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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흑산도 여행] 이미자 노래 ‘흑산도 아가씨’와 홍어, 그리고 정약전의 섬… 일주도로(25㎞) 따라 둘러봐야 속살 보여

↑ 흑산도 내해(內海). 왼쪽와 윗쪽이 진리 마을, 아래쪽이 예리 마을이다. (출처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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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대학동창 희용 부부와 2박 3일(2002.9.23.~25) 간 단체투어 일정으로 전남 신안군 홍도와 흑산도를 다녀왔다. 목포에서 흑산도까지는 2시간, 홍도까지는 2시간 30분 걸린다. 1일차 오후와 2일차 오전은 홍도에서 보내고 2일차 오후 4시부터 3일차 오전까지는 흑산도에서 보낸 뒤 오후엔 목포로 돌아와 유달산을 걸었다.

관광이든 여행이든 홍도를 들르지 않고 흑산도만 다녀오는 여행객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럴 경우 흑산도 체류 시간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흑산도 여행은 실패한다. 촉박한 단체여행 일정에 쫓겨 흑산도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했다. 흑산도는 그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니다. 홍도 일정에 흑산도를 끼워서 가야겠다면 홍도-흑산도 여객선 시간에 맞춰 흑산도는 2일차 12시부터 3일차 오후 4시까지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그나마 즐길 수 있다. 둘째 날 여행사가 안내하는 대로 홍도에서 흑산도로 건너갔다. 비록 수박겉핧기 식으로 다녀오긴 했으나 대충은 알고 있으니 이 글에서는 개요만 소개하고 현장감 살린 글은 다음에 다녀와 보충할 생각이다.

 

■흑산도 개요

흑산도는 우리나라 최서남단 해역에 위치한 군도(群島)의 대표섬이면서 전남 신안군 흑산면의 면사무소가 있는 본섬이다. 신안군은 유인도 72개, 무인도 953개 등 1025개 섬들로만 이루어진 국내 유일의 군(郡)이다. 국내 전체 섬의 약 25%를 차지한다. 흑산면은 유인도 11개, 무인도 89개, 여(물에 잠긴 바위) 187개 등 총 28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섬인 흑산도는 목포에서 93㎞ 떨어져 있고 쾌속선으로 2시간 정도 걸린다. 면적은 서울 여의도의 6.8배 넓이다. 홍도, 가거도(소흑산도), 영산도, 장도, 다물도, 만재도 등을 아우르는 흑산면 전체 인구는 2022년 10월 현재 3900여 명이다. 이 가운데 흑산도 본섬에만 2300여 명이 거주한다. 흑산도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각각 한 곳 있다. 한때 중학교에서는 500명의 학생들이 24개 교실에서 북적거렸으나 지금은 18명의 학생이 전부다. 그런데도 교사가 10명이나 되는 것은 모든 교과 과정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흑산초등학교 학생은 28명이고 교사는 12명이다.

흑산(黑山) 이름은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푸른 빛이 돌아 멀리서 보면 산과 바다가 모두 검게 보인다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풍광에서는 홍도에 밀리지만 홍도에는 없는 역사 흔적이 남아 있어 여행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흑산도 중심 마을은 흑산도 내해를 끼고 있는 섬 북쪽의 ‘예리’와 ‘진리’다. 예리는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마을이어서 흑산도의 관문 역할을 한다. 어선이 정박해 있고 식당과 횟집이 가득해 늘 북적인다. 진리는 학교, 교회, 성당 등이 모여 있는 흑산면 소재지여서 차분하다. 섬의 남쪽을 대표하는 마을은 사리마을이다. 북쪽의 예리와 진리가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라면, 남쪽의 사리는 특유의 정취와 푸근함이 느껴지는 어촌마을이다. 마을을 이어주는 것은 해안을 따라 섬 전역을 돌 수 있는 25㎞의 일주도로다.

흑산도 지도와 일주도로(붉은선)

 

■흑산도 일주 여행

홍도와 흑산도는 여행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홍도 여행의 백미가 유람선을 타고 해상 경관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흑산도 여행은 섬을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25㎞)를 따라 섬 안을 보는 것이다. 일주도로 공사는 흑산도 해안 지형 대부분이 바위인 탓에 26년이나 걸렸다. 1984년 공사를 시작해 1996년 끝내고 2010년 도로포장을 완성했다.

