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테드 터너, 24시간 내내 뉴스만 생방송하는 CNN 개국

↑ 테드 터너가 CNN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서 있다.

 

뉴스 개념을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바꿔버려

세계 최초로 24시간 생방송 뉴스를 추구하는 CNN(Cable News Network)이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낡아빠진 2층 건물에서 마침내 첫 방송을 내보낸 것은 1980년 6월 1일이었다. CNN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세계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긴 TV 보도의 새 지평으로 평가를 받게 되지만 방송이 시작되기 전 주변의 시선은 온통 비판과 우려 일색이었다. 하지만 CNN에는 일단 결심이 서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사업가 테드 터너(1938~ )가 있었다.

터너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브라운대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 고전문학을 전공하려는 그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학비를 대주지 않아 결국 학교는 중퇴했다. 이후 아버지의 광고회사에서 사업을 배우다가 1963년 3월 아버지가 돌연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해 25살의 나이에 사업을 물려받았다. 터너는 수년 만에 회사를 동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광고회사로 키워 사업 능력을 인정받았다.

터너가 방송계에 뛰어든 것은 남부 지역의 라디오 방송국을 인수한 1960년대 후반이었다. 1970년에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UHF 방식의 TV 방송국 두 곳을 인수, TV에도 진출했다. 터너는 TV방송국에서 옛 영화, 드라마, 극장용 카툰 등을 방송하며 자리를 잡았다. 1976년에는 프로그램 부족으로 허덕이던 미 전역의 케이블방송에 통신위성을 이용해 영화와 스포츠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방식으로 방송국(WTBS)의 규모를 키웠다. 1976년과 1977년 각각 인수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야구팀과 애틀랜타 호크스 농구팀의 경기도 독점 중계해 입지를 넓혀나갔다.

터너는 CBS, NBC, ABC 등 미 전역을 커버하는 3대 지상파 방송에 필적하는 대규모 방송사를 꿈꿨으나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24시간 내내 뉴스만을 보도하는 케이블방송이었다. 통신위성 중계료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에 지상파처럼 장비도 인력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금이 부족하고 방송 경험이 적어 성공은커녕 개국도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 여기에 전국적으로 14%에 불과한 케이블TV의 보급률, 정치․경제 중심지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 남부 지역의 애틀랜타에 본사를 둔 위치 선정 등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터너는 이처럼 주변의 불안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980년 6월 방송을 강행했다. 예상대로 난관의 연속이었다. 대통령의 풀 취재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유력 인사들로부터 인터뷰를 거절당하는 등 무시와 냉대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개국 첫해는 적자를 기록했다.

 

걸프전은 CNN 성공의 일등공신

터너는 끊임없이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 시청자들도 서서히 CNN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레이건 대통령 저격(1981.3), TWA 여객기 공중납치(1985.6) 등 특종 행진을 이어가던 CNN의 성가가 한껏 높아진 것은 1986년 1월 생방송으로 보도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공중폭발 사건이었다. 천안문 사태(1989.6), 미국의 파나마 침공(1989.12) 등도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보도하면서 CNN은 전 세계의 뉴스 채널로 자리를 잡았다.

CNN이 ‘지구촌 뉴스의 열쇠’로 자리를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991년의 걸프전이었다. 전 세계인들은 CNN 덕에 마치 영화를 보듯 안방 소파에서 느긋이 전쟁을 지켜볼 수 있었다. 걸프전에서 미국의 폭탄이 이라크를 초토화했다면 CNN은 전파로 전 세계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1991년 말 미국의 ‘타임’지가, 걸프전의 영웅 슈워츠코프가 아닌 터너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것도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일련의 대형 사건․사고 덕에 CNN은 ‘지구촌의 대표 방송국’으로 부상하고 뉴스의 개념을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바꿔버렸다.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시청자들이 신속하고 정확한 뉴스를 보기 위해 CNN을 찾는 현상을 일컫는 ‘CNN 효과’란 신조어도 유행했다.

터너는 CNN의 모회사인 WTBS를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미디어 제국으로 키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미국 내 전국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지상파방송이 반드시 필요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CBS와 NBC의 인수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결국 터너는 1986년 3월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제작·배급회사인 MGM을 인수하는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1990년대 중반 이런 터너에게 ‘타임워너’ 소유주 제럴드 레빈이 타임워너와 CNN의 합병을 요청했다. 그것은 타임워너의 최대주주(10%)로만 존재할 뿐 경영권을 상실하는 제안이었다. 그런데도 터너는 WTBS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규모를 키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합병에 동의했다. 합병 사실은 1995년 9월 공표되었다. 1996년 7월 공식적인 합병 후 터너는 CNN을 포함해 자신의 모든 케이블방송의 경영권을 타임워너에 넘기고 2인자로 물러났다. 합병 효과는 즉각 주가에 반영되었다. 터너의 주식 가치도 9개월 만에 22억 달러에서 32억 달러로 치솟았다.

 

잘못된 매각 결정으로 CNN 통제권 포기

터너가 경영에서 손을 뗀 사이 CNN은 새로운 강자들과 힘겨운 경쟁을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NBC가 합작한 MSNBC(1996.7), ‘미디어 제왕’ 루퍼트 머독이 설립한 ‘폭스뉴스’(1996.10)가 24시간 뉴스를 표방하며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CNN은 그래도 한동안 독주를 계속했으나 2002년 각각 우파와 좌파 시청자를 잠식한 폭스뉴스와 MSNBC에 덜미를 잡혀 선두 자리를 빼앗겼다. ‘밋밋한 논조’와 자국민들의 국제 뉴스에 대한 무관심도 주요 원인이었다.

합병에 재미를 붙인 타임워너는 2000년 1월 대형 인터넷 그룹인 AOL(아메리카 온라인)과 미 기업사상 최대 규모의 합병을 성사시켰다. 터너의 직책은 실권이 없는 부회장 그대로이고 주식 지분은 10%(타임워너)에서 4%(AOL․타임워너)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최대주주였다. 이번에도 주가가 급등한 덕에 터너의 주식 평가액은 100억 달러 정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닷컴 거품이 꺼지면서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터너의 주식 가치도 2년 반 만에 100억 달러에서 2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터너는 자신이 회사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2003년 1월 AOL․타임워너 부회장직을 사임했다. 틈틈이 매각하던 주식도 2003년 8월에는 모두 팔아치웠다. 결국 터너는 잘못된 매각 결정으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CNN에 대한 통제권은 물론 미디어 제국을 이루려던 꿈까지 포기해야 했다.

터너는 사생활에서도 기인에 가까운 언행으로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1989년 영화배우 제인 폰다가 이혼 발표를 하는 텔레비전 기자회견을 보고 있다가 곧바로 폰다에게 전화를 걸어 데이트를 신청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똑같이 2번의 이혼 경력이 있던 두 사람은 1991년 결혼하고 2001년 이혼했다.

터너는 199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땅을 매입하기 시작해 10년 만에 미국 최고의 땅부자가 되었다. 2000년 기준, 그가 사들인 땅은 8093㎢(약 24억 4800만 평)로, 남한 면적(9만 9720㎢)의 8.1%나 되는 엄청난 땅이다. 이곳에서는 4만 마리의 들소가 방목되고 있다. 터너는 땅을 매입하면서 국제자연보호협회와 자연보존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도 개발되지 않고 보존될 가능성이 높다. 터너는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고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가 하면, 아동․여성․환경보호활동 등을 지원하는 데 유엔에 매년 1억 달러씩 모두 10억 달러를 쾌척한 가슴 따뜻한 부자이기도 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