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⑳] 김기창·박래현은 국내 첫 유명 부부화가… 학력도 변변치 않은 청각상실의 가난뱅이(김기창)와 일본까지 유학 다녀온 부잣집 인텔리(박래현)의 운명적 만남
2022년 12월 12일 · zznz

↑ 김기창이 그린 자화상(왼쪽, 1956년)과 아내 박래현의 초상화(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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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김기창(1913~2001)은 청각장애를 딛고 전통 회화를 현대 감각으로 계승·발전시킨 한국화의 거장이었다. 구상과 추상,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고 해학적인 화풍을 선보였다. 아내 박래현(1920~1976)은 일본과 미국의 미술계를 10여 년간 경험한 우리 미술계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였다. 그런데도 ‘화가 박래현’ 보다는 청각장애자 김기창의 입과 귀가 되어 격려하고 도와준 ‘김기창의 아내’로 한동안 기억되었다. 하지만 우리 여성계 화단에서 박래현의 이름 석자를 빼놓을 순 없다.
두 사람이 1943년 처음 만났을 때, 학력과 집안의 경제력은 대조적이었다. 김기창은 학력도 변변치 않은 청각상실의 가난뱅이였고 박래현은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대학까지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였다. 김기창은 두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 비교했다. 김기창 자신은 온순하나 급하고, 박래현은 동정심이 많아 눈물을 자주 흘리면서도 성격이 예민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결혼 전 박래현의 삶
박래현(1920~1976)은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호남평야에 넓은 땅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대지주의 꿈을 꾸고 전북 군산으로 이주할 때 박래현 나이는 6살이었다. 이후 군산은 박래현의 두 번째 고향이 된다. 생활은 풍족했다. 군산과 전주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와 여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박래현이 화가의 꿈을 꾼 것은 사범학교 시절이었다. 경성여자사범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선전 혹은 조선미전) 추천작가로 활동하던 일본인 미술교사의 권유가 진로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미술교사에게 수채화와 동양화를 교습받으면서 꿈을 구체화했다. 박래현은 사범학교 졸업 후 보통학교 교사로 2년 간 재직한 뒤 1940년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이던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단장’(종이에 채색, 131×154㎝)이 특선에다 총독상까지 받아 촉망받는 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1944년에는 선전에서 ‘대원녀’로 무감사 입선했다. 1946년 6월 3일에는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시회를 1주일간 열었다.

■결혼 전 김기창의 삶
초등학교 입학 며칠 후 귀가 안들려
김기창(1913~2001)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났다. 5살 되던 해에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7살이던 1920년 서울 인사동의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 며칠 후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1년 동안 집에서 병마와 싸웠다. 하지만 1921년 여름, 결국 귀가 들리지 않아 침묵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갖고 있던 많은 재산이 김기창의 귓병 치료와 금광을 찾아 떠난 아버지의 사업 실패 그리고 외삼촌의 낭비로 탕진되면서 집안의 가세까지 기울었다. 김기창을 돌봐주어야 할 어머니가 직업 현장으로 내몰린 것도 당시 집안의 남자들이 돈을 쓰기만 했지 벌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진명여고보(1회)를 졸업한 어머니는 경기 개성의 정화여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김기창도 개성에 머물렀다. 어머니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학교장이 미국 유학을 주선하려 했으나, 남편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김기창은 3년 후 서울로 돌아와 11살 늦은 나이에 승동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우두커니 앉아 교과서 여백에 새, 꽃, 사람, 개 등을 그리며 수업 시간을 보냈다. 교과서 여백은 온통 낙서같은 그림들로 채워졌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분은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메워졌다.

