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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거문도 가이드 2-②] 녹산등대 초원길, 영국군 묘지, 회양봉 둘레길… 부드러운 억새 능선이 해안절벽 위에 펼쳐지고 영국군 묘지는 구한말 우리의 실상을 증언

↑ 동도에서 바라본 거문대교와 해안절벽 위 녹산등대 능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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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거문도의 절경은 불탄봉~기와집몰랑~거문도등대 능선에 널려있다. 능선은 사실상 산행 구간이어서 여행·관광 구간을 따로 떼내 소개한다. 서도의 녹산등대 초원길, 고도의 영국군 묘지와 회양봉 둘레길 등이 그것이다.

녹산등대 (왼쪽 사진 출처 거문도섬호텔)

 

■녹산등대 능선길

 

▲녹산등대 가는 교통편

녹산등대는 서도 북쪽 끄트머리에 홀로 서 있는 무인 등대다. 그 등대를 만나러 가는 출발지는 두 곳이다. 한 곳은 녹산등대 버스정류장(A)이고 다른 한 곳은 서도리 선착장에서 가까운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B)다. 고도에서 하루 6차례 출발하는 마을버스가 10분이면 두 곳 모두 정차한다. 두 곳은 마을버스로 한 정거장 떨어져 있고 도로를 따라 걸어가도 10분 거리여서 출발지와 도착지로 다르게 설정해도 별 무리는 없다. 나는 A로 올라가 B로 내려왔다. 쉬엄쉬엄 걸어가도 1시간~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녹산등대 버스정류장은 거문대교 건너기 바로 전에 있다. 거문대교는 560m의 사장교다. 고도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데 잔꾀가 떠올랐다. 녹산등대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고 그곳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종점(동도 죽촌)까지 갔다가 버스가 회차할 때까지 10분 동안 죽촌 일대를 둘러본 뒤 다시 버스를 타고 되돌아오다가 거문대교를 건너기 전 버스에서 내려 거문대교 위를 걸어가며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눈에 담고, 멀리 보이는 녹산등대와 절벽 위 능선길을 조망하자는 생각이었다. 동도 쪽 거문대교 끝 지점은 정류장이 아니어서 정차할 수 없으나 다행히 친절한 기사를 만난 덕에 내릴 수 있었다.

거문대교 (출처 거문도섬호텔)

 

동도에서 서도로 이어진 거문대교 위를 건너는 맛은 기대 이상으로 호쾌했다. 다리 위 중간중간에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전망대가 있어 그곳에서 양쪽 바다를 바라보는 맛도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녹산등대로 이어진 능선길과 그 아래 해안절벽, 그리고 그 너머 망망대해까지 한 눈에 들어와 여행의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녹산등대 초원길

거문도등대가 섬의 남쪽 끝에서 우리 영토를 수호하는 선봉장이라면 녹산등대는 한반도에서 거문도로 내려오는 바닷길을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녹산등대로 가는 초원길 들머리는 녹산등대 버스정류장(A) 바로 앞에 있다. 능선 위 쪽으로 굵은 각목 계단이 놓여있고 계단 위에는 억새와 동백나무가 무성하다. 계단으로 올라가 야자수 매트길과 목책으로 조성된 호젓한 능선을 몇분 정도 걸어가니 조금전 건너온 거문대교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제법 세련된 모습이다.

조금 더 진행하면 멀리 순백색의 녹산등대가 전면으로 보이고 왼쪽으로는 서도의 장촌 마을과 서도리 선착장이 내려다보인다. 어설프긴 하지만 현대식 건물로 만들어진 전망대도 있다. 그곳에 올라 바라보면 녹산등대까지 이어진 목책길이 억새밭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데 길게 늘어진 뱀꼬리 같다. 뒤이어 억새와 초지(草地)로 이뤄진 부드러운 능선이 해안절벽 위에 펼쳐지고 초지 사이로 이리저리 휘어진 길이 등대까지 이어진다. 녹산등대 초원길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녹산등대 가는길

 

녹산등대 가는 길 풍경과 분위기는 거문도등대와는 사뭇 다르다. 거문도등대 가는 길이 동백꽃과 어우러진 절경의 길이라면 녹산등대 가는 길은 바다를 옆에 두고 초지로 이뤄진 부드러운 능선을 걷는 초원길이다. 들머리에서 그 길을 따라 20분 정도 가니 인어해양공원이다. 말이 공원이지, 나무데크 전망대와 초승달에 앉아있는 ‘신지끼’ 인어상이 전부다. 신지끼 인어는 거문도 일대에서 전설로 전해오는 인어다. 인어는 큰 풍랑이 일어나기 전, 밤이나 새벽에 나타나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는 것으로 주민들에게 위험을 알렸다고 한다. 이를테면 인어 등대인 셈이다.

