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대표단과 대통령 특사단.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활란, 장면, 조병옥, 모윤숙.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준구
‘대한민국 정부가 선거가 가능한 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
1947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구성을 결의했다. 이후 임시위원단의 관심과 활동 덕에 한국은 1948년 5월 제헌의회 선거를 무사히 치르고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정부를 당당히 수립했다. 임시위원단은 제헌의회 선거 결과가 공정하고 원만하게 치러졌음을 유엔총회에 보고했다.
정부 수립 후 우리 정부의 최대 외교 현안은 1948년 9월 파리에서 개회될 제3차 유엔총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는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중차대한 임무를 맡을 적임자로 낙점한 것은 장면이었다. 장면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영어에 능숙했다. 해방 후에는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거쳐 제헌의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산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승만은 장면의 정치적 무당파성과 종교적 배경에도 주목했다. 장면이 정치적 기반이 없는 무소속이기 때문에 잠재적 정치 라이벌인 한민당 인사들과 거리를 둘 수 있고 천주교의 평신도 대표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이승만은 유엔의 승인을 받기 위해 투 트랙을 활용했다. 장면을 수석대표로 한 유엔총회 대표단과 조병옥을 수석대표로 한 대통령 특사단이었다. 대표단은 장면을 비롯해 장기영 차석대표, 전규홍 법률고문, 김활란 수행원 등 4명으로 구성되었다. 특사단 역시 조병옥을 비롯해 정일형 차석대표, 김우평 경제고문, 김준구 비서 등 4명이었다. 대표단과 특사단 일행은 1948년 9월 9일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대표단 4명은 도쿄와 미국을 거쳐 9월 20일 유엔총회가 열리는 파리에 도착했다. 특사단은 일본·중국·필리핀·미국·캐나다를 거쳐 10월 17일 파리에 도착, 대표단과 합류했다.
제3차 유엔총회는 9월 21일 58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파리의 샤요 궁전에서 개막했다. 총회에 앞서 운영위원회는 65개의 세계 문제를 총회의 토의 사항으로 결정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안건은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 원자력 국제관리, 군비 축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한국의 독립 승인 문제였다. 대표단은 한국이 유엔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방청석에 앉아 회의를 지켜보아야 했지만 총회장 밖에서는 틈틈이 각국 대표단을 만나 대한민국 승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결정적으로 힘이 된 것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당시 유엔총회의 주된 관심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었다. 따라서 이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 문제는 총회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다음 총회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지원, 교황 비오12세가 로마 교황청의 국무장관과 주프랑스 교황청 대표 등에게 한국을 도와주도록 한 지시는 회기 내 처리 가능성을 밝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힘이 된 것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었다.
임시위원단은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1948년의 5·10 선거에서 전체 한국민의 3분의 2를 점하는 선거민이 자유롭고 정당하게 의사 표시를 했다”며 제헌의회의 입법 활동과 대한민국 정부 형성 과정을 자세히 소개했다. 보고서는 또한 “미군이 한국 정부에 이미 정권을 이양했으며 한국 정부는 정상적인 정부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문제는 한국에서 전해오는 부정적인 소식들이었다. 1948년 10월의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무소속 국회의원 45명의 외국군 철퇴 주장, 여기에 11월 3일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김구의 담화 등이 외신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대표단은 이런 혼란스러운 소식들을 빌미 삼아 소련과 공산 진영이 한국을 승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불안해 했다. 게다가 한국 문제 토의는 유엔 총회가 개막되고 두 달이 넘도록 뒤로 미뤄지고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자유 진영이 미국을 중심으로 굳게 결속해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 문제는 총회 마지막 주인 12월 6일 정치위원회 회의에 가까스로 상정되었다. 정치위원회는 유엔 회원국 전체가 멤버였다. 정치위원회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되기에 앞서 두 개의 상반된 안건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하나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제의한 안건으로 북한 대표를 초청해 정치위원회 토의에 참석시키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중국의 장개석 정부가 제의한 안건으로 대한민국 정부 대표를 위원회에 초청하되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국 문제 토의에 참가시키자는 것이었다.
당시 박헌영, 홍명희 등 5명의 북한 대표단은 유엔 사무총장과 유엔총회 의장에게 한국 문제 토의에 참석시켜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프랑스 외무장관에게는 프랑스 입국 비자를 발급해줄 것을 요청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총회는 북한 대표단의 총회 참석 요구를 거부하고 프랑스 정부는 이들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북한 대표단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3개월 가까이 대기하고 있다가 북한으로 돌아갔다.
찬성 48, 반대 6, 기권 1의 압도적인 지지로 결의안 통과
두 안건에 대한 표결 결과 체코슬로바키아 안건은 부결되고 중국 안건이 가결되었다. 그동안 방청석에 앉아 있던 대표단은 그날부터 정식 대표 자격을 얻어 의석을 차지했다. 뒤이어 미국·중국·호주가 공동으로 제안한 한국 문제에 관한 결의안이 정치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선거가 가능한 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결의안이었다.