흑산도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여행하는 교통수단은 크게 네 가지다. 공영버스와 도보 혼용, 자전거, 관광택시, 단체관광버스다. 도보로 일주도로를 걸으면 7∼8시간 남짓 소요되므로 공영버스와 혼용하면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다. 공영버스는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예리에서 동쪽으로 하루 4회, 서쪽으로 10회 운행한다. 예리, 진리, 읍동, 마리, 비리, 곤촌, 심리, 암동, 사리, 소사리, 천촌리, 청촌리 등 12개 정류장을 거쳐간다. 일행이 3~4명이면 관광택시를 이용하는 게 좋다. 현지 지리에 밝은 기사가 가이드 역할을 겸하기 때문이다. 1시간 30분 남짓 소요되며 인원수에 관계없이 6만원을 받는다. 개인이 합승할 경우 비용은 1만5000원 정도다. 현재 흑산도에는 8대의 관광택시가 운행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급경사로 올라갈 정도의 체력이라면 자전거를 여객선에 싣고가는 것도 방법이다.

문제는 주마간산의 전형을 보여주는 단체관광투어다. 홍도와 패키지 여행을 선택한 단체투어 여행자들이 홍도에 집중하고 흑산도에 머무는 시간이 짧다보니 관광버스 기사가 숙제하듯 바삐 섬을 돌아 흑산도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우리도 단체투여여서 관광버스를 탔는데 1시간 남짓 주행하면서 딱 두 군데만 내려주어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정차해 흑산도의 속살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버스기사는 주행 내내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주절주절 혼자 이야기만 한다. 버스 좌석 오른쪽에 앉으면 그나마 바다가 보이지만 왼쪽에 앉으면 산 옆구리만 보이니 도무지 여행 맛을 느낄 수 없다.

결론은 개인 일정으로 흑산도를 다녀오거나 단체여행이라도 흑산도에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여행사를 선택해야 흑산도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객선 운행시간에 맞춰 2일차 12시부터 3일차 오후 4시까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렌트카가 절실하지만 흑산도에는 렌트카가 없으니 승용차를 배에 싣고 가는 것도 방법이다.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선 승용차를 싣고 가는 선박은 목포에서 압해대교를 건너 압해도 끝 지점에 있는 송공여객선터미널에서만 출발한다. 운송 비용이 편도 7만~8만원이나 되어 비경제적이다.

일주도로 중 하늘일주도로 구간(출처 신안군)

 

■일주도로 한 바퀴

흑산의 관문은 예리 흑산여객터미널이다.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아 일주도로 우측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이미자 노래 ‘흑산도 아가씨’ 동상과 노래비

일주도로를 따라 흑산도를 둘러보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이미자의 노래 ‘흑산도 아가씨’를 기념해 여객선터미널 북쪽 방파제 끝에 세워놓은 동상이다. 노래비는 앞으로 찾아갈 상라봉 전망대에 있다. 이미자가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흑산도 아가씨’를 음반으로 취입한 건 1967년 1월.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 /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 흑산도 아가씨” 가사로 된 노래가 히트를 치자 영화로도 만들어져 윤정희, 남진 주연 영화 ‘흑산도 아가씨’가 1969년 11월 개봉했다.

다만 노래가 탄생한 계기는 섬 아가씨의 절절한 사연을 노래한 가사와는 거리가 있다. 1965년 봄 작곡가 박춘석과 작사가 정두수가 스카라극장 맞은편 ‘카나리아 다방’에서 만났다. 박춘석이 정두수에게 동아일보를 들이밀었는데 사회면에 ‘흑산도 국민학교 어린이들의 소원 서울 수학여행 이루어지다’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었다. 거센 풍랑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한 흑산도 어린이들의 딱한 소식을 접한 육영수 여사가 해군 군함을 동원해서 서울 구경을 시켜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박춘석이 “노래를 만들어 이미자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자”고 제안한 게 ‘흑산도 아가씨’의 시작이다. 정두수는 어린이들 대신 흑산도가 주는 검은 섬의 이미지에다 그리움에 애타는 ‘여인의 한’을 떠올려 가사를 만들었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로 섬 주민들의 가슴을 적셨던 이미자는 정작 흑산도 땅을 밟지 않다가 노래를 세상에 발표한지 46년이 지난 2012년 9월에야 흑산도 땅을 밟았다. 그날 한 방송사 주최로 열린 흑산도 공연에서 이미자는 당연히 ‘흑산도 아가씨’를 불렀다. 그때 이미자의 방문을 계기로 동상이 세워지고 이미자가 두 손을 찍은 핸드프린팅이 노래비 앞에 놓여졌다.

