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24)-하편] 박정희와 세 여인… 부잣집 딸 육영수가 빈농 아들에 이혼까지 한 8살 연상의 박정희를 선택한 것은 뒷모습이 든든하고 주관이 확고해보였던 첫 인상 때문
2023년 1월 30일 · zznz

↑ 박정희 대통령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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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박정희-육영수와 첫 만남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전투정보과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 중이었다. 박정희는 어머니의 제사를 위해 방문한 고향집에서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당일 야간 서울행 열차를 타고 올라가 6월 27일 오전 7시 용산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국군 주력부대가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고 한강인도교마저 6월 28일 새벽 폭파되자 그날 광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 남쪽으로 도강했다. 박정희가 자진해 한강을 넘어 군에 복귀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와 확실히 절연했다는 것을 군 요로에 자연스럽게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의 자진 도강은 11년 뒤 그 한강을 반대 방향으로 건너 정권을 장악하게 하는 역사적 선택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부대 복귀 보름 후 1년 2개월만에 소령으로 복직하고 전투정보과장으로 발령받았다.
박정희 소령이 육군본부의 이동에 따라 대구와 부산을 옮겨다니던 1950년 8월 어느날, 박정희의 부관인 송재천 소위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한 회 후배로 충북 옥천 농업고등학교 교사 재직 중 육군 소위로 임관한 늦깍이 장교였다. 송재천 소위는 외가 쪽으로 6촌동생인 육영수라는 25살 아가씨가 있는데 부산에서 가족과 피란살이를 하고 있다며 한번 만나보지않겠느냐고 넌지시 박정희의 의중을 떠보았다. 박정희가 만날 의사가 있다고 하자 송재천은 그 길로 부산 영도에서 셋방을 얻어 살고 있는 육영수의 어머니를 찾아가 만남을 성사시켰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1950년 8월 하순 영도다리 옆 조그마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육영수 출생과 학창시절
육영수(1925~1974)는 충북 옥천군 교동리에서 태어났다. 큰언니 육인순과는 11살, 오빠 육인수와는 7살, 막내 동생 육예수와는 4살 터울이었다. 아버지 육종관은 옥천에서 유명한 갑부였다. 대궐 같은 저택은 대지가 3000평이나 되었고 저택을 둘러싼 담은 세로 100m, 가로 50m나 되었다. 육종관은 이 대저택을 자신의 왕국처럼 다스렸다.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에게서 낳은 육영수 형제 말고도 5명의 소실들에게서 18명을 생산해 자녀가 모두 22명이나 되었다. 이 다섯 소실들은 대부분 육종관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고 그밖에도 많은 여인들이 스쳐 지나갔다. 육종관은 자식 모두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평균 이상으로 교육했다. 여자는 고교, 남자는 대학까지 보냈다. 소실 중에는 일본 여성도 있었다. 소실 중 한 명(큰개성댁)은 육종관이 사 준 서울 사직동에서 살았다. 이 집은 육종관의 여러 자녀들이 서울에 유학할 때 기거하는 거점이 되었다. 육영수도 서울 배화여고에 다닐 때 이 집에 살았다. 육종관은 이재에도 밝았지만 기계를 다루는 데에도 호기심과 재능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촌에 사는데도 포드자동차, 시보레승용차, 트럭, 사이드카(오토바이)까지 갖고 있었다. 사진기는 물론 촬영기까지 갖고 다니면서 촬영해 식구들에게 상영해주곤 했다. 아버지는 믿음직스러운 육영수에게 죽향보통학교 상급반 시절부터 장부정리, 편지대필, 헌돈 다리미질, 고물상에서 가져온 헌 부속품에 기름칠하기 등등의 심부름을 맡겼다.
