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중앙정보부 일본 호텔에서 김대중 납치

↑ 납치에서 풀려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이후락 중정 부장 “내가 책임지겠다”며 김대중 납치 지시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던 김대중은 다른 일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졸지에 망명객이 된 김대중은 야당 의원들까지 고문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귀국을 포기한 채 해외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펼쳤다. 1973년 7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발기인 대회를 열고, 같은 달 일본으로 돌아와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을 추진했다.

박정희는 귀국하지 않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반유신 활동을 펼치는 김대중을 ‘사대주의자’라며 비난했다. 김대중을 귀국시키려고 다각도로 손을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시기에 벌어진 게 김대중의 납치였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처음 김대중의 납치를 지시했을 때, 중앙정보부(중정) 해외담당 차장보인 이철희와 일본 현지의 중정 책임자인 주일공사 김재권(본명 김기완)은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해 반대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내가 책임지겠다”는 이후락의 말을 믿고 납치를 준비했다. 일본 현지에서는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중정 소속의 주일 한국 대사관의 1등서기관 김동운 등 여러 명이 동원되었다.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오전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양일동 통일당 총재가 머물고 있는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호텔 2212호실을 방문했다. 경호원은 1층 로비에서 대기했다. 12시가 넘어 같은 호텔 2028호실에 있던 김경인 통일당 의원이 양일동의 방으로 들어와 세 사람은 방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오후 1시 15분쯤 김대중은 일본 자민당 의원과 만나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대중을 배웅하러 김경인이 문을 열고 뒤따라 나왔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몇 발짝 옮기는 순간, 옆방 2210호실과 맞은편 방 2215호실에서 체구가 건장한 남자 6명이 나와 두 사람을 덮쳤다. 서너 사람이 김대중을 2210호실로 끌고 들어가고 나머지 괴한들은 김경인을 2212호실 양일동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양일동과 김경인은 괴한들에게 붙들려 있느라 옆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괴한들은 2210호실에서 김대중을 침대에 팽개친 채 마취제를 적신 손수건을 코에 대고 눌렀다. 목도 짓누르고 두 손을 꺾어 밧줄로 묶었다. 김대중은 한동안 정신을 잃었으나 마취제가 듣지 않아 다시 깨어났다. 잠시 후 괴한들은 김대중의 팔을 양쪽에서 끼고 2210호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던 중 2명의 젊은 일본인 남자가 탔다. 김대중이 일본 말로 “살인자다. 구해달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남자들은 두려웠는지 7층 쯤에서 내렸다. 괴한들은 지하 주차장에서 미리 대기한 승용차 뒷좌석에 김대중을 태운 뒤 바닥에 앉히고 다리로 머리를 눌렀다. 승용차는 지하 주차장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1시 20분께였다.

 

납치 목적이 살해인지 강제귀국인지는 여전히 논란

 1층 로비에 있던 경호원은 2시가 되어도 김대중이 내려오지 않자 22층으로 올라갔다가 김대중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한 김대중의 비서진은 2시 40분께 경찰서에 납치 신고를 했다. 사건을 접수한 일본 경시청은 3시 15분께 전국 경찰에 긴급 상황을 알렸다. 경찰과 기자들이 거의 동시에 범행 현장에 도착했다. 범행 장소인 2210호실에서 대형 배낭 2개와 밧줄, 마취제가 든 영양제 병 등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북한 담배도 있어 중정이 김대중의 납치를 북한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려 했다는 추측을 낳았다. 배낭은 김대중을 욕조에서 살해한 뒤 토막내 운반할 계획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나중에 경찰의 정밀 수사로 범행 현장 욕조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의 1등 서기관 김동운의 지문이 채취되었다.

김대중을 태운 승용차는 고속도로를 서너 시간 달린 뒤 오사카 방향으로 틀어 한 시간쯤 더 달렸다. 저녁 때가 되어 승용차는 오사카 시내로 들어가 빌딩 주차장에 멈췄다. 김대중은 다다미가 있는 오사카 총영사관 숙소로 끌려 들어갔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신발은 운동화로 바꿔 신긴 뒤 다시 끈으로 몸을 묶고 화물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만 남기고 몸 전체를 감았다. 두 시간쯤 지나 밤이 깊어지자 김대중은 다시 차에 실려 항구로 옮겨졌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모터보트에 태우고 얼굴에 보자기를 씌웠다. 납치범들은 모터보트로 1시간쯤 달린 뒤 김대중을 큰 배로 옮겼다. 나중에 그 배는 중앙정보부가 공작선으로 사용하던 ‘용금호’로 밝혀졌다. 온몸을 단단히 묶인 김대중의 입에는 재갈이 물렸고, 몸에는 30~40㎏의 물체가 달렸다. 자신을 바다에 수장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김대중을 엄습했다. 김대중에 따르면, 붕대에 가려진 김대중의 눈에 붉은 빛이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던 중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비행기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김대중 귀에 들렸다.