‘흑산도 아가씨’ 동상과 기념비

 

▲신안철새전시관, 진리당

예리 서쪽 진리에 신안철새전시관이 있다. 3층으로 지어진 철근 콘크리트 건물 안에 조류표본 300개체와 실제 조류처럼 생생하게 만들어진 조류목각 15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가면올빼미, 흰배줄무늬수리 같은 국내 유일표본도 있다. 흑산권역이 철새 400여종, 30만여 마리가 동남아시아, 시베리아 등 수만킬로미터의 이동에 필요한 에너지 보충을 위해 잠시 쉬어가는 중간 기착지라는 것에 착안해 만들어졌다.

신안철새전시관을 우측으로 끼고 언덕길로 오르면 용왕굿을 통해 뱃길의 무사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던 진리당이 있다. 진리당은 상당(각시당)과 용신당 2개의 당집을 품고 있고 흑산도 15개 당집 가운데 본당의 지위를 갖고 있다. 각시당은 고기잡이 나갔다 죽은 남편을 따라 먼 바다가 보이는 노송에 목을 맸다는 설화 속의 각시를 기린다. 용신당은 당각시의 방해로 섬을 떠나지 못해 홀로 섬에서 피리를 불다가 죽은 총각을 기린다. 섬 주민들이 총각을 당각시 옆에 모시고, 용신으로 믿고 기원한 것이 용신당의 시작이다. 이곳의 전설은 과거 KBS TV 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에 흑산도 처녀당과 피리 부는 소년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진리당

 

상당은 두 겹의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돌담 오른쪽 숲길로 들어서면 500m 가량 탐방로가 이어진다. 아담한 숲터널을 따라 가면 150m 떨어진 용신당을 지나 진리해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용왕당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를 경유해 숲을 한 바퀴 도는 1㎞가 채 안되는 숲길은 잣밤나무와 소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워 흑산 최고 산책로로 꼽힌다. 숲에는 흑산도와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 초령목, 늙은 소나무, 신우대 등이 제법 깊은 숲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던 초령목 어미나무는 여러 해 전 고사하고 지금은 43그루의 어린나무가 주변에서 자라는 중이다. 초령목은 가지를 꺾어 불전에 놓으면 귀신을 부른다 해서 귀신나무로도 불린다. 그래서 섬 사람들은 진리당 주변을 ‘신들의 정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낭기미해변, 옥섬, 새조각공원, 무심사지

신들의 정원을 내려오면 모래 반 자갈 반으로 이루어진 배낭기미해변이다. 해변 주위에는 몽돌이 많다. 천연 파라솔 역할을 하는 해송도 자생한다. 배낭기미해변은 해수욕장이 귀한 흑산도에서 여름철 피서객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다. 자갈이 반쯤 섞인 백사장은 경사가 완만하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가족 단위로 많이 찾는다. 해변이 끝나는 지점 오른쪽에 조선시대 수군진이 들어왔을 때 감옥으로 쓰던 작은 섬이 있다. 감옥 ‘옥(獄)’자를 써 이름이 옥섬이다. 주황색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죄수들이 비바람을 피해 지낼 수 있는 2m 깊이의 동굴이 있다. 지금은 아무 흔적 없는 무인도에 불과하지만 나름 소중한 역사 유적이다.

옥섬(출처 신안군)

 

옥섬에서 가까운 해변에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새조각공원이 있다. 건물 안에는 흑산도 동박새와 세계의 조류목각 및 공예품 7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밖 넓은 부지에는 3척의 선박이 놓여있고,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수입한 ‘쇼나(Shona) 새 조각’ 310점이 480m 길이의 관람로에 배치되어 있다.

다음 코스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일주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상라봉 전망대다. 전망대로 올라가기 전,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진리당보다 더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무심사지(无心寺址)다. 뒤늦게 ‘무심사선원(无心寺禪院)’이라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이름을 찾게 된 무심사지에는 팽나무 노거수가 가지를 뻗고 있고 그 옆에 삼층석탑과 석등, 건물지의 축대 일부만이 남아있다. 팽나무로 인해 10° 정도 기울어진 석탑과 석등의 조성 연대는 고려초기로 추정한다. 흑산도에는 이 팽나무 말고도 볼만한 팽나무가 더 있다. 진리 흑산성당 옆에 자라는 연리지 팽나무다.