녹산등대는 신지끼 인어동상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다가가니 거문도등대처럼 거대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먼곳에서 바라본 느낌과는 달리 살짝 썰렁하다. 돌아가는 길은 녹산등대에서 내려와 인어해양공원으로 가기 전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간다. 그러면 돌담과 해풍쑥밭을 지나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B)를 거쳐 버스정류장이 있는 서도리 선착장에 닿는다. 녹산등대에서 1㎞ 거리다.

신지끼 인어 동상

 

 

■고도 영국군 묘지와 회양봉 둘레길

고도는 작은 섬인데도 역사공원이 있다. 1885년 ‘거문도 사건’의 산물이다. 거문도 사건이 있었기에 거문도에 영국군 진지가 들어서고 주둔 기간이 길어졌기에 영국군 사망자가 생겨 역사공원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거문도 사건

이른바 ‘거문도 사건’은 19세기말 러시아와 각축전을 벌이던 영국 해군이 1885년 4월 15일 군함 6척과 수송선 2척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을 일컫는다. 영국 정부는 이틀 뒤 청과 일본 정부에 이 사실을 알렸으나 당사자인 조선 조정에는 한 달도 더 지난 5월 말 통보했다. 그때까지 조선 조정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영국 해군 지도에서 거문도는 ‘Port Hamilton(포트 해밀턴)’이었다.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기 40년 전인 1845년 영국 해군 사마랑호가 제주도에서 거문도에 이르는 해역을 1개월간 탐사하고 돌아가 1848년 ‘사마랑호 항해기’를 출판하면서 거문도 이름을 ‘포트 해밀턴’으로 등재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이다.

뒤늦게 거문도 사건을 알게된 조선 조정은 거문도에 주둔 중인 영국군에 항의하고 주한 영국, 독일, 청, 일본 공사에게 불법임을 알리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도에 군대 막사를 짓고 병사 수를 늘리고 항만 공사를 강행해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그때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 테니스 코트와 당구장이다.

영국군은 700∼800명까지 늘어났는데도 거문도 주민과의 마찰은 거의 없었다. 주민과의 갈등이나 콜레라, 천연두 등 감염병 전파 등을 우려해 엄격한 교류금지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공사를 시키거나 신세를 질 때는 품삯을 지불했다. 물론 영국군의 유화 전략이었지만 조선 왕조 하에서 강제 부역에만 종사했던 섬 주민들은 이를 고맙게 여겼다. 일본 상인들도 재빠르게 거문도에 들어와 유곽을 만들었다. 지금도 섬 곳곳에 남아있는 일본식 여관과 신사 터 등은 그때의 흔적이다. 영국군은 1887년 2월 28일 철수했다. 이로써 거문도 사건도 23개월만에 막을 내렸다.

 

▲영국군 묘지

거문도역사공원은 영국군 묘지 위주의 역사공원이다. 고도항 옆 도로의 한 전봇대 위에 ‘거문도역사공원(영국군묘)’이라는 안내판이 있으나 찾아가려면 복잡하니 주민들한테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마을 골목길을 지나 10분 정도 언덕으로 올라가니 산 중턱에 ‘해밀턴 테니스장’이 올려다 보인다. 영국군이 남긴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우리나라 첫 테니스장이라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현대식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테니스장에서 내려와 둘레길 수준의 길을 수백미터 진행하니 영국군 묘지다. 고도 여객선터미널에서 0.6㎞를 지나왔고 고도 최고봉인 회양봉 전망대로 가려면 0.7㎞ 더 가야한다. 길은 걷기 편하도록 잘 닦여 있다. 묘지로 가는 중간에 대나무의 일종인 시누대 군락도 있고 바닷가 쪽 200m 아래에 ‘케이블 육양지점’이 있다는 안내표시도 있다. ‘케이블 육양지점’이 궁금했으나 당장의 목적지가 영국군 묘지여서 먼저 묘지를 둘러보고 난 뒤 다녀올 생각이다.

