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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용머리해안… 물결치는 듯한 곡선의 기괴한 암벽이 해안가에 600m나 이어지니 탄성이 도무지 그치질 않더군요

↑ 용머리해안 일부

 

by 김지지

 

■용머리 해안

 

탐방객에게 용머리해안과 산방산은 사실상 한 몸이다. 용머리해안이 산방산 바로 아래 해변에 있고 행정 주소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로 같기 때문이다. 다만 선호도를 따지면 용머리해안은 필수 코스이고 산방산은 선택 코스다.

100만년 전이었다. 용머리해안 부근 얕은 바다에서 강력한 화산폭발이 시차를 두고 세 차례 일어났다. 그때마다 분화구에서 터져나온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해변에 쌓여 지층을 만들었다. 그 지층이 다시 수만 년 동안 파도와 바람에 쓸리고 깎인 모습이 지금의 용머리해안이다. 지층은 언뜻 모래가 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뜨거운 마그마가 지하에서 상승하다가 차가운 지하수를 만나서 발생한 강력한 화산폭발작용이 일어나고 그 결과 마그마와 주변 물질이 모래 같은 가루가 되어 쌓인 것이다. 이 때문에 용암에 비해 쉽게 부서지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산방산에서 내려다보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름이 용머리해안이다. 비교하자면 제주 북쪽의 용두암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용머리해안은 2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2011년 천연기념물(제526호)로 지정된 이 세계자연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당연히 필요하다.

용머리해안(아래)과 산방산 (출처 용머리해안-산방산 지질트레일)

 

▲출입 통제와 해제 반복… 틈틈이 전화 걸어 확인해야

1년 전 4월, 용머리해안을 찾아갔으나 관리소 측이 위험하다며 막아 들어가지 못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탐방로 일부가 바닷물에 잠기거나 파도가 넘칠 때는 이처럼 출입을 통제한다. 1년 후 다시 용머리해안을 찾아갔으나 너울성 파도가 심하다며 통제하는 바람에 또 다시 포기하고 예정에 없던 산방굴로 올라갔다.

그런데 산방굴에서 내려다보니 용머리해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모습이 개미처럼 보였다. 즉각 용머리해안 관리소에 전화를 걸었더니 4시 10분까지 오면 입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용머리해안은 하루에도 수시로 출입이 통제되거나 해제된다. 실제로 탐방로를 걸어보니 파도가 다소 심하다 싶으면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통제되었다고 포기하면 자신만 손해다. 악천후만 아니라면 용머리해안에 틈틈이 전화(064-760-6321)를 걸어 확인해야 허탕을 피할 수 있다.

제주도는 대한민국 땅에서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높은 곳이 용머리해안이다. 1987년 용머리해안 탐방로가 처음 조성되었을 때만 해도 탐방로가 바닷물에 잠기지는 않았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기상악화나 만조 시, 바닷물이 차올라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실례로 용머리해안의 해수면 높이가 1970년에 비해 2007년 22.7㎝나 상승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후에도 해수면이 계속 상승해 2011년 용머리해안 종일 탐방 가능일이 214일이었으나 2020년엔 42일에 불과했다.

용머리해안 탐방로 초입. 왼쪽이 산방산이고 그 아래가 하멜선상기념관이다.

 

▲직접 탐방해본 용머리해안과 지질트레일

용머리해안은 입구 밖에서 보면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좁은 통로를 지나 바닷물이 옆으로 찰랑대는 탐방로 안으로 들어가면 층층이 쌓인 황갈색 암벽이 맞는다. 언뜻 제주도 서쪽 한경면 고산리의 수월봉과 비슷하게 느껴졌으나 지질학적으로는 차이가 크다. 탐방로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파도에 의한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층을 이룬 기괴한 모양의 바위절벽이 굽이치는 파도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용머리해안 일부

 

물결치듯 흐르는 곡선의 기암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나없이 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이런 탐방로가 600m나 된다. 절벽 높이도 40m 정도다. 상상했던 것보다 기대했던 것보다 신기해 구경하고 사진을 찍느라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다. 절벽이 굽이 치듯 이어지는 장관은 CF와 영화의 배경으로도 촬영된 바 있어 ‘제주의 그랜드캐년’이라고 과장하는 이들도 있다.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출구로 빠져나가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고 만다.

용머리해안 탐방오 일부

 

용머리해안은 산방산과 함께 제주도가 조성한 지질트레일 중 한 곳이다. 공식 명칭은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이다. 80만~10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해안 경관지를 천천히 감상하며 둘러보도록 제주관광공사가 개발한 걷기길이다. 지질트레일은 이곳 말고도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수월봉 지질트레일’도 있다.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은 용머리해안 주차장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도는 A코스와 동쪽으로 도는 B코스로 나뉜다. A코스는 14.5㎞를 도는 대중적 코스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사계포구, 사람발자국화석, 대정향교, 단산 등을 지나 원점회귀한다. B코스는 14.4㎞를 도는 지질 중심의 코스다. 4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하멜표류비(하멜 상선전시관), 금모래해변, 화순곶자왈 등을 지나 원점회귀한다.

