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베델과 양기탁] 일제 침탈을 국제사회에 알리다 한국 땅에서 숨진 영국인 베델과, 항일의 필봉 휘두르며 독립운동 펼치다 중국에서 눈감은 양기탁 이야기

↑ 영국 ‘데일리 미러’지 1908년 8월 15일자에 실린 베델(왼쪽)과 양기탁 사진

 

by 김지지

 

국가보훈처가 구한말 대한제국의 독립에 헌신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동상을 베델의 출생지인 영국 브리스틀에 건립할 계획이라고 최근 밝혔다. 영국에 한국 독립운동가의 동상이 건립되는 것은 처음이다.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이 영국 남부의 항구도시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무역·광산학교를 졸업했을 때, 아버지는 손아래 동서가 일본 효고현 고베에 세운 무역회사에 근무 중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자신은 영국쪽 일을 맡고 큰아들 베델은 일본에서 활동하게 할 생각으로 1888년 베델을 고베로 불러들이고 자신은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에 회사를 세웠다. 아들이 고베에서 일본산 도자기 등을 보내면 아버지는 런던에서 이를 되팔았다.

무역업을 하며 일본에서 10여년을 보내던 베델은 아버지가 1899년 현업에서 물러나자 동생과 런던에 무역회사 ‘베델 브러더스’를 세운 뒤 자신과 동생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런던 사무소는 막내동생이 지키도록 했다. 당시 베델 형제가 취급한 물건은 영국인이 쉽게 구하기 어려운 일본산 도자기나 골동품, 칠기, 장신구들이었다. 베델은 1899년 회사 설립을 위해 영국에 들렀다가 메리 모드 게일을 만나 이듬해인 1900년 고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1901년 외아들을 낳았다.

베델의 아내와 생후 5개월된 아들

 

베델은 무역업을 하며 번 돈으로 1901년 생산공장까지 차려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악재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본 업체들의 담합·소송에 휘말리고 형제들과도 관계가 나빠져 결국 일본 사업을 포기했다.

베델은 매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으며 성질이 급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성격에 술고래였다. 한편으로는 운동과 노래를 좋아했다.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활동했다. 프리메이슨은 중세 교회 건축가 집단에서 출발했다가 기독교 보수성에 반발해 조직된 비밀결사체로 알려져 있다. 베델은 나중에 조선으로 건너와서도 프리메이슨 설립 멤버로 활동했다. ‘한국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특징에 정통한 한 교수는 “프리메이슨은 신종교 성격을 띤 엘리트주의 모임”이라면서 “베델이 조선에 왔던 시기 프리메이슨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친목과 자선을 위한 형제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러일전쟁 때 조선과 첫 인연

동생들과 하던 사업을 접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베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이었다. 영국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이 전쟁이 발발하자 베델을 임시직인 특별통신원으로 조선에 파견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베델이 조선 땅을 밟은 것은 1904년 3월 10일이었다.

베델은 조선에 온 지 1개월이 막 지났을 무렵인 4월 14일 저녁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 사건을 추적해 ‘일본군이 방화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기사를 전송했다. ‘데일리 크로니클’은 그가 쓴 기사를 4월 16일자 5면에 ‘조선 황궁의 화재’ 제목의 톱기사로 보도하면서 전 세계에 타전했다. 기사는 특종이었다. 그런데도 베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통보였다. 친일 성향의 데일리 크로니클이 일본에 비판적 기사를 쓴 베델을 문책했거나, 전장인 한반도에 통신원을 두기보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정식 기자들이 일본 정부에서 자료를 받아 기사를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베델은 해고되자 곧바로 한·영 양국어로 된 신문을 창간할 생각을 했다. 중국과 일본에는 영자 신문이 여럿 있는데 조선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결정이었다. 기왕에 한국어판도 만들 생각에 그동안 번역과 통역을 도와주던 양기탁을 끌어들였다.

베델

■양기탁

양기탁(1871~1938)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던 양기탁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5살이던 1886년 3월이었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호러스 알렌이 설립한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보조원 양성 교육을 받으면서 영어를 접한 것이 시작이었다. 6개월 만에 교육을 중단했기 때문에 자칫 영어와 멀어질 수 있었는데도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아버지 양시영과 함께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 편찬에 몇 년간 참여하면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게일이 사전 인쇄를 위해 1895년 12월 일본으로 건너갈 때, 양기탁도 나가사키상업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빙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게일은 1897년 6월 서울야소교서회에서 발간한 ‘한영자전’ 서문에 양시영·양기탁 부자 등 편찬을 도운 8명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양기탁은 일본에서 2년 동안 체류한 뒤 1898년 귀국함으로써 영어에 이어 일본어까지 능통했다. 기독교 신자인데다 과거 동학에도 관계한 적이 있어 동·서양의 사상과 학문도 두루 섭렵했다.