큰언니 육인순은 1935년 결혼한 홍순일과 사이에 낳은 자식들이 훗날 대성해 일가를 이뤘다. 홍순일은 춘천고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거쳐 고등문관시험 양과에 합격한 후 만주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해방 후 강원도 소방청장, 허정 교통부장관 비서실장을 지내다가 6·25 때 인민군에 납치, 행불되었다. 장남 홍세표는 외환은행장을 역임하고, 딸들은 장차 사회적으로 성공할 남자들을 지혜롭게 선택해 결혼했다. 장녀 은표는 장덕진 전 농수산부장관, 차녀 소자는 한승수 전 경제부총리, 3녀 정자는 유연상 전 영남대 재단이사장, 4녀 지자는 정영삼 전 한국민속촌 회장, 5녀 재희는 전 서주산업 회장 윤석민과 결혼했다.
육영수는 1938년 4월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 배화여고)에 입학했다. 성적은 바닥권을 맴돌았다. 4년제이던 배화고녀 입학 첫 학기의 평균성적은 전교 118명 중 107등, 4학년 마지막학기에는 102명 중 91등이었다. 육영수는 1942년 3월 배화여고를 졸업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상급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해 옥천 교동집으로 내려왔다. 1945년 10월 중학교 과정인 옥천공립여자 전수학교의 가사 담당 교사가 되어 1년 반을 재직했다.

■약혼과 결혼
박정희 소령은 1950년 8월 하순 육영수와 한번 만나고 나서 며칠후 육영수의 부산집을 찾아갔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방문 앞에서 군화 끈을 푸는 뒷모습을 보고 “사람은 얼굴로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라며 “뒷모습이 든든했다”고 훗날 심경을 밝혔다. “인상이 어땠느냐”는 동생 예수의 질문에는 “눈이 번쩍 번쩍 광채가 나는데 굉장히 무서웠어. 콧날이 날카로워 성깔이 있어 뵈더구나. 그러나 주관이 확고하게 서 있는 듯한 그 눈에 마음이 끌렸어”라고 말해주었다. 육영수와 어머니는 박정희가 이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송재천에게서 들어 알게 되었다. 그래도 육영수는 결혼을 결심했다. 어머니는 육영수의 결정을 지지했으나 아버지는 반대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군인에게, 그것도 전쟁 중인 군인에게 귀한 딸을 시집보내기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1950년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부산 문현동 부근에 있던 육본이 9월 22일 대구로 이동하자 박정희도 대구로 올라갔다. 서울이 수복되면 육본도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어서 마음이 바빠졌다. 박정희는 송재천 소위에게 트럭을 한 대 주어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육종관의 가족들을 옥천으로 태워보내는 길에 대구로 모시고 와서 약혼식을 올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육종관 일가를 태운 트럭이 대구를 지날 때 이경령은 남편에게 약혼식 얘기는 꺼내지 않고 다른 이유를 댄 뒤 육영수·예수만 데리고 내렸다. 모녀는 대구 동성로 4거리 자유백화점 옆 일식당으로 갔다. 약혼식에는 당시 연애 중이던 조카 박영옥(박상희 딸)과 김종필 대위도 참석했다. 약혼식 후 모녀는 옥천으로 돌아가고 며칠 뒤 박정희는 육본 트럭 행렬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두 사람은 자주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어느날 박정희가 옥천에 사는 장인 육종관을 찾아가 인사했다. 육종관은 절을 대충 받고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육종관은 딸이 자기 몰래 박정희와 약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육종관은 박정희에게 매정하게 말했다. “요사이 군인들이 얼마나 끼가 많은가. 서른네살까지 총각이 어디 있나. 좀 더 알아봐야겠네.” 박정희는 육종관의 말에 고개만 주억거리면서 라이터를 꺼내 손장난을 쳤다. 그것을 본 육종관이 잠시후 “그럼 잘 놀다 가게” 라며 방을 나왔다. 박정희 일행이 집을 떠나자 육종관은 아내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태도가 그게 뭐야. 라이터를 찰칵거리지를 않나. 꽁초까지 피우지도 않고 장초를 끄질 않나….” 아내가 육종관에게 딸의 결혼을 애원하다시피 했으나 육종관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육종관은 딸이 미래의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 뒤로는 사위를 만나주지 않았다. 사위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죽는날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육종관이 1965년 12월 26일 현직 대통령의 장인으로 숨졌을 때도 모든 신문에는 사진 한 장 없이 단신으로 처리되었다.