한편 납치 당일 오후 3시에 김대중의 납치 사실을 전해들은 필립 하비브 주한 미 대사는 이튿날 박정희에게 “중앙정보부의 소행인 것을 알고 있으니 김대중을 풀어주라”며 “김대중이 죽는다면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끝장 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미 국무부도 납치 11시간 만에 미국이 김대중의 안전에 중대한 관심이 있다는 강경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서울과 도쿄로 전달했다. 용금호는 8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바다에 떠 있다가 “풀어주라”는 중정 본부의 지시에 따라 부산항으로 항진한 끝에 8월 11일 새벽 부산항에 도착했다. 김대중의 몸을 묶은 밧줄은 풀렸으나 눈은 여전히 붕대에 가려져 있었다. 배에서 내린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차에 싣고 몇 시간 달린 뒤 농가로 보이는 한적한 집으로 데리고 갔다. 김대중은 12일 서울 근교의 중앙정보부 안가로 끌려가 하루를 보낸 뒤 13일 저녁 무렵 집 근처에서 풀려났다. 동교동 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이었다. 김대중이 동교동 자택의 초인종을 누른 것은 8월 13일 밤 10시 20분쯤이었다. 입술 오른쪽은 부르텄고 다리에는 타박상을 입었다.

북한은 납치 사실을 구실로 삼아 “이후락 같은 깡패와는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며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후 이어지던 남북대화를 깨버렸다. 일본 경찰은 호텔 현장에서 범인 중 한 명인 김동운 서기관의 지문을 채취하고 범행에 사용된 차량이 요코하마 한국 영사관 소유임을 밝혀낸 뒤 벌건 대낮에 도쿄 치안이 유린당했다며 강경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정부는 “명백한 주권 침해”라며 한일 각료회의를 연기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양국 간의 갈등은 박 대통령이 사건 발생 석 달 만인 11월 2일 김종필 총리에게 친서를 들려 보내 일본에 사과함으로써 봉합되었다. 일본도 이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아 김동운 개인의 범행으로 일단락지었다.

 

과거사위도 명확한 결론 못 내려

  김대중의 납치는 지금까지도 몇 가지 사실이 논란에 휩싸여 있다. 납치 목적이 살해인지 강제귀국인지, 혹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인지 이후락 중정 부장의 단독 범행인지 여부다. 김대중은 한번은 호텔에서 또 한번은 용금호에서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와 용금호 선원들은 납치가 목적이었다고 반박했다.

김대중은 또한 박 대통령이 “김대중을 해치워버려”라고 지시했다는 얘기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최영근 전 의원의 말을 근거로 박 대통령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측근들은 납치 사실을 보고받았을 때 박 대통령의 첫 반응과 납치를 저지른 이후락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박 대통령의 사전 지시나 인지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반박한다. 당시 박 대통령의 신임을 잃어 위기에 몰려 있던 이후락의 과잉충성이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만 사건을 은폐하는 데 박 대통령이 사후에 관여한 사실은 양측 모두 인정하고 있다.

의혹은 또 있다. “구출용 비행기가 용금호에 접근했기 때문에 극적으로 살았다”는 김대중의 주장과 “비행기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는 선원들 간의 상반된 주장이 그것이다. 이 의혹은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의 발표에 의해 일부 해소되었다. 과거사위 조사는 이철희 당시 중정 차장보 등 10여 명의 면담 조사와 1만2000쪽에 이르는 국정원의 내부 문서 검토를 거쳐 사건 발생 34년 만에 나온 정부 차원의 첫 공식 조사결과였다. 이철희 차장보는 과거사위에서 이후락 당시 중정 부장의 지시에 의해 납치가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다만 당시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반대하는 자신에게 이후락이 “데려오기만 하면 그 후 책임은 내가 진다.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말했다고 진술함으로써 박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박 대통령은 김대중 납치사건과 무관하다면서도 납치범들을 처벌하지 않아 의혹을 해소하지 못했다.

과거사위는 논란이 된 김대중 수장(水葬) 위협과 비행기 출현 사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된 게 없다고 발표했다. “배에 감금된 채 재갈이 물리고 손발을 결박당한 피해자로서는 수장을 위한 준비행위로 인식하고 위기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직접적으로 갑판 위에서 바다로 던지려는 시도는 없었다”며 “미국이나 일본이 김대중을 구출하기 위해 비행기를 보냈다는 자료도 없다”고 설명했다. 과거사위는 또 납치가 살해를 위한 것인지 단순 납치였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조사를 종결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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