양기탁은 1901년 7월 위조지폐를 만들려 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1903년 3월 출옥 후 관직에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 정치적인 이유나 모략에 의한 재판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양기탁은 감옥에서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이승만과 함께 옥중학교를 운영했다. 두 사람은 형무소의 한 구석에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영어, 일어, 지리 등으로 과목을 늘려나갔다. 양기탁은 출옥 후 조선왕실 문서를 번역하는 궁내부 예식원에서 번역관보로 활동했다. 베델은 1904년 3월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후 소개받은 양기탁에게 통역과 번역을 의뢰했다.

참고로 우리에게는 ‘양기탁’으로 알려졌지만 학계에서는 ‘양기택’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이름 한자인 ‘鐸’은 ‘탁’과 ‘택’으로 모두 읽힌다. 베델 연구 일인자인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당시에는 ‘탁’이 아닌 ‘택’으로 불렸던 것 같다”면서 “그의 영문 이름이 ‘taik’(택)으로 돼 있고 당시 한글신문들도 그를 ‘양기택’이라고 지칭했다”고 설명했다.

양기탁

 

■대한매일신보 창간과 항일 기사들

베델과 양기탁 두 사람이 우리 언론사에 길이 빛날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DN)’를 창간한 것은 1904년 7월 18일이었다. 베델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은 총무로 이름을 올렸는데 다만 베델은 자신의 영어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언론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배설(裵說)’이라는 이름을 썼다. 총 6개면 중 4개면은 영문(코리아 데일리 뉴스), 2개면은 순한글(대한매일신보)로 된 타블로이드판 신문이었다. 창간 당시에 양기탁은 궁내부 예식원의 번역관보로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신문사 업무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예식원 직원 신분을 유지했다. 1905년 3월에는 번역관보에서 주사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예식원에 사표를 던지고 신문 제작에 뛰어들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한글판

 

베델은 창간 초기에는 영어 위주로 신문을 발행했다. 하지만 점차 한국어 신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5년 3월 9일 휴간한 뒤 일본에서 활자와 인쇄 시설을 들여와 8월 11일 국한문을 혼용한 ‘대한매일신보’(4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4면)를 분리·발행했다. 대한매일신보 지면 제작은 양기탁에게 일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후에도 거침없이 필봉을 휘둘렀다.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을 전국에 알리고 조선의 외교권 박탈을 도운 을사오적을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그러자 조선인에게 가장 신뢰받는 언론으로 인정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베델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도 집요하게 취재해 보도했다. 당시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 독일 등 다른 열강보다 힘이 약해 국제 여론에 매우 민감했다. 식민지로 삼으려던 조선에서 항일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 KDN의 기사에 일제는 화가 치밀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통감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수백 마디 말보다도 대한매일신보의 신문기사 한 줄이 더 힘이 세다”고 탄식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기사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에도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1907년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베델은 의연금을 보관하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대한매일보사에 설치하고 운동을 주도했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 업무 말고도 각종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07년 4월에는 안창호 등과 결성한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의 총감독을 맡아 본부를 대한매일신보 안에 두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사주 베델이 영국인이어서 한국이나 일본의 법을 적용받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와 KDN이 입주한 건물 역시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받았다. 일제는 기사가 못마땅해도 두 차례의 영일동맹 체결로 영국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양기탁은 신문사 밖으로 나가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 가급적 대한매일신보 건물 안에서 영문판 기사를 번역하거나 기사를 썼다. 양기탁은 편집과 경영 양면의 업무를 실무적으로 총괄했기 때문에 신문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한국인들은 양기탁을 대한매일신보의 총무로 불렸지만 외국 언론은 편집인 또는 전무를 뜻하는 ‘제너럴 매니저’로 불렀다.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도 치외법권을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박은식, 신채호 등 명망 있는 논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강경 항일 논설을 썼다.

대한매일신보 편집국 모습.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였던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가 촬영했다.

 

■일제의 베델 추방 공작

일제는 자신들의 만행이 대한매일신보와 KDN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되는 사실이 불편했다. 결국 베델을 조선에서 내쫓기로 하고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당시 베델은 일본뿐 아니라 고향인 영국에서도 ‘골칫거리’ 취급을 받았다. 1902년에 맺은 영일동맹으로 두 나라가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때여서 그의 행보는 영국 입장에서도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하면 그를 조선에서 추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공작에 들어갔다.