육영수와 재혼하기로 결심한 박정희에게 당장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는 조강지처 김호남의 호적 정리였다. 이 고민은 조카 박재석(박정희 둘째형 박무희 아들)이 해결해주었다. 조카가 김호남의 아버지를 찾아가 “가출 후 1년이 지나면 법적으로도 이혼이 가능하다”며 이혼을 독촉하자 김호남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어주었다. 호적은 1950년 11월 1일자로 정리되었다. 박정희와 김호남은 호적상 14년간 부부였으나 한 지붕에서 살았던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1950년 10월 신설된 9사단의 사단장 참모장으로 발령받았다. 9사단 사령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옮겨가자 결혼을 염두에 두고 대구 삼덕동에 방 3개짜리 한옥을 전세냈다.
박정희는 결혼일이 다가와서야 전처 사이에 딸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육영수는 아버지한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나 육종관은 이미 박정희의 호적을 떼 보고는 더욱 거세게 딸을 말렸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식이 있기 며칠 전 육종관은 대전에 간다면서 집을 나가버리고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혼 하루 전 대구로 내려갔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사실상 별거상태로 들어갔다. 육종관은 서울 사직동에 살던 큰개성댁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이경령은 육영수와 함께 살았다.
박정희-육영수의 결혼식은 1950년 12월 12일 오후 대구 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열렸다. 육영수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은사의 손에 이끌려 식장으로 들어갔다. 주례를 맡은 허억 대구시장은 결혼 전 신랑 신부와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주례사를 하면서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이라고 서두를 떼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결혼 생활
대구 삼덕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닷새째 되던 날 박정희는 먼저 이동한 9사단 사령부를 찾아 강원도로 향했다. 박정희는 대구와 전선 사이를 오고가는 보급부대 편으로 육영수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육영수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살면서 독서와 편지쓰기로 그리움을 달랬다. 9사단 사령부는 1951년 3월, 강릉시 남쪽 명주군 구산리로 이동했다. 1951년 4월 대령으로 승진한 박정희는 연락병을 보내 대구의 육영수를 군용 앰뷸런스에 태워 데리고 왔다. 강릉에서 두 사람은 뒤늦은 신혼여행을 즐겼다. 꿈같은 전선의 신혼생활을 일주일간 보내고 돌아간 아내에게 박정희는 사진과 편지와 자작시를 보내주었다. 붉은 선이 그려진 괘지에 써보낸 시의 제목은 ‘춘삼월 소묘’였다. “벚꽃은 지고 갈매기 너훌너훌 / 거울 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영….” 육영수는 이 시의 ‘나와 영’이란 글귀의 ‘영’ 자에 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나, 영수’라고 적어두었다. 말미에 ‘1951년 4월 25일’이라 적혀 있는 이 시를 육영수는 오랫동안 간직하면서 두고두고 읽어보곤 했다. 박정희가 쓴 시 중에는 1952년 7월 2일 밤에 쓴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란 제목의 감성적인 시도 있다.
1952년 2월 1일 저녁 육영수가 산통을 시작했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파가 안방에서 아이를 받고 있을 때 옆방에서 아내의 신음소리를 듣게된 박정희는 참다 못해 안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 아내의 손을 잡고 지켰다. 딸은 2월 2일 새벽에 태어났다. 근혜 이름은 박정희가 옥편을 뒤져서 지었다. 근혜에서 무궁화 근(槿)은 조국을 상징했다.