무심사지의 팽나무. 그 옆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출처 신안군)

 

▲열두구비길, 상라봉 전망대, 장도습지, 하늘도로, 심리

해변에서 속리산의 말티고개 보다 더 구불구불한 열두구비의 S자형 고갯길을 감돌아 오르면 끝지점이 상라봉 전망대다. 이곳에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있는데 6·25 참전기념탑만큼 거대하다. 전망대에서 가파른 계단길을 10분 정도 걸어 오르면 상라봉 정상(230m)인 봉화대가 있다. 흑산도 최고 조망처 답게 흑산도 내해와 구불구불 올라온 열두 구비길, 그리고 인근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홍도 모습이 흐릿하다. 봉화대 아래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상라산성’이 있다.

진리마을에서 상라봉 전망때까지 십이굽이길(출처 신안군)

 

봉화대에서 서쪽 방향으로 장도(흑산면 장도리)가 내려다보인다. 가까운 능선이 소장도이고, 뒤쪽 큰 섬이 대장도다. 대장도에는 해발 180~200m에 위치한 대규모 산지습지가 있다. 수 천 년 동안 완전히 썩지 않은 식물이 쌓인 층을 이탄층이라 하는데 장도에는 70∼80㎝ 깊이의 이탄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훼손되지 않은 습지와 숲에는 다수 생물종이 살고 있다. 특히 멸종위기종인 흰꼬리수리와, 수달, 흑산도비비추, 참달팽이 등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2005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 봉화대에서 바라보면 대장도 마을 지붕이 하나같이 주황색이다. 신안군청에서 컬러마케팅 사업을 한 결과물이다.

왼쪽부터 대장도 소장도 쥐머리섬 내망덕도. 저멀리 보이는 섬이 홍도다.
대장도 람사르습지(출처 신안군)

 

전망대에서 멀지 않은 마리재를 넘으면 흑산도서쪽이다. 전망대에서 심리마을까지 12㎞에 이르는 일주도로 구간은 줄곧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이어진다. 길은 해안을 끼고 이어지면서 작은 어촌마을을 차례로 지나간다. 마리에서 비리(잔듸미)를 가다가 일주도로에서 보면 영락없이 한반도를 닮은 지도바위가 보이고 곧이어 공중에 세워놓은 하늘도로가 나타난다. 해안절벽에 도저히 길을 내기가 어려워 절벽에 긴 말뚝을 가로로 박은 뒤, 그 위에 도로를 깔아 만들었다. 도로 옆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놓아 볼거리를 제공한다.

한반도 닯은 지도바위

 

곧이어 흑산도에서 가장 작은 마을 곤촌(곤듸미)을 지나면 심리(지푸미) 마을이다. 이 마을에 흑산도 아가씨 노래의 유래를 적은 벽화가 있다. 한적한 어촌마을의 정취도 볼만하고 해안도로 변에도 볼거리가 적지않다.

 

▲사리마을

흑산도의 동에서 서로 넘는 북쪽의 고개가 상라봉 열두구비길이라면,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서 서에서 동으로 넘는 흑산도 남쪽의 가파른 고개가 ‘한다령’이다. 고개를 넘으면 아담하고 가지런한 돌담(등록문화재 지정)과 포구가 정겨운 사리(모래미) 마을이다. 사리마을을 찾는 이유는 풍광도 풍광이지만 이곳에 유배되어 7년간 살다가 죽은 정약전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리마을. 가장 윗쪽이 사촌성당, 그 아래가 흑산성당 공소, 그 아래가 유배문화공원이다.(출처 신안군)
☞정약전

정약전(1758∼1816) 집안은 천주교를 믿은 죄로 1801년 신유박해 때 풍비박산이 났다. 정약전은 완도군 신지도로 유배되었고, 동생 정약종은 참수되어 순교했으며 막냇동생 정약용은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 설상가상 같은 해 가을 맏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 실상을 알리고 서양 선박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된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져 황사영은 참수되고 정약전·정약용 형제의 유배지는 더욱 멀어졌다. 형제는 1801년 나주 율정주막에서의 밤을 마지막으로 형 정약전은 신안군 우이도로 아우 정약용은 강진으로 갈라져 유배되었다. 형제는 이날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날 밤 정약용이 쓴 시가 ‘율정별(栗亭別)’이다.

