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과 양기탁] 일제 침탈을 국제사회에 알리다 한국 땅에서 숨진 영국인 베델과, 항일의 필봉 휘두르며 독립운동 펼치다 중국에서 눈감은 양기탁 이야기
2023년 2월 8일 · zznz
↑ 영국 ‘데일리 미러’지 1908년 8월 15일자에 실린 베델(왼쪽)과 양기탁 사진
by 김지지
국가보훈처가 구한말 대한제국의 독립에 헌신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동상을 베델의 출생지인 영국 브리스틀에 건립할 계획이라고 최근 밝혔다. 영국에 한국 독립운동가의 동상이 건립되는 것은 처음이다.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이 영국 남부의 항구도시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무역·광산학교를 졸업했을 때, 아버지는 손아래 동서가 일본 효고현 고베에 세운 무역회사에 근무 중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자신은 영국쪽 일을 맡고 큰아들 베델은 일본에서 활동하게 할 생각으로 1888년 베델을 고베로 불러들이고 자신은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에 회사를 세웠다. 아들이 고베에서 일본산 도자기 등을 보내면 아버지는 런던에서 이를 되팔았다.
무역업을 하며 일본에서 10여년을 보내던 베델은 아버지가 1899년 현업에서 물러나자 동생과 런던에 무역회사 ‘베델 브러더스’를 세운 뒤 자신과 동생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런던 사무소는 막내동생이 지키도록 했다. 당시 베델 형제가 취급한 물건은 영국인이 쉽게 구하기 어려운 일본산 도자기나 골동품, 칠기, 장신구들이었다. 베델은 1899년 회사 설립을 위해 영국에 들렀다가 메리 모드 게일을 만나 이듬해인 1900년 고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1901년 외아들을 낳았다.
베델은 무역업을 하며 번 돈으로 1901년 생산공장까지 차려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악재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본 업체들의 담합·소송에 휘말리고 형제들과도 관계가 나빠져 결국 일본 사업을 포기했다.
베델은 매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으며 성질이 급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성격에 술고래였다. 한편으로는 운동과 노래를 좋아했다.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활동했다. 프리메이슨은 중세 교회 건축가 집단에서 출발했다가 기독교 보수성에 반발해 조직된 비밀결사체로 알려져 있다. 베델은 나중에 조선으로 건너와서도 프리메이슨 설립 멤버로 활동했다. ‘한국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특징에 정통한 한 교수는 “프리메이슨은 신종교 성격을 띤 엘리트주의 모임”이라면서 “베델이 조선에 왔던 시기 프리메이슨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친목과 자선을 위한 형제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러일전쟁 때 조선과 첫 인연
동생들과 하던 사업을 접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베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이었다. 영국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이 전쟁이 발발하자 베델을 임시직인 특별통신원으로 조선에 파견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베델이 조선 땅을 밟은 것은 1904년 3월 10일이었다.
베델은 조선에 온 지 1개월이 막 지났을 무렵인 4월 14일 저녁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 사건을 추적해 ‘일본군이 방화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기사를 전송했다. ‘데일리 크로니클’은 그가 쓴 기사를 4월 16일자 5면에 ‘조선 황궁의 화재’ 제목의 톱기사로 보도하면서 전 세계에 타전했다. 기사는 특종이었다. 그런데도 베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통보였다. 친일 성향의 데일리 크로니클이 일본에 비판적 기사를 쓴 베델을 문책했거나, 전장인 한반도에 통신원을 두기보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정식 기자들이 일본 정부에서 자료를 받아 기사를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베델은 해고되자 곧바로 한·영 양국어로 된 신문을 창간할 생각을 했다. 중국과 일본에는 영자 신문이 여럿 있는데 조선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결정이었다. 기왕에 한국어판도 만들 생각에 그동안 번역과 통역을 도와주던 양기탁을 끌어들였다.
■양기탁
양기탁(1871~1938)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던 양기탁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5살이던 1886년 3월이었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호러스 알렌이 설립한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보조원 양성 교육을 받으면서 영어를 접한 것이 시작이었다. 6개월 만에 교육을 중단했기 때문에 자칫 영어와 멀어질 수 있었는데도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아버지 양시영과 함께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 편찬에 몇 년간 참여하면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게일이 사전 인쇄를 위해 1895년 12월 일본으로 건너갈 때, 양기탁도 나가사키상업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빙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게일은 1897년 6월 서울야소교서회에서 발간한 ‘한영자전’ 서문에 양시영·양기탁 부자 등 편찬을 도운 8명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양기탁은 일본에서 2년 동안 체류한 뒤 1898년 귀국함으로써 영어에 이어 일본어까지 능통했다. 기독교 신자인데다 과거 동학에도 관계한 적이 있어 동·서양의 사상과 학문도 두루 섭렵했다.
양기탁은 1901년 7월 위조지폐를 만들려 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정확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1903년 3월 출옥 후 관직에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 정치적인 이유나 모략에 의한 재판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양기탁은 감옥에서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이승만과 함께 옥중학교를 운영했다. 두 사람은 형무소의 한 구석에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영어, 일어, 지리 등으로 과목을 늘려나갔다. 양기탁은 출옥 후 조선왕실 문서를 번역하는 궁내부 예식원에서 번역관보로 활동했다. 베델은 1904년 3월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후 소개받은 양기탁에게 통역과 번역을 의뢰했다.
참고로 우리에게는 ‘양기탁’으로 알려졌지만 학계에서는 ‘양기택’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이름 한자인 ‘鐸’은 ‘탁’과 ‘택’으로 모두 읽힌다. 베델 연구 일인자인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당시에는 ‘탁’이 아닌 ‘택’으로 불렸던 것 같다”면서 “그의 영문 이름이 ‘taik’(택)으로 돼 있고 당시 한글신문들도 그를 ‘양기택’이라고 지칭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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