박정희는 1952년 10월부터 광주 육군포병학교에서 넉달간 교육을 받았다. 그 사이 박정희 부부는 광주에 셋방을 얻어 살았다. 만일 박근혜가 그때 광주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고향은 대구가 아니라 광주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53년 2월에 포병학교를 졸업한 뒤 3군단 내 신설 포병단 단장으로 전보(5월)되고 준장으로 진급(11월)했다. 그해 12월 말 미 육군 포병학교 고등군사반으로 유학을 떠나 1954년 5월 귀국했다. 박정희가 교육을 받을 동안 두 사람은 닷새가 멀다고 편지를 썼다.
박정희는 귀국 후 2군단 포병사령관을 거쳐 광주 육군포병학교 교장(10월)으로 부임했다. 1955년 6월 강원도 인제 5사단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3년 후 딸(박재옥)과 결혼할 한병기 중위를 전속 부관으로 발탁했다. 1956년 4월 서울 충현동 장충체육관 부근에 처음으로 내집을 마련하고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이후 경기도 포천의 6군단 부군단장(1957년 3월)과 강원도 인제 7사단장(1957년 9월)으로 부임하고 1958년 3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8년 숙군(肅軍)에 걸려 1년 남짓한 공백이 생겼지만 육사 2기생 가운데는 가장 먼저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8년 5월 박정희는 서울 충현동에서 신당동으로 이사했다. 대지 100평, 건평 30평쯤 되는 일본식 단층집이었다. 이곳은 3년 후 5·16쿠데타의 산실이 된다. 박정희의 딸(박근영)과 아들(박지만)은 1954년과 1958년 각각 태어났다.

박정희는 서울 지역 관할 6관구(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1959년 7월)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초대 사령관(1960년 1월)으로 부임했다. 1960년 4·19혁명이 발발했을 때는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을 겸직하면서 4·19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친학생적인 조사(弔辭)를 발표하고 5월 2일에는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에게 3·15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권고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결국 밉보여 광주 1관구 사령관과 육본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0년 12월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는 1961년 5월 16일 새벽으로 예정되었다. 박정희는 5월 15일 밤 9시가 넘어 신당동 자택에서 혁명군 임시지휘소가 있는 6관구 사령부로 갈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떠나려는 박정희에게 육영수가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라고 요청했다. 생사가 갈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아이 숙제를 봐달라는 육영수의 돌출 발언에 주변에 있던 장성들과 장교들이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건 구테타 현장으로 나가는 긴박한 순간에 그 수장인 남편 더러 딸의 숙제를 봐주라고 한 것을 두고 주변에서는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몸 조심 하세요”라는 당부의 말로 이해했다.

■대통령 시절 그리고 두 사람의 죽음
▲청와대 야당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46살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육영수는 38살로 청와대 안주인이 되었다. 박정희는 46.64%를 얻어 45.09%를 획득한 윤보선을 15만6000여표 차로 따돌리고 박빙의 승자가 되었다. 당시 언론과 미국은 전체적으로 선거가 큰 무리 없이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아내에게 편지와 시로 사랑을 표현했다.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고. 아내가 동반한 지방순시 중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아내를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육영수는 각계각층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나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박정희에게 서슴없이 직언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박 대통령이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나는 정권 야욕도 조직도 없는 사람”이라는 농으로 우회작전을 폈다. 육영수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통해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할 때면 박 대통령은 “맨날 못된 놈들만 만나더니 야당처럼 저런다”고 측근들에게 불평했다. 어떨 때는 육영수를 가리키며 “지독한 야당이 옆에 앉아 있으니 조심들 하시오”라며 정부·여당 간부들에게 농담도 했다. 육영수는 점차 ‘청와대의 야당’으로 불렸다.

▲박정희의 여성 편력 소문
육영수는 평소 너그럽고 인자했으나 남편 때문에 속상하기는 여염집 부녀자와 마찬가지였다. 육영수가 특히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은 남편의 음주습관과 여자문제였다. 평소 말이 없고 내면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도 술만 마시면 남들에게 속내를 보이는 게 육영수는 싫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았다. 종종 와이셔츠나 손수건에 립스틱을 묻혀 들어가기도 했다. 육영수는 한 나라의 대통령인 남편의 그런 모습이 싫었다.
