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란․콘트라 사건, 수 년간 미국 떠들썩하게 해

↑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

 

콘트라 반군, 치고 빠지는 전법 구사하며 내전 벌여

1986년 10월 니카라과 정부군이 수송기 1대를 격추했다. 생포된 생존자들은 “우리는 미 CIA에 고용된 사람들로 니카라과 좌익 정부를 전복하려는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할 군수물자를 싣고 가던 중이었다”고 실토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1986년 11월 레바논의 한 잡지에 미국과 이란이 무기와 인질을 맞교환했다는 의혹 기사가 실리면서 수 년간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이란․콘트라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스페인어로 ‘대항자’라는 뜻의 ‘콘트라 반군’은 1979년 소모사 우익독재정권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에 쫓겨나고 니카라과에 좌익 정권이 들어섰을 때 소모사 정권의 직업 군인들이 인근 온두라스로 피신해 1981년 8월 조직한 ‘니카라과 민주세력(FDN)’의 후신이다.

콘트라 반군은 당시 온두라스 주재 미국 대사의 지휘 아래 미 CIA로부터 군사 훈련과 자금 지원을 받으며 산디니스타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미국은 니카라과가 쿠바처럼 자국의 앞마당 격인 중미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될 것을 우려해 콘트라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서 니카라과 정부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국경 지대에 본부를 차린 약 1만 2000명 규모의 콘트라 반군은 산디니스타 정권을 상대로 니카라과를 침범했다가 온두라스로 도망가는 식의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며 내전을 벌였다. 그러나 콘트라 반군은 소모사 독재 하의 끔찍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니카라과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해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6년 11월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져 유일한 지원 창구인 미국마저 드러내놓고 지원할 처지가 못 되자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미국에서 ‘이란․콘트라 사건’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테러집단과는 절대로 흥정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온 것과 달리 이란에 인질로 잡혀 있는 미국인들의 석방을 위해 이란과 뒷거래를 해온 레이건 정부의 위선적인 이중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 의회가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콘트라 반군 지원’을 어겼다는 불법성이었다.

 

“누가 지시했고 어느 선까지 알고 있느냐”에 관심 집중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기 전, 레이건 대통령은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하나는 1984년 초부터 친이란계 레바논 회교 테러단체에 붙잡혀 있는 7명의 미국인 인질을 데려오라는 국민의 압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소 자신이 ‘자유의 투사’라고 치켜세워온 콘트라 반군을 지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그런데 1984년 미 의회가 제정한 ‘볼랜드 수정법’은 미 정부가 어떠한 경우에도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놓고 있었다. 레이건 정부는 의회의 감시를 벗어나 콘트라를 지원할 수 있는 변칙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그것은 인질 석방과 콘트라 지원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안이었다. 즉 레바논의 납치범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이란에 미국의 무기를 파는 조건으로 인질들을 석방시키고, 무기 판매대금으로는 콘트라를 지원한다는 복안이었다.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미국의 첨단 무기가 절실했던 이란으로서도 솔깃한 제안이었다. 이스라엘의 중재로 1985년 7월 미국의 토(Tow) 대전차 미사일 수백 기를 이란에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다량의 무기가 비밀리에 이란으로 흘러들어 갔다. 무기 판매대금의 일부는 당초 계획대로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1985년 12월까지는 로버트 맥팔레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관여하다가 그 뒤로는 후임 국가안보보좌관 존 포인덱스터 제독과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올리버 노스 해군 중령이 개입했다.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사건의 실체가 하나둘 드러나면서 이 불법적인 행위를 “누가 지시했고 어느 선까지 알고 있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파문이 확산되자 1986년 11월 13일 레이건 대통령이 무기 판매를 시인했다. 다만 이란의 온건파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 위해 소량의 무기를 제공한 것일 뿐 인질 석방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11월 25일 에드윈 미즈 법무장관이 포인덱스터와 노스가 비밀공작의 주역이라며 노스 중령을 해임하고 포인덱스터는 사임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추가 조사가 불가피해졌다. 레이건 대통령은 계속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11월 25일 국가안보회의를 정밀조사하기 위한 ‘타워 특별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레이건 정부의 이중성과 불법성 드러내

미 의회가 1986년 12월 상하원 특별조사위를 구성해 청문회를 열고, 미 연방특별법원도 로런스 월시를 미 역사상 7번째 특별검사로 임명함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곧 드러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스 중령이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수정헌법 제5조를 들어 묵비권으로 일관하고 일부에서 문서를 파기하는 등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면서 조사는 난항을 겪었다.

레이건은 1987년 3월 4일 무기 밀매와 대금 불법 전용에 대해 자신의 실수라고 인정했다가 다시 “사전 승인 → 사후 인지 → 기억나지 않는다” 등으로 말을 바꿔가며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다행히 사건 발생 7개월 만에 입을 뗀 포인덱스터가 “무기 대금 불법 전용은 혼자 한 일”이라고 스스로 덮어쓴 덕에 레이건은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사 결과, NSC가 이란과 니카라과에 대한 정책을 비밀리에 수행하고도 의회에는 위증한 것으로 밝혀져 포인덱스터, 노스, 맥팔레인 등은 위증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노스 중령은 재판 과정에서 “호메이니의 주머니를 털어 니카라과 투사를 도운 것이 뭐가 잘못이냐”며 당당한 태도를 보여 일약 국가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결국 대부분의 사건 연루자는 기소만 되었을 뿐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다. 슐츠 국무장관, 와인버거 국방장관 등도 1992년 12월 조지 부시 후임 대통령의 사면 덕에 거리를 활보했다.

그러나 레이건만은 1990년 2월 LA지법에 출두하는 등 퇴임 후까지 수모를 겪었다. 미 대통령이 재임 중 공무와 관련해 법정 증인으로 나선 것은 레이건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레이건은 임기를 다 채워 역사적으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되었고 노스는 부와 명예를 얻었다.

월시 특별검사는 1994년 1월 18일 최종 조사보고서를 통해 “레이건 전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해 실정법을 위반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으나 보좌관들로 하여금 레바논에 억류된 미 인질 석방을 위해 이란에 무기를 몰래 팔고 그 이익금을 콘트라에 지원토록 부추겨 이들의 불법행위를 가능케 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콘트라는 1990년 2월 니카라과 대통령선거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야당연합의 비올레타 차모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해체압력을 받았다. 존재 명분이 사라진 데다 산디니스타 정권을 이끌었던 오르테가 대통령이 콘트라가 있는 한 정권이양을 순조롭게 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콘트라는 차모로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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