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대한매일신보 창간

↑ 대한매일신보 편집국 모습.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였던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가 촬영했다.

 

총 6개면 중 4개면은 영문, 2개면은 한글로 된 타블로이드판 신문

어니스트 베델(1872~1909, 한국명 배설)이 조선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04년 3월 10일이었다. 일본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 자격으로 입국한 것이다. 그는 한국말을 몰라 황실의 궁내부 예식원에서 번역관보로 일하는 양기탁(1871~1938)을 소개받았다. 베델은 1개월만에 ‘조선 황궁의 화재’ 제목의 특종기사를 발굴했으나 친일적인 ‘데일리 크로니클’지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았다. 베델은 조선에서 영자 신문을 창간할 생각을 했다. 중국과 일본에는 영자지가 여럿 있는데 조선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 매력적인 요소였다. 기왕에 한국어판도 만들 생각에 그동안 번역과 통역을 도와주던 양기탁을 끌어들였다.

영어 신문 제호는 ‘코리아 데일리 뉴스(KDN)’, 순한글 신문 제호는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로 정해진 신문은 1904년 7월 18일 창간했다. 총 6개면 중 4개면은 영문(KDN), 2개면은 한글(대한매일신보)로 된 타블로이드판 신문이었다. 베델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은 총무로 이름을 올렸는데 다만 베델은 자신의 영어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언론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배설(裵說)’이라는 이름을 썼다.  창간 당시 양기탁은 궁내부 예식원의 번역관보로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신문사 업무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예식원 직원 신분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음날 바로 예식원에 사표를 던지고 신문 제작에 뛰어들었다.

베델은 창간 초기에는 영어 위주로 신문을 발행했다. 하지만 점차 한국어 신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5년 3월 9일 휴간한 뒤 일본에서 활자와 인쇄 시설을 들여와 8월 11일 국한문을 혼용한 ‘대한매일신보’(4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4면)를 분리·발행했다. 한국어판은 이전까지는 한글 전용이던 것을 영문판과 분리하면서 국한문 혼용으로 체제를 바꿨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전 후 조선의 신문과 잡지에 사전 검열을 실시했다. 조선인 발행 신문의 항일 기사는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가 미리 적발해 원천적으로 발행을 금지했다. 대표적인 언론탄압 사례가 을사조약 체결 후 황성신문에 게재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외국인의 신문 발행에 대해서는 강압 수단을 사용할 수 없었다.

 

기사와 논설로 항일 언론의 횃불 들어

양기탁은 영국인 소유의 신문이 누리는 치외법권의 특혜를 최대한 활용했다. 1905년 11월 18일자에서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제기하고 11월 21일자에서는 장지연의 구속과 황성신문의 정간 사실을 보도했다. 11월 27일자에서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과 한문으로 번역한 호외를 발행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했다. 일제는 1906년 9월 1일 통감부 기관지로 ‘경성일보’ 일본어판과 한글판을, 12월 12일 영자지 ‘서울프레스’를 창간해 맞불 작전을 펼쳤다. 그래도 대한매일신보의 필봉은 거침이 없었다. 1907년 1월 영국의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의 밀서 사건을 전재하는 등 기사와 논설로 항일 언론의 횃불을 들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되었을 때는 전국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의 활동상을 상세히 보도해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지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 혼용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의식해 1907년 5월 23일 순수 한글판까지 창간, 3종의 신문을 한꺼번에 펴냈다. 국한문, 영문, 한글로 된 3종의 신문이 한꺼번에 발행된 것은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4월 결성된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총무 양기탁을 비롯해 주필 박은식, 기자 장도빈·옥관빈 등 대부분의 사원들이 신민회 회원이다보니 대한매일신보는 자연스럽게 신민회의 대변지가 되었고 사회 각 분야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애국계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 역시 대한매일신보가 남긴 뚜렷한 족적 가운데 하나였다. 국채보상기성회에 접수된 의연금과 출연자의 명단을 광고란에 매일 게재하고 의연금도 직접 접수해 국채보상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 1907년 4월에는 각처에서 제각기 거두는 의연금을 통합된 조직으로 일원화하기 위해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해 대한매일신보사에 사무소를 두고 양기탁이 재무를 맡음으로써 대한매일신보는 자연스럽게 운동의 실질적인 본부가 되었다.

 

국한문, 영문, 한글로 신문을 발행한 것은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던 시기에 사세가 크게 신장되어 1907년 9월 3일 기준 국한문 8,000부, 한글 3,000부를 발행했다. 그때까지 조선 언론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1908년 5월 국한문, 한글, 영문판을 합해 1만 3,256부를 발행한 것은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강경한 논조를 고수하고 발행부수도 많아지자 일제는 외교적 압력과 사법적 탄압을 병행했다. 외교적 압력은 영국 정부에 베델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고, 사법적 탄압은 통감부의 신문 압수 형식으로 펼쳤다. 먼저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주한 영국공사가 1908년 6월 베델을 3주 간 감옥에 가두게 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7월에는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양기탁을 구속했다. 이 때문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한동안 휴간해야 했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1909년 1월 30일 속간했으나 평일에는 1면짜리 뉴스 불러틴을 발행하고 토요일에는 12면에 논평과 한 주일 동안의 기사를 종합해서 싣는 방식으로 사실상 주간신문으로 발행했다. 급기야 1909년 5월 베델이 37세로 숨지고 영국인 앨프리드 만함이 홀로 사장직을 수행하면서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결국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발행을 중단했다. 베델이 없는 대한매일신보에서 양기탁의 역할과 비중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만함이었으나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없어 신문제작 일체를 양기탁에게 의존했다. 그러자 이같은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긴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보나르가 만함에게 “법정에 서게 될지 모른다”며 “조선을 위해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신문을 처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겁을 주었다. 결국 만함은 굴복했고 보나르는 통감부에 대한매일신보 인수를 요청했다. 처분 조건은 만함이 앞으로 조선에서 신문을 발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만함에게 700파운드(7,000엔)를 지불하고 1910년 5월 21일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했다. 다만 2개월 뒤에 있을 한일합방 조약이 성사될 때까지 인수를 비밀에 부쳐둔 채 6월 14일 발행인과 편집인 명의만 조선인 이장훈으로 바꿔놓았다. 이로써 국권 수호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는 종언을 고했다. 양기탁은 퇴사에 앞서 모든 연락 사항은 자신의 집으로 보내 달라고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독자에게 알렸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튿날인 1910년 8월 30일 ‘대한’을 빼고 ‘매일신보’란 이름의 총독부 기관지로 다시 태어났다. 10월 22일부터는 형식상의 발행인인 이장훈의 이름도 사라졌다. 조직상으로는 경성일보 편집국의 일개 부서로 축소·운영되다가 1920년 문화정치가 등장한 후 독립된 편집국으로 확대·승격되었다. 1938년 4월 16일 제호를 ‘매일신보(申報)’에서 ‘매일신보(新報)’로 고쳐 독립언론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경성일보가 매일신보의 주식 45%를 소유한 대주주이고 총독부 소유의 주식까지 포함하면 여전히 경성일보에 예속된 존재였다. 광복 후에는 1945년 11월 10일 미군정에 의해 정간되었다가 11월 23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대한민국 정부의 기관지로 재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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