일제가 꾸민 꼼수는 외교 경로를 통한 베델의 추방 공작이었다. 일제는 도쿄 주재 영국대사에게 베델을 추방하거나 대한매일신보를 폐간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관련 규정이 없어 베델을 제재할 수 없었다. 그러자 1907년 10월 통감부가 3건의 기사와 논설을 문제 삼아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에게 베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함으로써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베델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 서울 정동 주한 영국총영사관에 설치된 법정에서 열렸다. 판사는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이 맡았다. 판사, 검사, 변호사로 한국인, 영국인, 일본인이 참석한 동북아 최초의 국제재판이었다. 베델에게 적용된 혐의는 ‘치안 방해’였다. 코번은 베델의 행동에 큰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본국의 제국주의 논리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코번은 10월 15일 베델에게 6개월 근신형을 명했다.

하지만 베델은 근신 처분 기간이 끝나자 더욱 강경한 논조로 돌아왔다. 그러자 통감부는 1908년 4월 29일 대한제국의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1907년 7월 제정된 신문지법을 개정토록 해 조선에서 발행되는 외국인 신문까지 발행·배포 금지, 압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도 대한매일신보의 논조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통감부가 1908년 5월 27일 베델을 다시 고소했다. 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베델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키로 하고 베델을 재판에 회부하는데 동의했다. 이번에는 기존 ‘치안 방해’ 혐의에다가 ‘공금 횡령’을 추가했다. 베델이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모은 의연금을 마음대로 썼다는 죄목이었다. 베델은 곧바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명의를 앨프리드 만함으로 바꿨으나 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형식상의 교체일 뿐 대한매일신보는 여전히 베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재판은 1908년 6월 15일부터 4일간, 서울 정동의 영국총영사관 구내에 있는 영국 경비대 건물에서 열렸다. ‘재팬 크로니클’지 기자가 “동양 역사상 이런 재판은 처음”이라고 기사를 쓰고 AP통신이 특파원을 파견할 정도로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번에도  판사는 영국총영사 코번이 맡았다. 고소인은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대신해 나온 일본인 서기관, 증인은 한국인, 검사는 중국에서 온 영국인, 변호사는 일본에서 온 영국인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양기탁은 증인으로 참석했다. 한국어-영어 통역은 김규식이, 일본어-영어 통역은 일본인이 맡았다. 4일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통감부가 증거물로 제시한 논설은 3건이었다. 전 미국인 외교고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암살을 찬양한 1908년 4월 17일자 논설과 ‘일백 매특날(메테르니히)이가 한 이태리를 압제치 못함’(1908.4.29), ‘학계의 꽃’(1908.5.16)이라는 논설이었다.

판사는 재판 4일째인 6월 18일 베델에게 3주일간 금고형, 복역 후 6개월간 근신, 350파운드 벌금을 선고했다. 문제는 당시 서울에 영국인을 구금할 수 있는 형무소 시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중국 상해의 형무소로 호송해야 했는데 상해로 가는 배편이 일본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베델이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갈 경우 일시적으로 일본의 사법권 관할하에 놓이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영국은 일본 요코하마에 있던 영국 군함을 인천으로 오도록 해 6월 20일 베델 한 사람만을 태우고 상해로 보냈다. 베델은 3주 후인 7월 11일 출옥해 17일 조선에 돌아왔다.

2022년 발행된 베델 기념 우표

 

■양기탁의 구속과 재판

일제는 베델이 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양기탁을 구속한다는 공작에 착수했다. 골치아픈 베델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베델이 감옥에서 나왔지만 아직 중국에 있던 7월 12일, 치외법권 건물인 대한매일신보 건물 안에 있던 양기탁을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다”며 밖으로 불러내 전격 체포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의 제작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당시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던 국채보상운동의 총본산을 와해하려는 2중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이 “비겁한 행위”라며 석방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 통감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영국 정부까지 맥도널드 주일대사를 데라우치 외무장관에게 보내 양기탁의 석방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양기탁의 건강까지 악화했다. 결국 이토 통감은 8월 11일 양기탁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으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했다.

그러나 양기탁이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감시 소홀을 틈타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피신하면서 양국 관계는 또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통감부가 코번 총영사에게 양기탁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코번은 본국 정부에서 훈령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가 코번의 경질을 영국 정부에 요구했다. 영국 정부는 양국 간의 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발전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코번 총영사에게 양기탁의 재판에 협조토록 훈령을 내렸다. 양기탁은 8월 21일 다시 수감되었다.

