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美 무정부주의자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 사형 집행… 재판의 불공정성 규탄하는 시위 세계 곳곳에서 벌어져

 

1920년 좌익 검거 선풍 대대적으로 불어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주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을 자극했지만 미국의 일부 급진주의 세력도 고무해 일부 미국인을 불안케 했다. 여기에 1918년 전 세계를 강타한 스페인독감이 1차대전에 참전한 미군 전사자보다 10배나 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경기까지 좋지 않아 민심이 흉흉했다.

그런 가운데 1919년 4월 말, 깔끔하게 포장된 30개의 폭탄이 미국 맨해튼 우체국에서 전국 각 지역으로 발송되었다. 수령인 중에는 존 록펠러, J. P. 모건 같은 기업가도 있었고,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의 활동을 탄압한 미첼 파머 법무장관도 있었다. 폭탄은 5월 1일 노동절 날 한꺼번에 터지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다행히 한 우체국 직원이 폭탄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전국의 우체국에 기민하게 알려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체신장관이 “미국 역사에서 이보다 더 악랄한 음모는 없었다”고 말할 만큼 미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폭탄 암살 계획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폭탄 테러 미수 사건으로 미국인들이 불안해하는 가운데 6월 2일 밤 미첼 파머 법무장관 집 문 앞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폭발로 죽은 사람은 파머 장관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으로 추정되는 범인이었다. 그날 밤 몇몇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탄 테러가 연이어 발생하자 애국주의가 확산하고 좌익 검거 선풍이 대대적으로 불었다. 대상은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었다. 1920년 1월 2일에는 훗날 ‘파머의 습격’이라고 불리게 될 최대 규모의 검거가 이뤄졌다. 현장 지휘는 파머 장관의 보좌관이자 훗날 FBI 국장이 될 에드거 후버가 맡았다. 전국 30개 도시에서 수천 명의 외국인이 체포되고 그중 수백 명의 급진주의자가 국외로 추방되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신문 1면을 한동안 크게 장식할 무장 강도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은 이처럼 미국이 혼란스럽던 1920년 4월 15일이었다. 그날 오후,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교의 평온한 마을 사우스 브레인트리에서 구두공장의 경리직원과 경비원이 1만 5766달러가 담긴 500여 개의 봉급 봉투를 갖고 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총성이 울리더니 한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한 사람은 병원에서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돈 가방을 주워든 범인들은 공범의 자동차를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범인은 모두 5명이었다.

 

사코와 반제티, 경찰이 보기에 범인 조건 두루 갖추고 있어

경찰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5월 5일 2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용의자들은 1908년 미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인이었다. 한 사람은 구두공장 제화공 니콜라 사코였고 다른 한 사람은 생선장수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였다. 다른 3명의 범인 중 1명은 이미 추방된 상태였고 2명은 수배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경찰이 보기에 사코와 반제티는 범인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둘 다 그 당시 미국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탈리아 이민자이고 열렬한 무정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체포 당시 총과 총탄도 갖고 있었고 1917년 1차대전 참전을 피해 멕시코로 도망친 전력도 있었다.

경찰은 4개월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근처 사우스 브리지워터에서 일어난 강도 미수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사코와 반제티의 당일 행적을 캐물었다. 사코는 알리바이가 입증되어 기소를 면했지만 반제티는 사건이 일어난 날 장어를 팔러 다녔다고 항변했으나 기소되었다. 결국 반제티는 1920년 7월 배심원이 강도 미수에 대해 유죄평결을 내려 12~15년형을 선고받았다.

편 검찰은 1920년 4월에 일어난 브레인트리 무장 강도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기소했으나 두 사람은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사코는 사건이 일어난 4월 15일 근무했다고 주장하고 반제티는 생선을 팔러 나갔다고 했다. 그러나 사코의 말은 거짓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날 보스턴에 가서 여권을 찾아오겠다며 결근한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반제티도 신문과정에서 한 말 중 일부가 거짓말인 것으로 드러났다. 거짓말을 한 사실을 은폐하려다가 또 다른 거짓말을 한 사례도 드러났다. 재판 과정에서 거짓임이 밝혀지자 두 사람은 좌파로 낙인찍히는 것과 추방이 두려워서 거짓말을 했다고 변명했다. 두 사람은 1920년 9월 11일 1급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그런데 닷새 뒤인 9월 16일 38명이 죽고 300명이 부상하는 대규모 폭발이 월스트리트에서 일어났다. 이탈리아로 도주한 월스트리트 폭파범은 두 사람과 친한 무정부주의자였다.

