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美 로젠버그 부부 간첩 혐의로 사형 집행… 사형 반대 여론이 들끓었으나 나중에 사실로 밝혀져

↑ 로젠버그 부부

 

1949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은 원폭을 독점하려 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을 우려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소련 원폭 기술의 뒤를 캐고 있던 1950년 1월 클라우스 푹스가 영국의 정보기관 MI5에 체포되었다. 푹스는 1933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후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독일 태생의 유대인 핵물리학자였다. 푹스의 체포에는 미국의 대규모 암호해독 작전인 ‘베노나 프로젝트’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푹스는 레이먼드라는 가명의 미국인에게서 원폭 개발 관련 자료를 넘겨받아, 영국에서 활동 중인 KGB 요원 알렉산데르 페클리소프에게 건네주는 중간 역할을 했다고 자백했다. 곧 레이먼드도 페클리소프가 미국에서 근무할 때 포섭한 소련 출신의 유대인 화학자 해리 골드라는 사실이 밝혀져 1950년 5월 체포되었다.

해리 골드는 감형을 약속받고 미국 내 또 다른 스파이의 이름을 댔다. 그의 자백에 따라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전기기사로 일했던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라는 이름의 유대계 소련 스파이가 1950년 6월 체포되었다. 그린글래스 역시 FBI의 감형 회유를 받고, 1944년 자신의 매형인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누나 에셀 로젠버그에게 원폭 기밀을 제공했다고 실토했다.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1950년 7월 17일, 에셀 로젠버그는 3주 후 체포되었다.

조사 결과 줄리어스는 뉴욕에서 가난한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시립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며 좌익운동에 뛰어들었고, 에셀 로젠버그는 뉴욕의 회사에 근무할 때 파업 주동자로 해고된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두 사람은 1939년 결혼했다. 줄리어스는 1939년 12월 미국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을 숨긴 채 1940년 민간인으로 육군 통신대에 취업하고 에셀은 정식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정치활동을 지지했다. 줄리어스의 처남 그린글래스도 열혈 공산당 지지자였다.

 

‘원폭 독점이 무너진 냉전기의 정치적 반동’이라며 세계 여론 들끓어

부부가 체포될 당시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고, 6·25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재판은 1951년 3월 6일 뉴욕 맨해튼에서 시작되었다. 로젠버그 부부는 혐의 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그 어떤 협력도 거부했다. FBI와 검찰도 그린글래스의 증언 외에는 딱히 유력한 증인이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모든 비밀을 털어놓은 대가로 사형을 면하고 감옥살이를 하던 소련의 거물 스파이 해리 골드도 “나는 그들을 본 적도 없고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며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임을 부인했다. 하지만 이미 검찰과 밀약한 처남 그린글래스의 불리한 증언으로 재판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린글래스는 법정에서 줄리어스를 주모자로 지목하고 누나 에셀이 기밀문서를 타이핑했다고 진술했다. 부부는 사실대로 자백하면 사면해 주겠다는 검찰의 제안을 거부했다. 1951년 3월 29일 배심원단이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고 재판부가 4월 5일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변호인단의 항소가 있었으나 항소심에서는 법률의 적법성 여부만을 심사했기 때문에 최종 판단은 연방대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세계 여론이 들끓었다. 증거가 부족하고 원폭 독점이 무너진 냉전기의 정치적 반동으로 조작 의혹이 짙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동조자인 사르트르(작가)와 피카소(화가)는 물론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교황 피우스12세까지도 이들의 구명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아인슈타인, 러셀, 콕토, 리베라 등 세계의 저명한 학자, 작가, 예술가들도 미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내 구명운동을 벌였다. 간첩으로 체포된 사람 대부분이 유대인이다보니 “유대인 탄압”, “제2의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공교롭게도 재판에 직접 관련된 판사, 검사, 변호인단 모두 유대인이었다.

 

소련 몰락 후 간첩 역할 했다는 증거 나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각종 탄원을 거부한 가운데 연방대법원이 1953년 6월 13일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집행 연기와 재심에 관한 피고의 청원을 기각했다. 이로써 로젠버그 부부는 사형이 확정되었다. 해리 골드와 그린글래스 등에게는 징역 10년에서 17년까지 선고되었다. 사형 집행이 예정된 6월 19일 부부는 최후의 면회를 허가받아 이승에서의 마지막 2시간을 함께 보냈다. 줄리어스가 뉴욕주 싱싱형무소 전기의자에 앉은 것은 그날 오후 8시쯤이었다. 세 번의 전기 충격 끝에 줄리어스는 2분 30초 만에 숨이 끊어졌으나 에셀은 5분 동안 다섯 번의 전기 충격을 받고서야 숨이 끊어졌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백악관 앞의 반공 시위대는 “공산주의자 쥐새끼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올리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같은 시각 뉴욕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이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서방 세계를 가장 들끓게 한 사건인 만큼 논란은 지금까지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줄리어스가 간첩 행위를 했다는 사실은 이후 드러난 여러 정황상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그린글래스와 일부 공범의 구두 증언을 제외하고는 사형을 선고할 만한 결정적인 물증이 없었다. 부부가 빼돌렸다는 원폭 기밀이 핵심적인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사형이 지나치다는 주장, 죄상이 더 무거운 푹스나 그린글래스와 비교해 형량이 형평에 어긋난다는 지적, 간첩 행위를 하지 않은 에셀 로젠버그에게까지 사형을 선고한 것은 지나치다는 항변도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몰락 후 부부가 간첩 역할을 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1990년에는 흐루시초프가 로젠버그 부부의 도움을 언급한 녹음 내역이 공개되고, 1995년 7월 ‘베노나 프로젝트’에 의해 파악된 교신 내용이 공개되었을 때 줄리어스가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