영국군 묘지는 양지바른 산중턱에 조성되어 있다. 주한영국대사관이 한영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1983년 세웠다. 따사로운 햇볕 덕에 주변의 여러 동백나무가 명징하고 붉은 동백꽃을 피우고 있다. 묘역에는 화강암 묘비와 나무십자가가 있다. 화강암은 1886년 6월 폭발사고로 하루 이틀 사이에 죽은 2명의 수병 이름을 새긴 묘비이고, 나무십자가는 1903년 10월 사망한 수병의 묘비다. 영국 해군은 1887년 거문도를 떠난 뒤에도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까지 거문도를 드나들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 수병이 10명 정도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었으나 나머지 7명의 묘지는 알 길이 없다.

영국군 묘지. 화강암 묘비 사이에 나무십자가가 있다

 

▲회양봉 둘레길

영국군 묘지를 보러갈 때만 해도 고도에 둘레길과 전망대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영국군 묘지 부근에 ‘회양봉 전망대 0.6㎞’ 안내표시가 있어 어떤 길인가 궁금해졌다. 올라가보니 고도 최고봉인 회양봉(108m)을 경유하는 둘레길이었다. 여객선터미널을 기준할 때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전체 거리는 1.8㎞다. 천천히 걸으면 1시간 정도 걸린다.

거문도 고도 모습

 

영국군묘지에서 회양봉을 향해 능선으로 올라가니 고도와 서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동도 남쪽 해안절벽이 길게 이어져있다. 회양봉 능선길은 낮은키의 돌축대가 가지런하고 동백나무가 꽃을 피운 흙길이어서 걷기에 편하다. 회양봉 전망대는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다. 올라서면 서도와 동도 그리고 그 안쪽의 도내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를 지나면 하산길이다.

전망대 아래 300미터 지점에서 뭔가 진한 향기가 느껴진다. 어떤 후손이 크게 조성한 쌍봉 묘지였는데 묘지 사방에 한때는 거문도에서만 자생했던 단아하고 깔끔한 수선화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수월산 거문도등대 주변이 수선화로 유명하지만 막상 찾아갔을 때는 그리 많지 않아 약간 실망했는데 이곳 수선화는 묘지 안팎과 돌담에 무리지어 꽃을 피우고 있어 너무나 반가웠다.

회양봉 둘레길(왼쪽)과 묘지에 무리지어 피는 수선화

 

▲해저케이블 육양지점

둘레길에서 내려와 해저케이블 육양지점을 찾아갔다. 고도항에서는 남쪽 해변을 따라 200미터만 가면 된다. 장소는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길 막다른 곳에 공장(나중에 알고보니 생활쓰레기 처리장)이 가로막고 있어 잠시 헷갈렸으나 공장 정문 왼쪽으로 길이 나 있고 길 끝에 표지석과 함께 낡고 녹슨 해저케이블이 실물로 설치되어 있다.

그곳 설명문에 따르면,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1885년 중국 상해까지 포설된 해저케이블인데 우리나라에서는 2번째로 육양된 전기통신시설이란다. 일본의 사세보에서 중국의 대련까지 포설된 해저케이블도 1904년 이곳에서 직접 육양되었다며 거문도가 울릉도와 함께 극동의 통신 요충지였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육양’과 ‘포설’이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육양의 한자는 陸揚이고 ‘물 속에 잠겨 있는 물건을 뭍으로 건져 올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충은 이해했는데 전기통신 분야 문외한에게 ‘포설’은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는다.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어렵다. 좀 쉽게 설명해주면 좋으련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게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현실이다.

해저케이블 육양지점

 

■동도

동도는 거문도를 구성하는 3개 섬 중 가장 낙후된 섬이다. 볼거리도 많지 않아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개발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다보니 이곳 주민들 대부분은 이 지역 토박이다. 동도에서 최고봉은 망향산(246m)으로 거문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높다. 망향산에 올라갔다는 블로그가 간혹 보여 읽어봤지만 호기심을 자극하진 않는다.

동도에는 유촌과 죽촌 2개 마을이 있다. ‘죽촌’은 마을 주위에 대나무가 무성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유촌(抽村)’은 유자나무가 많은 것에서 유래한다. 유촌에는 귤은 김유(1814~1884)를 모신 귤은사당이 있다. 1904년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김유는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한 명인 기정진 밑에서 수학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평생 고향인 거문도와 청산도 등에서 야인으로 살며 선배인 김양록과 함께 제자를 가르쳤다. 소문을 듣고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던 제자들이 멀리 영암, 장성, 완도 등지에서 모여들었다고 한다. 김유가 40세이던 1854년 4월, 푸차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에 기항했다. 김유는 김양록과 함께 러시아 함선에 올라 필담을 나누었다. 김유가 당시 상황을 기록한 글이 ‘해상기문(海上奇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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