1921년 5월 31일 시작된 재판은 증인들의 모호한 진술, 사코와 반제티에 대한 검찰의 유도신문으로 일관했다. 검사는 두 사람이 영어를 잘 구사할 줄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교묘한 반대신문으로 두 사람을 기존 체제를 파괴하려는 반역자로 몰아갔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도 허점이 많았지만 167명이나 되는 증인의 증언들도 엇갈릴 때가 많았다. 50명의 목격자 증언들 중에는 두 사람이 범인과 닮았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범인이 아니라고 증언한 사람이 더 많았다. 검사가 진술을 확보한 200명이 넘는 참고인도 일부만 “두 사람이 범인이 맞다”고 진술했을 뿐 나머지는 두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판사는 ‘무정부주의 놈들’이란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21년 7월 14일 배심원이 두 사람에 대해 1급 살인죄 유죄평결을 발표했다.

그러자 세계 곳곳에서 재판의 불공정성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탈리아 60개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시위 행진을 하고, 유럽에서는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각종 궐기가 이어졌다. 이탈리아 주재 미국 대사관의 집에서는 소포로 배달된 수류탄이 터졌고 파리의 노동자 시위 때는 폭탄이 터져 20명이 죽었다.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한밤중에 폭탄을 터뜨려 주택들을 파괴하는 테러가 일어났다.

 

구명운동 전 세계적으로 벌어졌으나 결국 사형에 처해져

사코와 반제티는 1심 평결 후 바로 재심을 신청했으나 1921년 12월 24일 기각되었다. 사코는 1923년 2월 15일부터 한 달 간 단식투쟁을 했다. 단식투쟁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한동안 잊혔던 사코와 반제티가 다시 신문 전면에 등장했다. 사코의 단식이 30일 째로 접어들자 사코의 무죄를 주장하는 측이 “절도범이나 살인범이 불의에 저항해 30일이나 단식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라며 “사코의 단식이야말로 무죄의 증거”라고 항변했다.

사코와 반제티가 매사추세츠주 대법원에 상고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1925년 11월 어느 날,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한 포르투갈인 죄수가 “내가 강도 살인사건 주모자”라고 자백하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판사는 “신빙성이 없어 믿을 수 없다”며 그의 자백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926년 5월 12일 매사추세츠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했고 1927년 4월 9일 두 사람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러자 세계 각지에서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20세기 마녀사냥”이라며 항의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아인슈타인은 쿨리지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고,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사건이 조작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항의가 빗발치자 매사추세츠주 주지사가 1927년 6월 균형 잡힌 시각의 소유자로 알려진 하버드대 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들은 1927년 8월 초 “재판 과정이 대체로 공정했기 때문에 감형은 필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사코와 반제티는 1927년 8월 23일 밤 전기의자에 앉아 죽었다. 두 사람은 처형 후 20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144편의 시, 6편의 연극, 8편의 소설, 그리고 초상화와 앨범으로 되살아났다. 화가 벤 샨은 23점의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1931~1932) 시리즈를 제작했고 소설가 존 더스패서스는 소설 ‘USA’의 3부작인 ‘북위 42도선’(1930), ‘1919년’(1932), ‘거금’(1936년) 등을 통해 사코와 반제티 재판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그들의 죽음이 있고 정확히 50년째가 되는 1977년 8월 23일에는 매사추세츠주 주지사 마이클 듀카키스가 “두 사람에게 씌워졌던 모든 혐의는 무효이며 그들의 명예를 되찾아주어야 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8월 23일을 ‘사코과 반제티의 날’로 정했다. 다만 사면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범인인지 아닌지는 지금까지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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