유엔 정치위원회는 이 한국 결의안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공산권 대표들은 번갈아가며 판에 박힌 말을 지루하게 되풀이하면서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 연설)를 벌였다. 의사 일정을 넘겨 한국 문제 토의를 다음 회의로 미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의안은 12월 8일의 야간회의에서 찬성 41표, 기권 6표로 가결되었다. 한국 문제 결의안(제195호 3)이 유엔총회에 상정된 것은 총회 마지막 날인 12월 12일 오후였다. 호명식으로 진행된 표결 결과 결의안이 찬성 48, 반대 6, 기권 1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시간은 오후 5시 8분이었다. 결의안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결론을 승인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감시하의 자유선거에 의한 합법정부라는 것을 선언한다 ▲한국 주둔 미소 점령군이 조속히 철퇴할 것을 건의한다 ▲유엔 한국위원단을 앞으로 1년간 존속시킨다 ▲한국 위원단은 30일 이내 한국에 부임해 임시위원단을 대체한다는 내용이었다.
결의안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전국적 정부라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함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특히 6·25 때 유엔군의 참전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생존과 직결된 더없이 중요한 외교적 성취였다. 장면 대표는 여세를 몰아 12월 13일 대한민국의 유엔 회원국 가입을 신청했으나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부결되었다. 결의안 통과 후 1950년 6·25 발발 전까지 30개국 정도가 한국을 승인함으로써 한국은 당당히 독립국가로 국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한국은 ‘유엔의 자식’ 별명 얻어
이후 한국은 유엔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유엔의 자식’이다. 6·25 전쟁 후 우리나라는 유엔의 창설일(1945.10.24)을 공휴일로 지정해 매년 성대하게 기념했다. 유엔 성냥, 유엔 찬가까지 유행했다. 유엔이 한국을 위해 한 일 가운데 대표적인 일은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이 합법적이고 정통성을 가진 새로운 자치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하는 데 요람 역할을 한 것이다.
유엔은 6·25 전쟁 때도 유엔 역사상 최초로 집단안보체제를 발동해 유엔군을 지원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에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를 발족시켜 통일 한국의 건설과 민간 구호를 지원하도록 했으며, 1950년 12월에는 유엔한국재건단(UNKRA)을 설치해 전쟁으로 붕괴된 한국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재건 사업을 추진했다. 유엔은 전후 복구 사업과 함께 경제 재건을 위한 5개년 계획도 1953년 수립했다. 유엔 산하기구 중 유엔아동기금과 유네스코 등은 한국의 아동과 여성을 위한 긴급구호 사업을 전개하고 예방접종을 실시했으며 피란지에 분유, 담요, 의료 등을 제공했다. 교과서 인쇄공장(후일 국정교과서주식회사)과 함께 각종 학교도 설립했다. 유엔의 다양한 재건 활동은 1950년대 말까지 계속되어 전후 복구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원조는 한국과 미국 간의 양자 원조가 중심이었으나 적십자사를 비롯한 비정부기구와 유엔 기구들도 인도적·경제적 지원으로 한국의 재건과 발전에 기여했다.
원조 받다가 주는 나라로 변신한 세계 유일의 사례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다. 1950년대의 원조가 전쟁에 따른 긴급구조 및 시급한 경제 재건·복구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후에는 경제 부흥을 위한 개발원조에 초점이 맞춰졌다. 1957년을 정점으로 감소한 무상원조는 1959년 말부터 유상원조로 대체되었다. 1945~1999년 한국에 지원된 공적·사적 원조의 총 규모는 127억 달러나 되었다. 유·무상 합해 미국과 일본(전후 보상금)으로부터 각각 55억 달러, 50억 달러가 들어왔고 독일(8억 3,000만), 아랍 제국(1억 2,000만), 프랑스(1억)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민간구호계획(4억 5,000만), 유엔한국재건단(1억 2,000만), 유엔개발계획(6,900만), 유니세프(1,400만) 등 유엔기구들도 총 10억 달러를 지원했다. 한국이 1995년 세계은행의 차관 대상국에서 졸업한 것은 이런 지원 덕이었다.
원조만 받던 우리나라의 원조 공여는 무역수지가 안정적으로 흑자 국면에 접어든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했다. 1986년 유엔개발계획, 유엔공업개발기구, 유엔식량농업기구 등과 협력기금 및 신탁기금을 설치해 개발도상국에 대한 재정 지원을 시작했다. 유상원조 사업은 1987년 한국수출입은행에 300억 원의 대외경제협력기금을 조성하면서 본궤도에 올랐다. 1991년 4월에는 무상원조 전담기관으로 외무부 산하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도 설립했다.
유엔의 대표적 개발기구인 유엔개발계획도 2000년 우리나라를 순 기여국가로 분류했다. 유엔 관련기구는 아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의 수원국 명단에서도 제외되는 등 한국은 공식적으로 수원국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우리나라의 대외 공적개발원조(ODA)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꾸준히 증가했다. 유엔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것은 2006년 10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당선이었다. 유엔의 원조 대상국이던 나라가 명실상부하게 유엔을 주도하는 지도자를 배출한 것이다. 한국은 2009년 11월 25일 24개국으로 구성된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했다. 이는 국제 원조를 받다가 주는 나라로 성공적인 변신을 한 세계 유일의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