A코스 중에서도 장관인 곳은 용머리해안 서쪽의 사계리해안이다.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메마른 모랫빛 지형인데, SF 영화의 외계 행성을 보는 것 같다.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파도와 돌들이 화산지층을 다듬어 수많은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 서면 멀찍이 우뚝 솟은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이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지질트레일 지도 (출처 Visit Jeju)

 

■하멜 표착지(漂着地) 논란

 

‘지영록’과 ‘탐라순력도’ 발굴 후 논란 끝나

용머리해안 입구에 ‘하멜 선상기념관’이 있다. 그곳에서 산방산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하멜 기념비’도 있다. 기념관과 기념비는 수백년 전 네덜란드 출신의 헨드릭 하멜(1630~1692)과 그 일행이 표류 끝에 제주도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만든 기념관과 기념비다. 선상기념관은 네덜란드 바타비아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17세기 상선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삼았다.

하멜은 인도네시아 주재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는 배를 탔다. 하지만 풍랑을 만나 표류 끝에 1653년 제주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후 14년 동안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가까스로 귀국해 표류기를 쓰고 1668년 출판했다.

그러면 왜 용머리해안에 기념관과 기념비를 세운 것일까. ‘정오를 지나 그간 머물고 있던 해안가를 출발해 4마일을 걸어서 저녁 전에 대정현청에 도착했다’는 하멜표류기 속 내용을 추정해보니 대정현청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가 6㎞가량 떨어진 용머리해안이 하멜표류기 내용과 얼추 비슷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산방연대에서 내려다본 하멜 선상기념관(해안쪽)과 하멜 기념비

 

그런데 하멜 표착지를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 두 건이 추후 발굴되면서 표착지에 혼란이 생겼다. 지영록(知瀛錄)과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인데 그중 ‘지영록’은 1694년(숙종 20년)부터 1696년까지 3년간 제주 목사로 재임한 이익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일기로 써서 간행한 책이다. 지영록에는 이익태가 제주 목사로 부임하기 전에 제주 해역에서 발생했던 외국인 표류 상황과 재임 중 발생한 상황을 포함해 12건의 표류 사건에 관련된 기록도 있다.

 

‘대정현 차귀진하 대야수 연변(遮歸鎭下 大也水 沿邊)’ 문구가 단서

12건의 사건 안에는 하멜 등 64명의 네덜란드인 이야기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당시 목사는 이원진, 판관은 노정, 대정현감은 권극중이었다. 계사(1653년, 효종4) 7월 24일 서양국만인(西洋國蠻人) 헨드릭 얌센 등 64명이 승선한 배 한 척이 대정현 차귀진하 대야수(遮歸鎭下 大也水 沿邊)에서 부서졌다. 익사자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 36명이었다.’ 즉 대정현 지방 차귀진 밑의 대야수 연변에서 하멜 일행의 선박이 부서졌다는 것이다. 하멜의 표착지가 구체적으로 나온 자료는 이 문헌이 처음이다.

이익태가 쓴 ‘지영록’

 

참고로 이름이 ‘지영록’인 이유는 제주의 옛 지명이 ‘영주(瀛州)’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영록에 이름이 언급된 헨드릭 얌센은 헨드릭 하멜과 다른 인물이다. 헨드릭 얌센은 제주도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한 뒤에 ‘켈파르트’라고 말한 일등항해사였다. 선장이 죽어 항해사인 얌센이 대표자 이름으로 지영록에 수록된 것이다. 2018년 보물 제2002호로 지정되었다.

문제는 지영록에 명시된 ‘대야수’가 정확히 어느 지점이냐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분석 결과, 현 대정읍 서부지역(일과리, 영락리, 신도리 고산리)에 해당된다는 것까지는 의견이 좁혀졌다. 지영록을 역주한 향토사학자는 난파지점을 고산리 한장과 신도2리 사이 해변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지도가 아니어서 정확한 위치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대야수’ 위치를 결정적으로 밝혀준 것은 ‘탐라순력도’

그러던 중 대야수의 위치를 확실히 알려준 ‘탐라순력도’가 발굴되어 학계를 흥분시켰다. ‘순력(巡歷)’은 지방관이 봄 가을로 관할 지역을 순시하는 일을 뜻한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숙종 28년) 이형상 제주 목사가 그해 10월부터 한달간 제주 전 지역을 순력한 뒤 제주의 자연풍광, 관아와 군사시설, 행사 장면 등을 1장의 지도와 40장의 그림에 담아 간행한 화첩(35㎝ x 55㎝)이다. 서문 끝부분에 화공(畫工) 김남길 이름을 적어놓아 누가 그렸지도 분명히 했다.

‘탐라순력도’에 수록된 제주도 지도 ‘한라장촉’

 

후손들은 이형상의 유품을 경북 영천의 호연정 옆 유고각에 모아놓고 대대로 관리해오다가 1999년 제주시에 건네주었다. 제주시가 보존처리를 통해 얼룩지고 구겨진 그림들을 복원한 결과 한라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지형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 제주지도가 눈에 띠었다. 지도에는 해안선을 따라 80여 개 포구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하멜이 표착했다는 대야수포(大也水浦)도 수월봉(북제주군 고산리 소재) 남쪽 해안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하여 ‘지영록’과 ‘탐라순력도’를 근거로 2017년 8월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 해안에 새로 제막한 것이 ‘하멜 일행 난파 희생자 위령비’다.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2리 해안에 세워놓은  ‘하멜 일행 난파 희생자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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