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류의 원조’ 김시스터즈 미국 진출

↑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한 김시스터즈. 왼쪽부터 숙자, 설리반, 이난영, 민자, 애자

 

가수 어머니와 작곡가 아버지의 피 물려받아

김시스터즈는 동서양의 문화를 조화시킨 독특한 무대 매너, 개성 있는 연주와 노래로 1960년대 미국인들의 관심을 끈 한국 최초의 보컬그룹이다. 가수 이난영과 작곡가 김해송 부부, 그리고 이난영의 오빠 이복룡의 피를 이어받아 미국에 한국의 문화와 대중가요를 처음 소개하고 위상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시스터즈의 어머니 이난영은 불멸의 가요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이고, 아버지 김해송은 일제 치하에서는 작곡을 하고 해방 후에는 뮤지컬 전문쇼단 ‘KPK 악단’을 창단해 다양한 뮤지컬 쇼를 무대에 올린 한국 뮤지컬의 개척자다.

이난영은 1950년 6·25전쟁 와중에 남편 김해송이 납북되자 홀로 7남매를 키웠다. 다행히 아이들은 음악에 재주가 있었다. 이난영은 전쟁 중이던 1951년 대구에서 10살 전후의 두딸 영자와 숙자로 김시스터즈를 결성했다. 하지만 큰딸 영자가 키가 훌쩍 커지자 오빠(이봉룡)의 딸 이민자(성을 바꿔 김민자로 활동)와 자신의 또 다른 딸 김애자를 합류시켜 1953년 김시스터즈 이름 그대로 미8군부대 클럽에 진출시켰다. 김시스터즈는 2차대전 직후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의 여성 보컬그룹 ‘앤드루 시스터즈’의 히트곡을 뜻도 모르고 무작정 외워 노래했다. 앙증맞은 아이들의 노래에 미군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며 전쟁의 고단함을 잊었다.

김시스터즈는 휴전 직후인 1953년 가을, 수도극장(스카라극장) 무대에 올라 소녀 트리오의 탄생을 알렸다. 초등학교 2~3년생이었던 김시스터즈가 부른 앤드루 시스터즈의 노래는 비록 발음은 엉망이었지만 호응은 뜨거웠다. 주한 미군 가운데 김시스터즈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그들에게 비로소 행운이 찾아온 것은 1958년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아시안쇼를 기획하고 있는 톰 볼이 새로운 흥행거리를 물색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가 그곳 미군들로부터 김시스터즈의 명성을 들은 것이다. 톰 볼은 한국으로 건너와 김시스터즈의 잠재력을 확인한 후 ‘일단 몇 개월을 공연해본 뒤 호응이 좋으면 계속하자’는 내용의 계약을 이난영과 체결했다. 이난영은 김시스터즈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팀이 깨질 것을 우려해 “23살 때까지는 남자와 데이트하지 마라” “셋이 함께 움직여라”고 주문했다. 이난영은 1959년 1월 김시스터즈를 미국으로 보낸 뒤 자신감이 생겨 두 아들과 조카로 결성한 ‘김보이스’를 데뷔시켰다. 김보이스도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뚜렷한 활약은 하지 못했다.

 

해외 진출 1호 보컬팀의 탄생

‘김시스터즈’가 미국 땅을 밟은 것은 1959년 1월 9일이었다. 해외 진출 1호 보컬팀의 탄생이었다. 김시스터즈가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라스베이거스 선더버드 호텔의 쇼프로그램 ‘차이나 돌 레뷔’였다. 공연은 아시아 출신의 가수들 위주로 짜였다. 김시스터즈가 오기 전, 중국과 일본 가수는 많았지만 한국 가수로는 김시스터즈가 처음이었다. 김시스터즈는 매일 밤 2개 쇼에 출연했다. 관객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빛나는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오른 10대 소녀 3명은 경쾌한 재즈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 6개월로 늘어난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는 다른 호텔로 무대를 옮겨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김시스터즈는 공연 때마다 “한국에서 온 김시스터즈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아리랑’을 불렀다. 색소폰(숙자), 베이스(애자), 드럼(민자)을 중심으로 가야금, 장구, 북 등 10여 가지 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여성 보컬그룹의 등장에 미국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우리 민요를 곁들인 춤과 노래와 연주가 버무려진 이색적인 무대는 미국인들을 열광시켰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지쳐 있던 재미 동포들도 이들의 민요 가락에 눈물을 쏟아내며 향수를 달랬다.

김시스터즈에게 음반 제의가 들어온 것은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출연했던 미국 최고의 TV 버라이어티쇼 ‘에드 설리번 쇼’에 1960년 출연한 뒤였다. 김시스터즈는 이후 ‘에드 설리번 쇼’에만 20여 차례 출연했다. 그룹 코스터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찰리 브라운’ 등 12곡을 수록한 첫 음반은 1960년에 출시되었다. 거의 모든 곡을 영어로 취입했으나 ‘아리랑’과 이난영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봄맞이’ 만은 한국어로 노래했다. 음반이 인기를 끌자 음악평론가들이 미국 최고의 흑인여성 보컬 트리오 ‘슈프림스’와 같은 등급으로 김시스터즈를 극찬했다. ‘라이프지’지는 1960년 2월호에 특집화보 기사로 소개하고 ‘찰리 브라운’은 1962년 빌보드 싱글차트에 오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공연 무대도 라스베이거스를 벗어나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으로 점차 넓어졌고 주급도 500 달러에서 1만 5000달러로 급등했다.

김시스터즈는 1962년 6월 이난영의 동거남인 남인수가 사망해 다시 혼자가 된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미국으로 초대했다. 이난영은 1962년 12월 미국에 도착, 김시스터즈와 함께 라스베이거스의 무대에 서기도 하고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8개월 정도 지속되었던 미국생활을 접고 1963년 8월 귀국했다. 1964년 자신의 두 아들과 조카로 구성된 ‘김보이스’를 미국으로 떠나 보낸 되 홀로 남은 이난영의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결국 1965년 9월 11일 알코올 중독으로 숨진 채로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발견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김시스터즈의 미국 활동은 더욱 활발했다. 1966년 유명 사회자 밥 호프와 함께 베트남을 방문, 참전 미군을 위해 벌인 위문공연은 열광의 도가니를 이뤘다. 같은 해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페인, 서독 등 유럽 순회공연도 성황리에 마쳤고 몬테카를로에서는 그레이스 모나코 왕비를 위해 특별공연을 펼쳤다. 인기가 높아지자 돈이 따라왔다. 미국 진출 10년 만에 18인조의 개인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푸에르토리코에 자신들의 호텔 나이트클럽을 열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고액 납세자 6위에 오른 때도 있었다.

1967년과 1968년 세 자매는 각각 외국인들과 결혼하고 1970년 5월 조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귀국, 4일 동안 시민회관에서 조국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1973년 사촌인 민자가 탈퇴하면서 해체될 듯 했으나 1975년 김난영의 큰딸 영자가 합류한 후 10년간 활동했다. 돌이켜 보면 김시스터즈야말로 한류의 원조였다. 어린 나이에 미국 무대에 등장해 그 긴 세월 동안 인기를 유지한 한류 스타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