어머니는 낮에는 세브란스병원 치과에서 간호원으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살림을 하는 바쁜 와중에도 밤이 되면 아들에게 한글, 한자, 산수를 가르쳤다. 어머니는 한글 음절과 발음이 같은 한자를 비교해가며 한글을 가르쳤다. ‘가’와 ‘可’는 발음이 같지만 뜻이 다르고, ‘可’는 가능하다는 뜻임을 알려주었다. 한자 ‘왕(往)’의 한글 뜻이 ‘가다’인 것도 상기시키면서 발음 ‘가’를 알려주었다. 특수교육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 언어를 교육한다는 것은 눈물겨운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기창은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기 때문에 한자를 비교해 가며 한글을 비교적 쉽게 배웠다. 청각 장애인이 되기 전에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거나, 말소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선천적 청각 장애인이었으면 한글을 배우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기창은 이렇게 배운 한글로 1928년 ‘어린이’ 잡지에 투고한 동시가 당선된 것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이해력으로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부모는 장차 아들이 무엇을 하며 먹고살지가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허우대가 크니 목수를 시키자고 했으나 어머니는 생각이 달랐다. 아들의 그림 솜씨와 글 재주를 알고 있는 터라 단순한 생활인이 아닌 예술가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1930년 김은호 문하에 들어가 선전(鮮展)에서 최고상 수상
어머니는 1930년 겨울 김기창을 데리고 당시 한국화의 대가로 유명한 이당 김은호를 찾아갔다. 다행히 김은호가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은호 화숙에 입문한지 6개월만인 1931년 5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널뛰기를 소재로 한 ‘판상도무(板上跳舞)’를 출품해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데뷔했다. 당시 화숙에는 김기창 말고도 김인승, 장우성, 한유동 등이 동문수학했다. 이들은 1936년 1월 미술단체인 후소회를 창립하고, 10월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조선화단에서 유파를 형성했다. 김기창은 1932년 6월 선전에 300호 크기의 대작인 ‘수조(水鳥)’를 출품해 다시 입선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운포(雲圃)’ 아호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아들을 돌보던 어머니가 1932년 10월 37세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김기창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럼에도 1934년 ‘정청’, 1935년 ‘가을’ 등 1936년까지 선전에서 내리 입선을 했다. 1937년 선전에서는 ‘고담(古談)’으로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차지했다. 1938년에는 ‘여름날’로 총독상을 수상해 중진 화가로 올라가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1939년(18회)과 1940년(19회) 선전까지 연 4회 특선을 차지해 1941년 추천작가 반열에 올랐다.
문제는 일제 말엽의 친일적 화업(畫業)이었다. 일제의 전시 체제 아래에 있었던 총후미술전(1942~1944)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된 것을 비롯해 ‘조선 청년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해 1943년 8월 6일자 매일신보 칼럼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 실린 ‘축 입영(祝 入營)’ 삽화, 1944년 4월 식산은행 사보 ‘회심’에 실린 완전군장 병사의 옆모습을 그린 ‘총후병사’, 1944년 3월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결전 미술전’에서 특선으로 당선되어 어린이잡지 ‘소국민’ 1944년 5월호에 실린 ‘적진육박’ 등이 그의 친일 활동을 증언하고 있다. 김기창은 그 시기의 작품과 몇몇 신문 잡지 삽화로 훗날 친일 작가로 매도되는 곤욕을 치르게 되자 “사상적인 친일 활동은 하지 않았다.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한다”며 용서를 구했다.

■만남과 결혼
김기창에게 박래현이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1943년이었다. 그해 선전에서 ‘단장’이란 작품으로 특선을 하고 총독상을 수상한 23살의 박래현이 당시 선전의 추천작가이면서 신문 지면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김기창이 70대 노대가인 것으로 알고 서울을 방문한 김에 인사차 김기창의 집을 불쑥 찾아간 것이다.
당시 나이 30살이던 김기창은 운명의 그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외출했다가 들어서는데 마당 한복판이 환해 보였다. ‘꿈이 아닌가’ 싶도록 아주 멋쟁이에 젊고 예쁜 여인이 산뜻한 흰 양장에 흰 하이힐을 신고 단발한 모습으로 내 눈을 눈부시게 했다. 마당 가득히 환했다. 그중에서도 매끈한 종아리 아래 하얀 하이힐의 매력이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선명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아주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박래현은 김기창을 처음 본 순간 느꼈던 강렬한 인상을 후일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 거대한 검은 바윗덩어리 마냥 시꺼먼 체구가 버티고 있어 순간 그것에 부딪히게 되었다.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면서 그 시꺼먼 바위덩어리를 바라보는 순간,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여기를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김 선생은 하도 유명한 분이어서 적어도 칠십 노대가로 알고 찾아뵙고 인사 올리러 왔던 것인데, 태산 마냥 버티고 선 우람한 체구, 얼굴은 젊고 패기가 가득 차 보이는 미남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정신이 아찔했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 필담을 나눴다. 그림을 통한 스스럼 없는 감정의 교류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박래현은 생각지도 않은 미남 청년에 호감을 가졌고, 김기창은 박래현의 미모에 연정을 품었다. 두 사람은 이후 수 차례 만나면서 관심의 폭을 넓혀나갔다. 그러다가 김기창 마음 속에서 사랑의 감정이 강렬하게 분출한 것은 박래현의 고향집인 군산을 찾아간 후였다. 김기창은 박래현 집을 찾아갔을 때 갑자기 40도를 오르내리는 열이 나고 심한 두통이 일어나 군산집에 누워 있어야 했다. 김기창은 자신을 밤새워 간병하는 박래현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마음 깊숙이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점차 사랑을 느끼고 생의 반려자가 될 것을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결혼을 꿈꾸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김기창이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일찌감치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해도 미래는 불투명했다. 학력은 그렇다쳐도 청각장애로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선택은 박래현의 몫이었다. 김기창은 박래현의 의사를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박래현 집안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예술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다”고 여긴 박래현의 고집을 부모는 꺾지 못했다.
당시 박래현은 학력, 집안, 인물, 성격 등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신부감이었다. 그런데도 악조건의 김기창과 결혼을 결심한 것은 어떤 어려움도 예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박래현은 결혼에 앞서 2가지를 결혼 조건으로 내세웠다. ‘서로 생활하다 성격상, 환경상 차이가 벌어질 경우 미련 없이 헤어져도 좋다’는 것과 ‘각자 작품 활동에 협조는 해도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만난지 4년 만인 1947년 2월 17일 남산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결혼했다. 김기창 34세, 박래현 27세였다. 김기창은 박래현에게 우향(雨鄕)이라는 호를 선물했다. 김기창 본인의 자서전과 관련 글들에는 두 사람의 결혼 연도가 1946년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 신문을 보면 1947년으로 나온다.

