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스웨덴판 쉰들러’ 라울 발렌베리, 독일군 점령지인 헝가리에서 유대인 5만명 구조

↑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있는 라울 발렌베리 기념비

 

‘스웨덴판 쉰들러’ 라울 발렌베리(1912~1947)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나 가슴 아프다. 그는 발렌베리 가문 3세대의 공동 리더인 야콥 발렌베리 1세와 마르쿠스 발렌베리 2세의 5촌 조카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발렌베리는 미국 미시간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남아공의 무역회사를 거쳐 팔레스타인 하이파에 있는 네덜란드 은행에서 은행 업무를 익힌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그가 유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유대인 난민을 처음 접한 것은 팔레스타인 근무 때였다. 스웨덴으로 귀국 후에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 운영하는 수출입회사에 다녔기 때문에 헝가리 출장이 많았다. 헝가리의 말과 문화를 배우고 헝가리 내 유대인을 많이 알게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업무 특성상 나치 치하의 독일은 물론 나치에 점령된 프랑스 고객들을 직접 방문할 일도 많았다. 그때마다 독일에서 벌어지는 잔혹 행위들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헝가리 내 유대인들이 비극으로 내몰린 것은 독일군이 헝가리에 진주한 1944년 3월이었다. 유대인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헝가리 주재 스웨덴 대사관이 적극적으로 ‘보호여권’을 발급했지만 72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 가운데 60% 이상이 3개월 만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1944년 4월 7일부터 7월 8일까지 강제 이송된 유대인 수는 44만 명에 달했다. 헝가리 정부 수반 호르티는 처음에는 독일의 유대인 강제 이송에 소극적이었으나 나치의 압력이 거세지자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 강제 이송을 지원했다.

수많은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자 스웨덴 내 세계유대인총회 대표자들과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미국 정부에 해결을 요청했다. 미 정부는 헝가리 유대인을 구해낼 외교관을 추천해 달라고 중립국 스웨덴에 요청했다. 스웨덴 정부는 6개국 언어에 능통하고 유대인에 대해 이해가 깊은 라울 발렌베리를 천거했다. 발렌베리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1944년 7월 9일 전권대사 자격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마지막 해결사’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사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라울 발렌베리

 

유대인 구출하는 데 혼신의 노력 다해

발렌베리는 스웨덴에 친척이나 사업상 파트너가 있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보호여권’을 발급했다. 뒤이어 교황청을 비롯 스위스, 포르투갈, 스페인 대사관도 자국 여권을 발급했다. 아이히만은 발렌베리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나 중립국인 스웨덴과의 우호 관계를 중시하는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히만은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을 잡아들여 분한 마음을 달래려 했고, 발렌베리는 그에 맞서 유대인을 구출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발렌베리는 부다페스트 안에 ‘스웨덴의 집’ 30곳을 세워 그해 겨울이 되기까지 스웨덴 비자를 발급해 유대인 2만 명을 피신시켰다. 헝가리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 1만 3,000여 명은 부다페스트 근처 은신처에서 보호했다. 1944년 10월 16일 나치 독일과 긴장 관계에 있던 호르티 정부가 독일이 지원하는 ‘화살십자가당’ 민병대장 살라시의 공격을 받고 붕괴했지만 발렌베리는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헝가리 공무원들에게 전쟁이 끝난 뒤 여권을 발급해 주겠다고 약속하거나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협조를 얻어냈다. 이런 식으로 그가 구해낸 사람만 최소 5만 명이나 되었다.

1945년 1월 부다페스트의 항복이 임박하자 나치 친위대는 그때까지 살아 있는 도시 안의 유대인 전원을 처형할 계획을 세웠다. 발렌베리는 현지 독일군 사령관을 찾아가 “집단 처형을 감행한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소련군에 고발할 것이며 당신이 처형되는 모습을 반드시 지켜보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독일군 사령관은 굴복했고 이 마지막 영웅 행위 덕에 또다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했다.

소련군이 마침내 헝가리를 점령한 것은 1945년 1월이었다. 이로써 유대인의 악몽은 끝이 났으나 발렌베리 개인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발렌베리를 미국의 첩자로 오인한 소련 KGB가 1945년 1월 17일 그를 붙잡아 모스크바로 끌고 간 것이다. 이후 55년간 소문만 무성한 채 발렌베리의 종적이 묘연했다. 1957년 2월 소련은 발렌베리가 1947년 7월 17일 교도소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1989년에는 발렌베리의 유품을 스웨덴의 가족에게 돌려보냈다.

정확한 진실은, 소련이 몰락한 후인 1990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 요원에 의해 밝혀졌다. 그에 따르면 라울 발렌베리는 소련으로 끌려가 회유와 협박 그리고 무차별 고문을 당하다가 1947년 7월 17일 독약이 든 약물을 먹고 35세의 나이로 숨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으므로 확실한 사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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