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고교 평준화 시행 50년… 학생과 학부모들 환호했으나 부작용도 많아

↑ 1969년 2월 서울시내 중학교 추첨 모습

 

1969년 서울, 1971년 전국 중학교에서 입시제 폐지

1950년대 중반 시작된 베이비붐은 1960년대 들어 초등학생 숫자를 급증시켰다. ‘콩나물 교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크게 늘어났는데도 학교수가 이를 충족하지 못해 자연히 입시 경쟁이 치열해졌다. 초등학생 성장발육에 지장을 줄 정도로 일류 중학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문제였지만 툭하면 터져 나오는 볼썽사나운 입시부정과 파동도 문제였다. 재판까지 진행된 1965년의 ‘무즙 파동’과 1968년의 ‘창칼 파동’이 대표적인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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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선발이 이처럼 재판에 의존하는 경우까지 생겨나자 입시의 국가관리안(案)이 논의되었다. 그래서 나온게 1968년 7월 15일 정부가 발표한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였다. 골자는 “1969년도부터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중학교 입학을 무시험 추첨제로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69년 서울을 시작으로 1970년 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전주, 1971년 전국의 모든 중학교에서 입시제가 폐지되었다. 서울은 1969년 2월 5일부터 이틀간 무시험 추첨을 실시했다. 추첨에 앞서 정부는 삼류 학교에 배정받은 학생이 진학을 포기할 것을 우려해 자신이 추첨한 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학생은 다음해 추첨권이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1969년 2월 5일(남)과 6일(여), 서울에서 학군별로 일제히 실시된 추첨은 학생들이 추첨기를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 번 돌려 번호가 적힌 추첨알이 떨어지면 관리요원이 번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추첨에 따라 서울시내 초등학교 졸업생의 90% 정도인 9만여 명의 학생들이 140개교에 배정되었다.

세칭 일류 중학도 단계적으로 폐지한다는 발표에 따라 경기·서울·경복·경기여중·이화여중 등 5개교는 1969년부터, 용산·경동·수도여중·창덕여중 등 5개교는 1970년도부터, 보성·중앙·숙명여중·진명여중 등 4개교는 1971년부터 신입생을 뽑지 않았다. 입시 철폐안이 발표되자 입시경쟁으로 인한 심리적 부담과 사교육비 부담으로 고민하던 학생과 학부모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막상 시행하고 보니 학생 간의 엄청난 실력 차와 교원·교실 부족, 소속감 결여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교육 기회의 실질적 확대, 아동의 정상적 발육의 촉진, 초등학교 단계에서의 과열 과외 해소 등의 긍정적인 요소가 공감대를 이뤄 오늘날까지 큰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다.

 

1973년 고교평준화 발표하고 1974년 시행

중학생 증가는 다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경쟁을 치열하게 만들었다. 세칭 일류고 진학을 위한 경쟁이 특히 심각했다. 인문계고 지원자의 40%만이 고교에 진학하는 문제점과 함께 과외망국론, 입시지옥, 중3병 등의 문제도 수시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그러자 1973년 2월 28일 정부가 나서 획기적인 고교입시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고교의 전형시기를 전후기로 나눈 뒤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연합고사를 거쳐 전기인 실업계 고교는 종전대로 학교별로 뽑고, 후기인 인문계 고교는 학군제를 채택해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의 경우 공동학군 1개, 일반학군 5개로 나눠 학생들이 원하는 지역에서 추첨으로 선발되도록 했다. 이처럼 중학교 무시험, 고교평준화와 같은 과감한 조치가 연이어 이루어진 것을 두고 근거는 없지만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을 위한 것이라고 수근대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박지만은 1958년생으로 중학교 ‘뺑뺑이’로는 3기, 고등학교 ‘뺑뺑이’로는 1기에 해당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사립고까지 평준화에 포함시킨 것도 논란을 부채질했다. 명문고 출신 인사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평준화가 5대 도시로 확대된 가운데 중3 학생들의 연합고사 성적이 1974년 평균 171점에서 1975년 154점, 1976년 150점으로 곤두박질치자 하향평준화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1975년 가을 이화여고에서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 22명의 학생을 자퇴 형식으로 퇴교시킨 것을 계기로 논란이 가열되었다. 폐지하자는 측은 학습 지진아 양산, 평균 학력 저하, 사학의 운영난 등을 들었다. 정부 보조금이 적은 사학에 배정된 학생의 부모들은 학생 실력의 평준화에 앞서 시설의 평준화와 교사의 평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당시 서울의 139개 학교 중 사립은 113개이고 부산은 55개교 중 36개일 정도로 사학의 비중이 높았는데도 초기에는 미처 시설이 열악한 사학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고교평준화는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처음 시행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대구·인천·광주로, 1979년에는 대전·전주·수원·청주·춘천·마산·제주 등 7개시로, 1980년에는 성남·원주·목포 등 8개시로 점차 확대되었다. 평준화 지역이 가장 크게 확대되었던 1983년을 기준하면, 학교 비율로는 전체의 38.8%, 학생 비율로는 57.9%가 평준화의 적용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금지시켰지만 많은 학교에서 수준별 수업을 한다는 명목 아래 내놓고 우열반을 운영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진행된 우열반 편성으로 열반 학생들의 상처가 컸다.

그러나 우수 학생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비판은 여전했다. 그러자 1990년 정부가 외국어고 신설, 과학고 확충 등 고교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추진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래도 평준화를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측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잠잠하던 평준화 해체 주장은 1999년부터 다시 불붙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평준화 폐지 측은 여전히 평준화 정책이 학력의 하향 평준화를 불러와 미래의 우수 인재 확보와 국가경쟁력 제고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학생의 학교 선택권 제한도 평준화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반면 평준화 존속을 주장하는 측은 대안 없이 해체만 고집하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사교육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며 어린 학생을 다시 입시지옥으로 몰어넣자는 것이냐고 반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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