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1심 무죄 판결

↑ 법정의 박인수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

박인수는 6·25 종전 무렵 해병대 대위였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장교와 결혼한 것에 충격을 받아 그녀를 찾아 해매는 과정에서 1953년 8월 부대를 무단이탈하고 이 때문에 불명예 제대를 했다. 제대 후에는 군 재직 시 해군장교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댄스홀을 드나들며 익힌 사교춤을 기반으로 댄스홀을 기웃거렸다.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세련된 매너까지 갖춘 데다 제대할 때 반납하지 않은 군 장교 신분증까지 갖고 있어 쉽게 뭇 여성의 호감을 샀다.

그가 본격적으로 여성 편력을 보인 것은 1954년 4월경이었다. 박인수에 따르면 능숙한 춤과 뛰어난 화술로 여성의 혼을 빼놓은 뒤 여성을 꼬드겨 여관으로 직행해도 여성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1년여 동안 계속되던 엽색 행각에 제동이 걸린 것은 1955년 5월이었다. 그와 관계를 맺은 한 여성의 오빠가 경찰이었는데 혹시라도 결혼한 여동생에게 해가 될까봐 박인수를 잡아들여 뒤를 캐묻는 과정에서 박인수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경찰은 박인수를 관명 사칭으로 구류를 살게 하면서 여성 관계를 추궁한 끝에 박인수에게 농락당한 여성이 14개월 동안 70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성 대부분이 대학생이고 상류층 출신이 많다는 점에 또 한 번 놀란 경찰이 박인수를 법정에 세우려 했으나 애로점이 많았다. 혼인빙자간음죄는 친고죄였기 때문에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하는데 한동안 고소자로 나서는 여성이 없던 데다 고관 집에서는 수사조차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공판 기소장에는 6명의 이름만 올라갔다. 공교롭게도 1명만 미용사였을 뿐 1명은 여고 졸업생, 4명은 이화여대생이었다. 이 때문에 재판을 배당받은 권순영 판사가 “이화여대가 박인수의 처가냐”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또 “장가를 가려면 권 판사의 리스트에 상대 여성이 들어 있는지 물어보고 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1955년 6월 17일 제1차 공판이 열렸을 때 ‘색마’로 낙인찍힌 박인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수많은 방청객이 몰려들었다. 요정의 마담까지 고위층 인사를 통해 방청권을 요구하는 바람에 권 판사는 한동안 자리를 피해다녀야 할 정도였다. 방청석이 주로 여성들로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열린 첫 공판에서 박인수는 여대생, 미용사 등과 정을 통한 사실을 시인했다. 게다가 자신이 상대한 여성 중 미용사만 처녀라고 털어놓아 여대생 딸을 둔 전국의 어머니를 경악케 했다. 또 “그들과 결코 결혼을 약속한 사실이 없고, 약속할 필요도 없었다”며 “댄스홀에서 춤을 춘 후에는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구태여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1950년대 웃지 못할 풍속도

첫 공판 후 사회와 대학에서는 문란해진 성도덕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화여대는 학생 풍기 확립책을 마련하라며 문교부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7월 9일의 2회 공판 때는 1회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해방 후 법정 신기록’이라는 법원의 발표가 있었다. 방청객들은 “처녀들의 신세를 망친 박인수를 엄벌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그런 남자를 따라다닌 여자의 책임이 더 크다”는 쪽으로 갈려 언쟁을 벌였다.

2회 공판에서 박인수에게 1년 6개월의 구형이 내려진 가운데 7월 22일의 1심 선고일이 다가왔다. 사람들 대부분은 한국판 카사노바에 대해 유죄를 예상했다. 그러나 권 판사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라며 공무원 자격 사칭에 대해서만 2만 환의 벌금을 부과했을 뿐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댄스홀에서 만난 정도의 일시적 기분으로 성관계가 있었을 경우 혼인이라는 언사를 믿었다기보다 여자 자신이 택한 향락의 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무죄 판결의 이유였다.

그러나 박인수는 10월 14일의 2심 판결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결국 다시 수감되었다. 박인수는 상고했으나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유죄가 확정되었다. ‘박인수 사건’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던 1950년대 한국의 웃지 못할 풍속도였다. 자유로워진 성풍속도, 여성의 정조와 순결을 강조하는 윤리의 이중 잣대, 미군 문화를 통해 전파된 춤바람과 댄스홀….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응축된 것이 1950년대의 ‘박인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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