■결혼 후 박래현의 삶
결혼 후 두 사람은 결혼 전 다짐대로 1947년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국내 최초로 부부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두 사람의 부부 전시회는 1971년까지 12회나 계속되었다. 중진 화가들과 함께 한 단체전까지 포함하면 17회였고 미국에서도 3차례 부부전을 열었다.

박래현은 1956년 1월 막내딸을 출산해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도 붓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1956년 5월 다섯번째 부부전시회를 열고 6월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불과 몇 달 지난 11월 ‘노점’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한 것도 네 아이의 엄마이자 김기창의 아내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아실현에 매달린 결과였다. 다만 가사와 육아에 쫓겨 온전히 작업에 집중하진 못했다. 자연히 그림 소재는 자신의 경험과 가사 활동 반경 내에서 볼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로 제한되었고 작업은 밤 시간에 주로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밤과 낮의 두 여인을 겹쳐, 이중적인 자아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밤과 낮’(1959년)은 박래현의 심리 상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낮에는 일상의 주부로, 밤에는 예민한 감각의 예술가로 ‘이중생활’을 해야 했던 박래현의 모습이 여지없이 투과되었다.
박래현은 1967년 김기창과 함께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하고 중남미를 여행했다. 그때 얻은 영감을 통해 추상화의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그녀는 마야, 아즈텍 문명, 이집트와 중국 고대 문명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에 매료되어,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1969년 귀국하기 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박래현은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작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그림을 그리며 입버릇처럼 해오던 말이었다. 아내의 허한 심정을 알아본 김기창이 “그리 하라”고 하면서 박래현은 미국에 남고 김기창은 홀로 귀국했다. 아이가 4명이나 되고 나이도 49살이나 되는 여성이 다시 이역만리 미국에서 새로운 미술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누가보아도 모험이었다. 박래현은 뉴욕에서 한국화가 아닌 새로운 조형 작업을 실험하는데 열의가 넘쳤다. 그것은 태피스트리와 판화였다. 세계적으로 섬유예술이 막 싹트던 1960년대에 박래현이 미국에서 접한 태피스트리와 다양한 동판화 기술은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한국 미술계에 머지 않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박래현은 1974년 2월 귀국했다. 1967년 브라질 상파울로로 떠난 후 6년 반 만의 귀국이었다.

박래현은 귀국 후에도 바쁜 일상을 보냈다. 5월에는 주부클럽연합회가 주는 ‘신사임당상’을 수상하고 6월에는 신세계화랑에서 박래현 판화 초대전을 열었다. 이로써 결혼 이후 개인전 없이 부부전만 가져온 부부의 전통이 28년만에 깨졌다. 그런데 박래현은 그 무렵 자신의 몸 안에서 간암이 퍼지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1975년 9월 잠시 미국에 다니러 갔다가 그곳 친구집에서 쓰러졌다. 김기창이 미국으로 달려갔으나 의사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며 귀국을 종용했다. 박래현은 남편과 함께 국내로 돌아왔으나 1976년 1월 2일 56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1975년 12월 16일 그린 꽃 스케치가 마지막 작품이었다. 김기창에게 박래현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때 내 심정은 내 목숨과 당신 목숨을 바꾸고 싶었소. 당신이 남아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소. 만일 하늘이 허락해 준다면 기꺼이 내 목숨을 당신께 넘겨주고 싶었소.”(김기창, ‘나의 아내 박래현’ 중에서)
김기창은 아내가 작고한 그 해 12월 아내를 회고하는 글을 묶어 ‘침묵의 세계에서’ 제목의 수필집을 상재했다. 이듬해(1977년)에는 자신들의 보금자리 성북동 집을 개조한 미술관을 열었다. 자신(운보)과 아내(우향)의 호에서 한 자씩을 따와 명명한 ‘운향미술관’은 1977년 7월 개관했다. 1978년 덕수궁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래현 유작전이 열리고 같은 해 박래현이 쓴 글을 모은 ‘사랑과 빛의 메아리’가 출간되었다.