정약전은 1807년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또다시 더 멀리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16년 유배 세월 동안 흑산도와 우이도만을 오갔을 뿐 끝내 뭍을 밟아보지 못하고 1816년 우이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배 생활 중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연구서인 ‘자산어보(玆山魚譜)’을 1814년 펴냈다. 서문에 “흑산이라는 이름은 검고 어두워서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집안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이라 쓰곤 했다. 자(玆)는 흑(黑)과 같은 뜻이다”라고 해 자산의 유래를 밝혔다.

 

☞사촌서당(복성재)

정약전은 사리마을에 정한 거주지를 복성재라 불렀다. 천주교를 버리고 성리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복성재는 서당 역할도 해 사촌서당으로 불렸다. 정약전은 사촌서당에서 자산어보 외 여러 책을 쓰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복원된 사촌서당 현판에는 사촌의 한자를 ‘沙村’이 아닌 ‘沙邨’이라 적혀있다. 마을 촌(邨) 자를 ‘둔’이라 잘못 읽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훈과 독음이 ‘마을 촌(村)’ 자와 똑같다. 자산어보를 지을 때 ‘검을 흑(黑)’ 자를 쓰는 ‘흑산(黑山)’이 아니라 ‘검을 자(玆)’ 자를 써서 ‘자산(玆山)’으로 바꿔 제목을 붙인 경우와 비슷하다.

사촌성당(출처 신안군)

 

☞유배문화공원

사촌서당 아래에는 흑산성당 사리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가 있다. 그 아래에 흑산도 유배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조성한 유배문화공원이 있다. 흑산도 유배인 도표에는 1148년 고려 의종 때의 정수개부터 1693년 해괴한 짓을 했다는 나인 정숙, 1898년 김홍록 뇌물수수까지 여러 유배인들과 유배 이유가 적혀있고 개인별로 행적비가 세워져 있다. 유배인 중에는 당쟁에 휘말리거나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유배 온 경우도 있지만, 정감록을 유포한다는 죄목으로 유배 온 승려도 있고, 임금의 옷을 도둑질하다 걸려서 온 경우도 있으며, 횡령에 얽혀 유배된 관료도 있다. 기록으로 확인된 흑산도 유배인은 135명 정도다. 공원에는 ‘위리안치(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가두는 유배형)’나 ‘절도안치(외딴 섬에 가두는 유배형)’ 등 유배형의 종류에서 이름을 딴 관광객용 숙소도 세워져 있다. 외관은 한옥이지만 내부는 현대식이다. 유배 역사를 되살린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유배문화공원(출처 신안군)

 

☞칠형제 바위

사리마을은 동남풍이 불어도 배들이 정박할 수 있다. 사리 포구 앞에 7개의 작은 섬들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엔 전설이 있다. 옛날 홀어머니와 7형제가 물질을 하며 살았는데 큰 태풍이 와 어머니가 물질을 못나가자 아들 7형제가 하나 둘씩 들어가 두 팔을 벌려 파도를 막아 7개의 작은 섬으로 굳어버렸다는 전설이다. 그후 7개 섬을 7형제 바위로 불리게 되었는데 7형제바위 전경은 사리 마을을 지나 고개로 오르면 사리 방파제와 함께 내려다 볼 수 있다.

칠형제바위(출처 신안군)

 

■최익현

사리마을을 지나 동쪽 해안을 따라가면 소사리(잔모래미), 천촌(여티미), 청촌(청재미)마을이 나온다. 천촌마을에는 1876년 1월 병자수호조약 불가상소를 했다는 이유로 흑산도로 3년간 유배 온 최익현의 유허비가 있다. 비석 뒤 바위벽에 ‘기봉강산(箕封江山) 홍무일월(洪武日月)’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중국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봉한 땅이며, 명나라 주원장의 세월’이란 뜻이다.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인데, 감히 일본이 넘보느냐는 얘기인데 위정척사와 의병운동의 서릿발 같은 최익현의 기개는 감탄스럽지만, 뿌리깊은 사대는 시대 상황이 그러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최익현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6월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창에서 관군에 포위되자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포기해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일본 쓰시마로 압송된 최익현은 그곳에서 “적이 주는 음식에는 입을 댈 수 없다”며 4일 간의 단식 후 풍토병에 걸려 1907년 1월 1일 대마도에서 눈을 감았다.

