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역시절 장훈의 호쾌한 타격모습
by 김지지
윤석열 대통령과 일본의 기시다 총리가 2023년 5월 19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찾아 참배할 예정이다. 참배를 앞두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에 큰누나를 잃고 자신도 A급 피폭자로 살고 있는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출신의 장훈이 “日에 언제까지 사과하라, 돈내라 할건가”라며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얘기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장훈 가족이 원폭에 희생되었던 당시 상황과 장훈이 프로야구선수로 일본에서 이룩한 전설의 기록들을 살펴본다.
4살 때 사고로 오른쪽 손가락 달라붙거나 구부러져
1959년 4월 10일,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 파이터스)의 장훈(1940~ )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장훈으로서는 프로야구 입단 후 처음 치르는 데뷔전이었다. 가난과 차별, 신체적인 어려움을 참아가며 손꼽아온 감격의 순간이기도 했다.
장훈은 일본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났다. 경남 창녕 출신의 아버지가 가난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어머니가 1939년 아들딸 3남매를 데리고 히로시마로 이사해 막내아들 일본에서 장훈을 낳은 것이다. 일본이름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로 살았던 장훈은 어려서부터 장애자였다. 네 살 때인 1944년 겨울, 고구마를 모닥불에서 굽고 있다가 갑자기 트럭 한 대가 후진하면서 장훈을 밀어버리는 바람에 오른손이 모닥불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고 후 장훈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달라붙고, 엄지와 검지는 심하게 구부러졌다. 새끼 손가락은 뼈마저 녹아 형체도 없었고, 물건을 쥐고 들어올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12살 큰누나가 학교에서 피폭되어 쓰러진 것이다. 어머니는 열기에 녹아 얼굴도 못 알아보는 아이들 틈새에서 명찰로 딸을 찾았으나 온몸에 화상을 입은 딸은 다음날 새벽에 세상을 떴다. 산 중턱의 후미진 부락에 살았던 장훈의 가족은 산이 원폭의 방사능과 열기를 막아준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장훈은 집에 있다가 갑자기 “번쩍,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정신을 되찾았을 땐 어머니가 장훈을 꽉 껴안고 있었다. 유리 파편에 찔린 어머니의 치마저고리는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원폭이 일으킨 3000도가 넘는 열기에 완전 파괴되거나 전소한 가옥이 히로시마에서만 5만 2000채였다. 폭발지에서 직경 1.2㎞ 구역에 살던 사람은 절반이 사망했다. 백혈구 감소 등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그해 말까지만 히로시마 인구의 40%에 달하는 약 14만명이 세상을 떴다. 장훈은 A·B·C·D등급으로 분류된 피폭자 건강수첩(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폭자에게 일본 정부가 교부하는 증명서)에 A등급으로 기록되었다. A등급은 원폭 투하 지점에서 1㎞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장훈은 당장은 괜찮아 보였지만 언제 후유증이 도질지 몰라 마음은 늘 편치 않았다. 엎친데덮친격으로 광복 이듬해 잠시 한국에 갔던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다. 어머니는 남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밀주를 담갔고, 암시장에서 받아온 곱창을 구워 선술집을 열었다.

고시엔 출전이 꿈이었으나 인연은 없어
장훈은 오른손을 쓰지 못했지만 몸집이 커 어려서부터 자주 싸움에 휘말렸다. 이런 장훈을 구해준 것은 야구였다. 힘을 쓰지 못하는 오른손을 단련하기 위해 중학시절부터 손에 피가 나도록 타이어를 두들겼다. 오른손잡이로 태어났지만 좌타자로 배트를 휘둘러야 했다. 학창시절 장훈의 꿈은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출전이었다. 고향 히로시마에서 다니던 고교를 1학기만에 그만두고 멀리 오사카 나니와상고로 전학한 것도 고시엔에 출전할 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장훈의 10살 위 큰형은 자신도 어렵게 살면서 오사카로 유학을 떠난 동생을 아버지처럼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큰형은 택시 기사로 월 2~3만엔을 벌면서도 매달 1만엔을 꼬박꼬박 동생에게 보냈다.