■결혼 후 김기창의 삶
‘예수의 생애’ 연작, 예술사적으로 높은 평가 받아
해방 후 미술계의 절실한 과제는 일본색의 탈피와 민족미술의 건설이었다. 김기창에게도 해방은 화풍의 전환점이자 분기점이었다. 김기창이 자신의 그림에 원래의 호인 ‘운포(雲圃)’의 ‘포(圃)’자에서 꽉꽉 막힌 굴레를 치워버린다는 의미로 ‘구(口)’자를 벗겨내고 그냥 ‘보(甫)’로 서명하기 시작한 것도 새롭게 변신하겠다는 ‘탈각’의 상징적 의미였다. 구체적으로는 일본화의 화풍에서 벗어나야 하고 스승 김은호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통의 인습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는 강박적 관념이 작용한 결과였다. 김기창은 1947년 자유신문사의 문화부 촉탁기자로 활동했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마지막 귀머거리 기자 생활은 2년 동안 이어졌다.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1950년 6월 22일 시작된 부부의 세 번째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때 6·25전쟁이 터졌다. 그림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김기창은 미처 피난 가지 못해 인민군 치아에서 3개월을 보냈다. 9·18 서울수복 때 철수하는 인민군에 의해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북으로 끌려갔으나 김기창은 청각장애라는 이유로 가까스로 모면했다. 1·4후퇴 때는 서둘러 처가가 있는 전북 군산으로 피난 갔다. 군산 생활은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궁핍한 생활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실험에 빠졌던 시기였다.
김기창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부터 1953년까지 피란지 전북 군산에서 30점의 연작으로 된 ‘예수의 생애’를 완성했다. 민족 수난의 가혹한 현실을 예수의 생애에 비유해 그린 풍속화인데 화폭에 등장한 인물이 모두 한복을 입고 있고 배경은 조선시대의 토속적인 우리 땅이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예수는 아예 도포 입고 갓 쓴 선비로 재탄생되었다. 크게 예수의 탄생과 박해와 사역(공생애), 예수의 수난과 부활로 구성된 ‘예수의 생애’ 연작은 동서고금에서 보기 드물게 ‘수태고지’ ‘아기 예수의 탄생’ ‘부활’ ‘승천’ 등 성경에서 30가지 장면을 추려내 만든 성화(聖畫) 연작이고 예수의 일대기를 조선시대 풍속화로 굴절시킨 작품이란 점에서 지금까지도 예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아내 죽음 후 실의에 빠졌다가 곧이어 폭포수처럼 작품 쏟아내
김기창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조형 개념에서 탈피해 한국화에 입체주의 기법을 도입한 ‘구멍가게’ ‘복덕방’ 등 일련의 작품을 1952년 선보였다. 1955년에는 대작 ‘군마도’(205×408㎝)를 비롯해 가면극을 소재로 한 ‘탈춤’ 시리즈와 문자도(文字圖)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해 1955~1961년 홍익대에서, 1962~1972년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김기창은 신문 역사소설의 삽화(1960~1970년대)와 위인들의 초상화(1970년대)도 많이 그렸다. 초상 중 세종대왕을 비롯해 을지문덕, 태종 무열왕 등 6명의 초상은 문화관광부에 의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1975년 1만 원짜리 지폐에 새겨진 김기창이 그린 세종대왕 초상은 지금도 1만 원권 지폐에 그대로 살아있다.
1976년 1월 아내의 죽음은 김기창에게 청각장애 못지않은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상을 잃은 듯 슬픔에 빠졌다. 그러다가 아내의 몫까지 온 힘을 기울여 창작활동에 매진하는 것만이 두 사람이 꿈꿨던 예술세계를 이뤄내는 길이라 여겨 다시 붓을 잡고 맹렬하게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사이에 민화를 자신의 방법으로 변형해낸 풍류적·풍속적 연작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김기창이 유머러스한 개념으로 명명한 ‘바보 산수’ 연작은 1976년 5월 남경화랑에서 가진 5년 만의 개인전에서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후에는 꽃과 새를 주요 모티프로 삼은 연작들을 공개했는데 김기창은 ‘바보 화조’로 명명했다.
김기창은 1996년 5월 5월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 전시장에서 쓰러졌다. 이후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1년 1월 23일 작고했다. 그때까지 김기창은 엄청남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 숫자로만 보면 한국에서 그를 능가할 화가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1993년에 제작된 운보 김기창 전작 도록에 실린 작품만 1만 점을 상회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파악된 것에 한해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