소문에 따르면 육영수와 박정희 사이에서 벌어진 언쟁의 소재 중에는 여자 문제도 적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인기 절정의 여배우를 박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 한 기업체 사장집에서 몰래 만난다는 정보를 들은 육 여사가 그 집을 찾아갔다는 소문에서부터 박 대통령의 여성 편력을 참지 못한 육 여사가 박 대통령의 외국 방문을 앞두고 청와대를 가출하여 종적을 감췄다는 소문 등 온갖 얘기들이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의 술자리에 자주 끼거나 자리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은 육 여사의 곱지 않은 눈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증언도 많다.
여성의 술자리 동석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에서 두 여인이 박 대통령의 술시중을 들고, 10·26에 가담한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법정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빈번했다. 이른바 ‘채홍사’ 구실을 한 박선호 과장은 10·26 사건 재판(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대통령의 여인’들에 대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힌 바 있다. 박 과장은 최후 진술에서는 “각하께서 평균 한달에 열번 (궁정동 안가에) 나오셨다”고 증언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박 과장의 언급이 성관계를 특정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술자리 동석과 성관계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박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한겨레21’ 잡지도 2005년 2월 기사에서 박정희의 여성 편력에 여러 ‘사실’과 ‘추측’이 뒤섞여 있다면서 여성을 동반한 술자리를 자주 가진 것에 대해서만 이견이 없다고 썼다. 여성의 술시중은 그 시대 남성들의 일반적인 음주문화였다. 평범한 봉급쟁이들도 그런 자리는 많았다. 그러나 성관계를 했다면 다른 얘기가 된다. 필부들의 바람기와 달리 최고 권력자의 외도에는 무소불위 힘이 작용할 테고 국민들은 이런 대통령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로 육영수란 ‘통제장치’가 사라지면서 박 대통령의 여성 편력이 육욕의 탐닉으로 줄달음질쳤다는 주장도 있다. 이 대목에서도 육욕이 술시중인지 성관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70년 ‘정인숙 사건’이 터졌을 때, 박정희가 정인숙 아이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오랫동안 사실처럼 돌아다녔으나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것에서 알 수 있듯 주장과 소문만으로 박 대통령의 여성 편력을 성관계로까지 확장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박정희를 둘러싼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가 구체적으로 특정되거나 밝혀지지 않은 이상, ‘카더라’만 가지고 “성관계가 문란했다”고 말하는 것은 과도할 뿐만 아니라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육영수·박정희, 5년 시차로 총탄 맞고 숨져
서울 국립극장에서 8·15 광복 기념식이 열린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 쯤 재일교포 문세광이 연단을 향해 3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그중 한 발이 연단 의자에 앉아있던 육 여사의 머리에 관통했다.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응급 후송되어 5시간 40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 끝내 숨을 거뒀다. 아내의 죽음은 박정희 대통령의 삶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저녁이면 거실에서 TV를 시청하다가 소파에 앉은 채 잠들기 일쑤였다. 육 여사가 생각이 날 때면 눈물을 흘렸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기력도 많이 약해졌다. 청와대 식당 한쪽 벽에 육 여사를 그린 대형 초상화를 걸어 두고, 혼자서 식사할 때가 많아졌다. 한가할 때 피아노를 치는 것이 취미였지만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피아노가 단소로 바뀌었다. 1층 집무실에서 2층 내실로 퇴근한 뒤에 일부러 전등을 끄고는 어둠 속에서 홀로 단소를 불었다. 그 가락이 애조를 띠어 당직자들에게는 단소 소리 듣는 것이 적지 않은 고통이었다. 육 여사의 죽음은 박 대통령에게 바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창구의 폐쇄를 의미했다.
박 대통령은 육 여사가 죽고 5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쯤,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2발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 이로써 1961년 5·16 쿠데타로부터 만 18년 5개월 10일 동안 이어져온 박정희의 절대권력도 막을 내리고 한 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전10권)에서 주요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