8월 31일 시작해 9월 29일까지 5차례 열린 양기탁의 재판은 일본인 판사 2명과 한국인 판사 1명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한국인 변호사 2명이 변론을 맡았다. 재판 중 양기탁이 어떠한 돈도 부정으로 횡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검사는 공소를 취하했다. 양기탁은 9월 25일 풀려나고 9월 29일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영·일 양국 간 벌어진 64일간의 숨 막히는 드라마는 끝을 맺었다. 처음부터 의연금 횡령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국채보상운동을 무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지닌 수단이었음도 드러났다. 양기탁을 보호하려던 코번은 사건이 마무리되기 전에 본국으로 송환되어 사임했다. 1908년 7월부터 휴간되었던 KDN은 1909년 1월 30일 속간되었다.

2007년 12월 6일자 영국 ‘인디펜던트’지에 실린 ‘헨리의 전쟁-강제 인도에 반대한 투쟁’ 인터넷 기사. 왼쪽이 헨리 코번 전 주한영국총영사이고 오른쪽이 조선통감부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다.

 

■베델의 죽음

베델은 옥고를 치른 후 건강이 크게 악화했다. 일제의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독주와 담배로 달랜 탓이 컸다. 평소에도 몸을 돌보지 않는 성격인데다 오랜시간 소송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 결국 1909년 5월 1일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터)에서 3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의학적 사인은 ‘심장 팽창’이었다. 베델은 마지막을 직감한 듯 양기탁의 손을 잡고 짧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주세요.”

워싱턴포스트지가 “베델의 활동을 중단시키는 방법은 암살밖에 없을 것”이라고 기사를 쓸 만큼 온몸으로 일제에 맞섰던 베델의 황망한 죽음은 전국을 애도의 눈물로 넘쳐나게 했다. 5월 2일 서대문 자택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그날 오후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역까지 가는 운구 행렬은 1000여명이나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날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양화도 장지로 가는 한국인 가운데 곡하는 자들이 상당수였고, 부인들도 배설공(公)의 집 근처에서 통곡했다. 영국 목사 터너가 장례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가 기도한 뒤 성분(관을 묻고 묘를 흙으로 쌓아 올리는 것)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분상(봉분) 앞에서 절하며 그를 기렸다. 장지까지 따라온 인원은 내외국인 합쳐서 1000여명이었다.” 전국에서 모두 259편의 만사((輓詞·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가 모였다. 한국인들이 한 외국인의 죽음을 이토록 애도하며 안타까워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1909년 5월 2일 수많은 조문객이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로 향하는 베델의 상여를 따르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였던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가 촬영했다.

 

■양기탁의 항일 운동

총독부가 양기탁에게 보복을 노골화한 것은 한일합병 후였다. 1911년 1월 양기탁·임치정·옥관빈 등 대한매일신보를 이끌던 핵심 인사들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더니 그해 7월 양기탁·안태국·임치정 등에게는 징역 2년, 옥빈관 등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무렵 더 큰 사건이 양기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중에 있던 1912년 2월 총독부가 양기탁 등에게 또 다른 혐의를 씌워 기소한 이른바 ‘105인 사건’이었다. 일제는 1912년 9월 27일 양기탁 등 4명의 보안법 위반자에게 사면령을 통보해놓고 이틀이 지난 9월 29일 ‘105인 사건’에 대한 형량을 대폭 늘려 선고했다. 양기탁·윤치호·임치정·이승훈 등 7명은 1심에서 징역 10년형, 2심과 3심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양기탁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후부터 4년여 동안 옥고를 치른 후 1915년 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감옥에 갇힌 양기탁(48세 모습)

 

이후 양기탁은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 12월 중국 천진에서 다시 일경에게 체포되어 전라남도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1년 뒤 유배가 풀린 뒤에도 미국의 상하 양원 의원단이 중국을 거쳐 1920년 8월 24일 서울로 들어올 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 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양기탁은 모친의 작고로 석방되었다가 다시 만주로 가 1920년 10월 무장 단체 ‘의성단’을 조직하고 1922년 8월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 창설에 참여했다. 1924년 11월 지청천, 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에 산재한 수십 개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 ‘정의부’를 창립하고 1926년 4월 고려혁명당을 조직했으며 1929년 5월 ‘국민부’ 결성에 기여하는 등 만주 독립운동 단체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던 1938년 5월 21일 중국 강소성 담양에서 눈을 감았다. 정부는 사후 60년 만인 1998년 5월 중국에서 유해를 봉환,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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