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84부대 기간병과 훈련병
작전명 ‘오소리’를 수행할 부대의 정식 명칭은 공군 2325부대 소속 209파견대였다. 19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해서 편의상 ‘684부대’로도 불렸다. 부대 창설은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가 실패한 1·21사태가 발단이 되었다.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 특수부대를 능가할 대북 응징보복팀의 창설을 결정하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명을 따랐다. 훈련은 공군이 맡고, 훈련 장소는 인천에서 20㎞ 떨어진 실미도에 잡았다.
특수부대원 선발을 위해 ‘물색관’이라고 불린 현역 군 간부나 병무 담당 요원들이 전국을 누볐다. 주로 신체 건강하고 환경이 어려운 고교생이나 20대 초반 청년들이 타깃이 되었다. 경범죄자도 대상이었다. 그들에게는 잔여형을 면제해주고 거액의 포상금을 준다는 조건으로 꼬드겼다. 사관후보생에 준하는 월급을 주고, 배불리 먹여주며, 미군부대에 취직시켜 주겠다는 등의 조건도 빠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모집한 인원은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공비와 같은 31명이었다. 나이는 20~34살이었고 직업은 권투선수, 편물점 재단사, 입대 대기자, 서커스 단원, 음식점 요리사 출신 등 다양했다.
훈련은 혹독했다. 기초체력 단련을 위해 30㎏의 모래배낭을 메고 양 발목에도 각 5㎏의 사낭(모래주머니)이 채워졌다. 야간행군을 포함해 시간당 13㎞를 주파해야 했다. 북한 특수부대보다 앞서는 게 당면 목표였다. 죽기살기로 뛰고 구르다 보면 등은 피범벅이 되었고 고름은 말라붙어 굳은살로 변했다. 철조망과 철책, 부비트랩과 함정·사막지대 등 휴전선의 6중 봉쇄를 뚫고 침투하는 방법도 반드시 익혀야 할 숙제였다. 북한 주석궁 침투를 위해 독도법, 산악훈련, 폭파기술 등을 익히고 체포되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결국 혹독한 훈련 중 익사, 구타, 자살 등으로 5명이 숨지고 2명은 도주했다.
1969년, 북한이 코앞에 보이는 백령도에서 평양 침투를 위해 대기하라는 지시가 대원들에게 떨어졌다. 대원들은 백령도에서 평양으로 침투할 장비를 갖추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한 달 뒤 갑자기 “실미도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대원들은 다시 지옥훈련을 받으며 침투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작전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우도 예전 같지 않았다. 쌀밥은 보리밥으로, 고깃국은 단무지국으로 바뀌었다. 봉급도 끊겼다. 그 사이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과 김계원을 거쳐 이후락으로 바뀌었다. 남북 대치국면도 화해 분위기로 빠르게 변해갔다. 결국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고 그들은 철저히 버려진 신세로 전락했다. 684부대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실미도에 피비린내가 진동한 것은 1971년 8월 23일 새벽 6시였다. 특수부대를 관리하던 24명의 기간요원 중 화장실 분뇨통에 숨거나 애인 면회차 외박을 나갔던 소대장 등 6명만 살았을 뿐, 18명이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익사했다. 특수부대원도 2명이 죽었다.
탈출에 성공한 22명은 낮 12시 10분쯤 무의도에서 민간어선을 뺏어타고 3년 4개월 만에 실미도를 빠져나와 인천 독부리 해안 근처에 상륙했다. 그리고 청와대로 가기 위해 인천 송도에서 버스를 탈취했다. 그들이 서울로 진입하던 중 그들을 가로막은 군경과 교전이 벌어져 인천 조고개에서 2명이 죽었다. 6명의 민간인과 2명의 경찰도 이들의 총에 희생되었다. 서울은 발칵 뒤집혔다. 시민들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특수부대원들은 서울 대방동에까지 이르렀으나 버스가 유한양행 앞 가로수에 받혀 멈춰서자 죽음을 선택했다. 수류탄 자폭으로 16명이 현장에서 죽었다. 부상한 4명은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비공개 재판을 받고 1972년 3월 서울 오류동의 군부대에서 극비리에 총살되었다. 그리고 다음달 ‘7·4 남북공동성명’의 초안을 만들기 위해 이후락 중정부장이 평양을 방문했다. 남북 대치가 첨예했던 1970년대의 자화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