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세계 최초 컴퓨터 ‘에니악’ 탄생

↑ 에니악

 

당시로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처리 능력을 과시

1946년 2월 14일 저녁 미 국방부 관계자 등 200여 명이 펜실베이니아대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넓이 28㎡, 높이 3m, 무게 30톤의 거대한 기계가 설치된 대형 공간이었다. 이윽고 전원 스위치가 올라가자 130㎞나 되는 긴 전선으로 연결된 기계 부속품들이 깜빡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세계 최초 컴퓨터 ‘에니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망원경이 눈을, 자동차가 발을, 원자폭탄이 주먹을 확장했다면 컴퓨터는 인간의 뇌를 연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했다.

이 위대한 발명품의 두 주역은 펜실베이니아대 존 모클리(1907~1980) 교수와 대학원생 프레스퍼 에커트(1919~1995)였다. 모클리는 존스홉킨스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물리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2년 펜실베이니아주 어시너스대의 물리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1년 펜실베이니아대의 무어스쿨에서 전자공학을 연구했다. 에커트는 당시 무어스쿨의 조교였다.

두 사람은 궁합이 잘 맞았다. 모클리가 거대한 진공관 계산기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도 에커트는 진심으로 믿고 따랐다. 당시 진공관식 계산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오와주립대 교수인 존 빈센트 아타나소프가 대학원생 클리퍼드 베리의 도움을 받아 1939년 11월 IBM의 천공카드를 개조한 ‘ABC’라는 진공관 계산기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에니악이 세계 최초 컴퓨터로 인정받는 이유는 ABC가 개발만 되었을 뿐 실제로 현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능과 크기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모클리는 1941년 6월 아이오와주립대에서 ABC를 눈여겨보고 ABC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최신 계산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기회가 찾아온 것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이었다. 미 국방부가 야포나 미사일 발사 시 탄도 계산을 할 수 있는 고성능의 계산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 PX’를 구상하면서 무어스쿨에 개발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당시는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대기 온도, 풍속 등에 따른 사거리를 포수들에게 알려주는 탄도 하나를 계산하려면 200여 단계를 거쳐야 했다. 노련한 수학자가 가장 정교한 탁상 계산기를 이용하더라도 7~20시간이나 걸렸다. 미 국방부가 진공관 컴퓨터의 개발 계획을 승인한 것은 1943년 4월이었다. 수십 명의 과학자가 투입된 프로젝트에서 모클리는 최고 자문역, 에커트는 수석 엔지니어를 맡았다.

에니악은 전쟁이 끝난 1946년 2월 완성되어 당초 목적인 군사용으로는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당시로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처리 능력을 과시했다. 7~20시간이나 매달려야 했던 복잡한 탄도 계산을 3초 만에 끝내고 1초에 10자리의 덧셈과 뺄셈을 5,400회, 10자리의 곱셈을 350회나 처리했다. 언론은 ‘총알보다 빠른 계산기’, ‘거인 두뇌’라는 찬사를 쏟아내면서도 진공관식 계산기는 ABC가 최초였기에 에니악에 ‘최초’ 수식어를 붙이는 대신 ‘최초의 다목적용 전자식 컴퓨터’란 수식어로 ABC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에니악보다 먼저 개발된 다목적용 컴퓨터는 따로 있었다. 1943년 12월 영국의 튜링이 개발해 현장에서 사용된 ‘콜로서스’였다. 그러나 콜로서스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임에도 불구하고 30년간 비밀에 붙여지다가 1975년에야 실체가 공개되어 ‘최초’ 영예를 에니악에 양보해야 했다.

 

‘총알보다 빠른 계산기’ ‘거인 두뇌’ 찬사 쏟아져

에니악은 비록 군사적으로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1947년 7월 29일 본격적으로 작동을 시작하면서 풍동 설계, 우주선 연구, 기상예보, 수소폭탄 설계용 계산 등 이전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분야의 컴퓨팅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에니악에도 문제가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진공관이었다. 1.5㎏ 무게의 진공관 1만 8,800개를 가동하려면 전력 소모가 엄청나고 수명이 짧았다. 공간도 너무 많이 차지했다. 10진법을 채택해 2진법을 채택한 후발 컴퓨터보다 속도가 느린 것도 문제로 대두되었다. 컴퓨터사에서 10진법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1944년 6월 뒤늦게 에니악 개발팀에 합류한 천재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이었다. 그는 2진법과 내장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1946년 에니악이 세상에 공표된 후 펜실베이니아대는 모클리와 에커트에게 특허권 포기를 요구했다. 두 사람은 이를 일축한 뒤 에니악이 공개된 지 한 달만에 대학을 떠나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는 1949년 8월 미사일을 유도하는 소형 컴퓨터 ‘바이낙’을 완성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았으나 재정은 어려웠다. 결국 두 사람은 특허권 양도 비용과 별도의 연봉을 받기로 하고 스페리 랜드사로 옮겼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1944년 가을부터 에니악 개발과 병행해온 ‘유니박’을 완성해 1951년 6월 미국의 인구통계국에 납품함으로써 컴퓨터가 군사 이외의 목적에 이용되고 상품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니박은 진공관이 5,200개 들어가고 길이 4.3m, 폭 2.4m, 높이 2.6m에 무게도 13톤이나 되었다. 에니악과 견주면 작긴 했으나 계산의 모든 과정을 2진법으로 통일해 처리 속도를 높여 성능은 뛰어났다. 1952년 11월 4일 밤에는 아이젠하워와 스티븐슨 후보 간의 대통령선거 결과를 실제와 거의 비슷하게 예측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에니악은 1955년 10월 2일 벼락을 맞고 9년간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진공관 크기의 220분의 1에 불과한 트랜지스터(2세대), 집적회로(3세대), 마이크로 프로세서(제4세대)가 등장하면서 컴퓨터는 덩치를 획기적으로 줄여나갔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