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시인·기자·독립운동가 이육사 중국 감옥에서 옥사(獄死)

↑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당시의 신상 카드

 

시인이자 투사, 독립운동가이자 신문기자

이육사(1904~1944)는 시인이자 투사로, 독립운동가이자 신문기자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시와 삶이 일치했던 대표적인 시인이었다. 이육사는 경북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원록이었다. 투철한 항일 의식은 친가·외가 모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가풍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1927년 10월 대구 전체를 진동시킨 이른바 ‘장진홍 의거’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육사는 배움과 모색의 기간을 보냈다. 조부에게 한학을 배우고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5년 1월 귀국하고 1926년 중국으로 건너가 중산대에서 1년간 공부하고 1927년 귀국했다. 바로 그해 장진홍 의거가 일어나면서 육사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았다.

장진홍 의거는 장진홍이 여관 종업원을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보낸 폭탄이 1927년 10월 18일 11시 40분쯤 터져 일본인 경찰 4명과 은행원 1명 등 5명이 부상하고 은행 유리창 70여 장이 깨진 사건이다. 일경은 범인의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애꿎은 사람들만 잡아들여 각종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원기, 원록(육사), 원일, 원조, 원창, 원홍 등 이육사의 6형제 가운데 위로부터 내리 4형제도 이때 주모자로 몰려 일경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다. 육사 개인으로는 이후 17번으로 이어질 투옥의 시작이었다. 육사 형제가 의거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건 후 1년 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 14일 장진홍이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되면서 밝혀졌다. 이육사는 무혐의로 밝혀져 투옥 2년 6개월 만인 1929년 5월 풀려났다. 수인번호 264(혹은 64)는 이후 육사의 아호 ‘이육사’가 되었다.

1930년 11월 대구 거리에 일본을 배척하는 내용의 격문이 전봇대에 나붙고 거리에 뿌려졌을 때도 육사는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1931년 1월 동생(원일)과 함께 구속되어 2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 사건은 ‘장진홍 의거’와 달리 육사가 신문배달원을 시켜 격문을 거리에 붙이게 했다는 증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육사가 직접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육사는 출옥 후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육사는 자신을 포함해 3형제가 조선일보 기자라는 각별한 인연도 있었다. 육사가 ‘이활’ 혹은 ‘육사생’이라는 필명으로 기사를 쓰고 있을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2년 연속 시와 소설로 당선되고 당대 최고의 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동생 원조는 학예부 기자로 활약했다. 다섯째 원창도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조선일보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이육사의 10행시 ‘말(馬)’이 처음 활자화되어 시인으로서의 존재를 알린 것도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였다.

이육사

 

일제 하에서 17번 투옥

육사는 1932년 중국으로 건너가 그해 10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하고 1933년 4월 26명의 동기생과 함께 졸업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1919년 의열단을 결성한 김원봉이 중국 남경에 설립한 군사학교였다. 따라서 이 학교에 입교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육사도 의열단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육사 자신은 의열단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인 신석초가 “이육사는 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 상냥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를 가졌다고 회고할 정도로 조용했기 때문에 그가 무장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육사는 1933년 7월 귀국 후 그해 가을 ‘신조선’지에 시 ‘황혼’을 발표하면서 늦깎이로 문단의 말석에 명함을 내밀었다. 이후 짧은 삶을 살면서 ‘광야’ ‘꽃’ ‘청포도’ 등 시 34편, 평론 11편, 수필 13편, 번역물 2편 등 60편가량을 남겼다. 육사는 멋쟁이였다. 늘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녔으며 술을 많이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이불 밑에 양복을 깔고 자야 마음이 놓였다. 육사는 프로문학 계열의 신석초를 만나고 김광균과 최정희 등의 문인을 사귀면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본명인 원록 대신 ‘활’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시와 논설을 쓰고 중국 작가 노신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는 등 문인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1934년에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 일제 검속에 걸려 또다시 여러 달 동안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몸이 쇠약해져 포항 송도(1937)와 경주(1938)에서 요양 생활을 하면서도 ‘강 건너간 노래’ ‘해조사’ 등 빼어난 시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특히 ‘문장’지에 발표한 ‘청포도’(1939) ‘절정’(1940)은 육사의 문학적 생애의 한 절정을 이뤘다.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절정’은 이랬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마지막 구절로 유명했다. ‘강철 무지개’란 칼 같은 기세로 일제 침략자들을 찌르는 행동을 상징했다.

이육사가 시인으로만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육사 전집’을 보면, 문학평론, 사회평론, 에세이 등 여러 편의 산문들을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쓴 사회평론들이었다. ‘국제무역주의의 동향’,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1935년과 노불관계(露佛關係) 전망’ 등 당대의 국제정세를 다룬 글들을 발표했다.

동생 이원일(아래), 친구 조규인과 함께 찍은 20대의 이육사(우측) 모습

 

이육사는 1942년 4월 모친상을 당하고 그해 7월 형 원기마저 죽어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 무렵 시 ‘계절의 표정’(조광), ‘광인의 태양’(조선일보) 등을 발표하지만 이미 창작의 샘은 고갈될 대로 고갈된 상태였다. 1943년 4월 정신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을 떠돌다 7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에 참석하러 귀국했다가 그해 늦가을 또다시 17번째로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북경 땅 차가운 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해방 후 그의 유고를 정리한 아우 원조에 의해 1946년 10월 20일 서울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육사시집’이다.

육사 시 중에서 가장 웅장한 스케일이 돋보이는 ‘광야(曠野)’는 유고 작품으로 전해지다가 이육사의 동생인 이원조가 해방 후인 1945년 12월 17일 ‘자유신문’에 기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 // 모든 山脉(산맥)들이 / 바다를 戀慕(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참아 이곧을 犯(범)하든 못하였으리라 // 끈임없는 光陰(광음)을 / 부지런한 季節(계절)이 픠여선 지고 / 큰 江(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엇다 // 지금 눈 나리고 / 梅花香氣(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千古(천고)의 뒤에 / 白馬(백마)타고 오는 超人(초인)이 있어 / 이 曠野(광야)에서 목노아 부르게하리라”

이육사 시 ‘바다의 마음’ 친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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