그러나 고시엔 대회는 장훈과 인연이 없었다. 2학년 때는 나니와상고가 학내 폭력문제로 고시엔 대회 1년 출전금지 처분을 받아 꿈을 1년 연기해야 했고, 금지가 풀린 3학년 때는 4번 타자로 지역별 예선 우승의 견인차였는데도 대회 직전 야구부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의 누명을 쓰고 출전하지 못했다. 장훈은 야구가 싫어졌다. 실의에 빠진 그를 구한 것은 그해 한국에서 열린 한·일 친선고교야구였다. 고시엔대회에 나가지 못한 재일동포 고교생이 모국을 돌며 하는 경기였다. 장훈은 자신의 일행을 환영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야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1958년 고교 3학년인 그에게 프로야구팀으로부터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계약금(600만 엔)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나선 팀은 주니치 드래건스였다. 주니치는 강팀이면서도 언론사까지 소유하고 있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엔 더없이 좋은 팀이었다. 그러나 장훈은 200만 엔의 계약금을 제시한 도쿄의 ‘도에이 플라이어즈'(현 니혼햄) 팀에 입단했다. 꿈의 도시 도쿄에서 야구를 시작하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도쿄의 또 다른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요미우리는 중고교 시절 싸움꾼으로 알려진 장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장훈과 동갑내기이자 ’영원한 라이벌‘ 왕정치는 1200만 엔이라는 거금을 받고 투수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4번 타자
그렇다고 도에이 입단이 순탄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는 프로야구단에 외국인 선수를 2명까지만 허용하는 게 규정인데 도에이 구단엔 이미 미국인 2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에이의 구단주가 양자 입양을 제안했다. 일본 국적으로 ‘세탁’을 하자는 얘기였다. 구단주의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단호했다. “조국을 팔면서까지 야구 선수가 될 필요는 없다”며 “야구를 그만두라”고 했다. 결국 도에이는 일본야구협회에 압력을 넣어 ‘1945년 이전 일본 출생자는 예외’라는 규정을 추가한 끝에 장훈을 영입했다. 장훈은 현역시절은 물론 지금까지도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 있다.
장훈은 이런 과정을 거쳐 1959년 4월 10일 데뷔전에 출전했다. 장훈이 제아무리 고교 최고의 강타자였다지만 프로야구의 벽은 역시 높았다. 첫 타석에서 상대투수가 던진 단 3개의 공에 삼진을 당했다. 수비에서도 날아오르는 타구를 잡지 못하고 머리 위로 넘기는 결정적인 실책까지 범했다. 장훈은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지도 못한 채 교체되었다.
4월 11일의 상대는 전년도 성적 14승 4패를 자랑하는 발군의 투수였다. 그러나 데뷔 두 번째 타석에 나선 장훈의 눈에 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좌중간 2루타였다. 데뷔 첫 안타이자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인 3085 안타의 시작이었다. 다음 타석에서는 우측 담장을 넘기는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 장훈은 점차 프로야구에 익숙해졌다. 맹타를 휘둘렀고 6월 13일 4번 타자가 되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4번 타자 탄생이었다. 데뷔 첫해 장훈은 13개의 홈런과 57 타점, 0.275의 타율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왕정치는 투수에서 타자로 막 전업해 성적이 좋지 않았다.
순풍에 돛을 단 듯 1960년 올스타전에 뽑히고 1961년 0.336의 타율로 수위타자가 되었다. 1962년엔 0.333의 타율에 31개의 홈런으로 퍼시픽리그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팀도 일본 시리즈를 석권하는 겹경사를 맞았다. 1967년부터 4년 연속 수위타자가 되는 등 장훈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공이라면 그라운드 어떤 위치와 방향으로도 쳐낸다고 해서 ’부채타법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들
1970년은 장훈에게 생애 최고의 해였다. 시즌 초반부터 3할대를 유지하며 톱타자의 위치를 놓치지 않더니 마침내 일본 프로야구사상 전인미답의 최고타율을 기록한 것이다. 10월 18일 장훈은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5타수 4안타를 터뜨려 타율을 0.3834로 끌어올렸다. 그 전까지 일본 프로야구의 최고타율은 19년 전 기록된 0.3831이었다. 장훈의 타율을 관리하려는 감독의 배려로 시즌 마지막 세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아 장훈의 최고타율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던 장훈의 기록은 1985년 센트럴리그 한신팀의 미국 선수 랜디 바스에 의해 15년 만에 깨졌다. 장훈이 소속된 퍼시픽리그에서는 1994년 스즈키 이치로가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24년 동안 철옹성이었다.
장훈은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그리고는 같은 팀 왕정치와 호흡을 맞춰 그해 요미우리에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1980년 1월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가 그해 5월 28일 대망의 3000 안타를 기록한 뒤 1981년 10월 31일 23년간의 선수생활을 뒤로한 채 그라운드를 떠났다. 은퇴할 때까지 장훈은 성적이 좋지 않으면 변명거리로 들릴까봐 피폭자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의 기록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통산 2752 경기에 출전해 통산타율 0.319에 수위타자 7차례, 504 홈런과 1676 타점을 기록했고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3085개의 안타를 쳤다. 특히 3000 안타, 500 홈런, 300 도루는 당시 미국의 메이저리그에서도 단 한 명만 보유할 정도로 달성하기 힘든 대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지금도 일본에선 난공불락이다. 타율은 4000타수 이상일 땐 역대 3위지만 7000타수 이상에선 1위다. 수위 타자 7회는 동률 1위이고, 시즌 타율 0.300 이상 16회와 0.330 이상 11회도 일본 기록이다. 그외 다른 기록들은 하나씩 깨졌지만 일본 프로야구 최다 안타 기록만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일본인 스즈키 이치로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로 활동할 당시인 2009년 4월 17일 3086번째 안타(일본에서 1278 안타, 미국에서 1808 안타)를 쳤지만 순수 일본프로야구의 기록은 온전히 장훈의 몫으로 남아있다. 은퇴 후에는 198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야위원회(KBO) 총재 특보를 맡아 한국 프로야구 탄생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90년엔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