최익현 유허비

 

■흑산성당

흑산도에 성당과 공소가 세워진 것은 정약전이 유배된 지 15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천주교 공소는 1957년 흑산도 사리마을에, 흑산성당은 1958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진리마을 언덕에 세워졌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흑산성당은 외형이 독특하다. 섬에서 나는 몽돌을 건축 재료로 사용한 덕에 정겨움도 남다르다. 성당 오르는 길은 그 자체로 전시관이다. ‘십자가의 길’이라 이름 붙은 이곳에는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형을 받은 후 십자가에 오르기까지 14처를 조각으로 형상화했다. 검은 조각품 끝에는 하얀 예수상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회색빛 다양한 빛깔로 실내 곳곳을 비추는 스테인드글라스도 아름답다. 흑산성당 옆에는 두 그루의 팽나무 노거수가 있는데 위쪽이 붙은 연리지다.

흑산성당 앞에는 흑산도에서 가장 번듯하고 최고층 건물(5층)인 흑산문화관광호텔이 서 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 운영, 천주교 신도 연수공간(피정의 집)과 관광객을 위한 숙박·회의·편의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흑산성당

 

■칠락산

흑산도 최고봉은 문암산(405m)이다. 하지만 군사시설이 있어 칠락산(252m)이 흑산도의 정상 역할을 한다. 예리항에서 바라보면 7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객선터미널에서 도로를 따라 800m를 오르면 샘골 등산로 입구에 닿는다. 여기서 칠락산을 종주해 마리재로 하산한 후 상라산 정상에 올랐다가, 열두굽이 도로 따라 진리를 거쳐 여객선터미널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길은 전반적으로 뚜렷하고 이정표와 계단이 있어 어렵거나 위험하지 않다. 칠락산 도착 전 302m봉과 277m봉을 정상으로 혼돈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표지석은 칠락산 정상에만 있으므로 구분이 어렵지 않다. 표지석에는 ‘칠락산은 어머니의 산’이란 글귀가 적혀 있다. 정상에 오르면 바로 아래로 흑산도 진리항과 예리항이 내려다 보인다. 능선 따라 종주하면 5.2㎞ 거리다.

 

■흑산도 홍어

흑산도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흑산도 홍어다. 이곳 홍어는 찰지고 부드러워 예로부터 최상품으로 쳤다. 본래 흑산도 사람들은 홍어를 삭히지 않은 날것으로 먹었는데 흑산도를 떠나 목포와 영산포를 통해 나주와 광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삭혀지면서 호남 지역 대표 음식이 되었다. 흑산도는 오랫동안 국산 홍어 전체 어획량의 80~90%를 차지할 만큼 홍어의 본고장 대접을 받았으나 바닷물 온도가 오르면서 난류성 어종인 홍어 서식지가 북쪽으로 이동했다. 요즘은 전북 군산 앞바다에서 홍어가 더 많이 잡힌다. 전국 어획량의 45% 수준으로, 흑산도가 있는 신안군보다 3배가량 많다고 한다. MBC TV 드라마 ‘대장금’(2003~2004년)에는 마지못해 홍어를 처음 먹은 주인공 장금이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꾸 씹으니 맛이 납니다. 육질도 차지고 처음엔 코끝이 찡하고 다음엔 입안이 상쾌하고 그 뒤끝의 맛은 청량합니다.”

흑산문화관광호텔에 짐을 풀고 날이 어두워지자 무료했다. 해서 멀지 않은 선착장의 ‘흑산시장 먹거리촌’을 찾아가 골목 안 이집저집을 기웃거리다가 한 집에 들어갔는데 홍어 한 접시에 3~5만원을 받는다. 평소 삭힌 홍어를 좋아하지만 날것 밖에 없어서 별 기대 없이 맛만 볼 생각으로 3만원짜리 한 접시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찰지고 부드럽다. 홍어의 재발견이다. 옆 테이블에서 10여명의 여행객들이 홍어 잔치를 벌이고 있어 물어봤더니 한 마리 50만원짜리 홍어를 통째로 산 것이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나중에는 애탕이 남았다며 주는데 식어 버려 내가 좋아하던 그 애탕맛이 아니었다. 애탕은 역시 뜨거울 때 먹어야 입천장에서 반응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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