국박람회 참가를 결정한 것은 1896년 1월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897년 1월 박람회 사무국과 다리 역할을 할 프랑스 주재 특사 및 전권공사로 민영환을 임명하고 1898년 8월 프랑스와 조선에서 준비업무를 수행할 30여명의 대표단을 확정했다. 대한제국관 개설을 준비하고 운영할 한국위원회 명예위원장으로는 법부협판 민영찬을, 위원장으로는 샤를르 루리나 파리주재 총영사를 임명했다.

대한제국관에 러시아 황제를 포함해 60만 명이 다녀가
대한제국관은 파리 박람회장에서 외진 곳인 쉬프렌 대로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재정 형편이 어려워 진행하지 못했다. 다행히 알퐁드 드 글레옹 남작이 대한제국관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나섬으로써 급진전되었다. 하지만 대한제국관 건물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인 1900년 1월 남작이 갑작스럽게 죽어 공사가 중단되는 위기에 처하고 한국의 참가도 무산될 뻔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 미므렐 백작이 구원투수로 나서 한국 위원들을 고무시켰으나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미므렐은 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광업권과 철도권을 요구했다. 고종이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중단되었던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도 재정이 빠듯해 원래 1358㎡였던 전시 면적은 760㎡로 줄어들었다. 건축 설계는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외젠 페레가 맡았다. 그는 한국으로 건너와 경복궁 근정전을 둘러보면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쉬프란 대로에 근정전처럼 당당한 100평 규모의 대한제국관을 완성했다.
당시 발간된 박람회 공식 책자에 소개된 대한제국관의 모습은 이랬다. ‘한국 대표단은 쉬프렌 대로에 극동의 모습을 잘 살린 우아하고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320㎡ 넓이의, 화려한 색을 입힌 목조건물로 골조는 금색으로 빛난다. 하늘로 솟은 처마와 커다란 지붕은 한국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으로 재현했고 내부는 황제가 기거하는 궁궐의 알현실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 천이 걸려 있다. 전시관 주위로 난간이 달린 회랑이 있다.’ 쿠랑은 대한제국관을 소개하는 팜플렛에 ‘1900년, 서울의 추억’이란 글을 올렸다. 대한제국관에는 러시아 황제를 포함해 60만 명이 다녀갔다. 1일 평균 2,850명이 관람한 것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당시 유럽인의 관심이 적지않았음을 말해준다.

박람회 종료 후 전시품들은 박물관 기증이나 판매를 통해 현지에서 처분하는 것이 관례였다. 대한제국도 판매하려 했으나 팔리지 않아 공예예술박물관, 국립음악원박물관, 예술직업전문학교, 기메박물관 등에 기증했다. 당대 조선의 수공업 기술을 대표했을 공예품과 불화들은 프랑스에 대한제국을 알리는 공식 문물이 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직지’ 소유주 변동… 플랑시 → 베베르(고서수집가) → 국립프랑스도서관
플랑시는 1907년 조국으로 돌아가 1911년 3월 자신이 한국·중국·일본에서 수집한 소장품 883점을 경매에 내놨다. 이중 조선 것은 700여점에 달했다. 당시 경매기록부를 보면 711~787번은 책이고, 788~789번은 판화, 790~798번은 지도였는데 ‘직지’ 번호는 711번이었다. 플랑시는 경매 카탈로그 서문에서 “구텐베르크 발명 훨씬 전에 한국이 금속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고 ‘직지’를 홍보했다. 당시 프랑스국립도서관은 ‘플랑시 컬렉션’ 중 서적, 달력, 부적 등 108건을 구입하면서도 ‘직지’와 ‘육조대사법보단경’은 구매하지 않아 직지는 당대의 부유한 보석상이자 고서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의 손에 넘어갔다. 직지는 180프랑, 육조대사법보단경은 62프랑이었다. 뒤늦게 직지의 가치를 알게 된 프랑스국립도서관장이 세 차례나 베베르를 찾아가 “직지를 팔거나 기증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베베르는 거절했다. 대신 1943년 숨지기 전 후손에게 “내가 죽으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상속자인 손자는 베베르의 모든 자료를 미국 스미스소니언 프리어박물관에 넘기면서도 유언을 지켜 ‘직지’와 ‘육조법보단경’은 195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952년 ‘직지’에 한국본 장서 번호 109번을, ‘육조법보단경’에 110번을 붙여 등록한 후 동양문헌실에 보관해 왔다. 동양문헌실에는 통일신라시대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도 소장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