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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어데 가봤니껴 6-⑥] 서북권 : 봉정사,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체화정

↑ 상공에서 촬영한 봉정사 (출처 봉정사 홈페이지)

 

by 김지지

 

■봉정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명찰

봉정사(鳳停寺)는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574m)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찍부터 명찰로 유명해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다. 1999년 방한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방문했다. 2018년 통도사, 부석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등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봉정사는 ‘한국의 건축 박물관’으로 불린다. 국보인 극락전과 대웅전 덕분이다. 후불벽화, 목조관세음보살좌상, 화엄강당,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층석탑 등 보물도 많다.

가람 배치는 단순하다. 그래서 좋다. 요즘 전국적으로 이름 좀 알려진 명찰에 가면 사세(寺勢)를 자랑하려는 듯 전각들을 마구 세워 복잡하고 어수선하다. 정신이 없을 정도다. 아쉬운 것은 입장료를 받으면서 입구 옆 화장실에는 화장지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디엘 가도 화장지는 차고 넘치는데 봉정사에는 그런 배려가 없다.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건물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 중 최고(最古) 건축물이다. 국보 제15호로 지정된 이유인데 무슨 근거로 최고(最古)라는 것일까. 현재 우리나라에 삼국과 통일신라 시대 목조건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최고는 고려시대 목조건축인데 남한에 5채가 있다.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강릉 객사문이다. 북한에는 성불사 응진전과 심원사 보광전 2채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최고(最古) 후보군에 오른 세 건물을 살펴본다.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은 1937년 해체 수리할 때 ‘1308년(충렬왕 34년) 4월 17일 기둥을 세우다(立柱)’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목조건축물 중 창건 연대가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확인되었다. 이 때문에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의 연대를 측정할 때 기준이 되곤 한다. 상량문과 묵서명은 신축이나 중수한 건물의 내력 등을 적어둔 글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1972년 해체 수리 때, 1625년(인조3년) 작성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상량문에 따르면 신라 때 능인 대덕에 의해 창건된 후 6차례나 중수했는데도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고려 공민왕 12년) 축담 스님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1916년 해체 중수 때 1376년에 중건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종합하면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에 지어지고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은 각각 1376년과 1363년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량수전과 극락전은 창건연대를 알 수 없으니 얼핏 수덕사 대웅전이 최고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옛날에는 보통 100년 내지 150년 만에 건물을 보수했기 때문에 무량수전과 극락전이 더 오래된 건물인 것이다. 즉 중수 연도인 1363년(봉정사 극락전)과 1376년(부석사 무량수전)에서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덕사 대웅전의 창건연도인 1308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대웅전, 팔작지붕 다포집의 웅장한 힘과 멋 넘쳐

봉정사에는 또 다른 국보도 있는데 대웅전이다. 극락전과 달리 팔작지붕 다포집의 웅장한 힘과 멋이 넘쳐난다. 겉으로는 중층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위아래가 탁 트여 실내 규모 또한 웅장하다, 대웅전에는 다른 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툇마루도 있다.

봉정사 대웅전

 

대웅전은 건축양식상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에도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맞추어  나무쪽)가 있는 다포 양식의 건축물 중 고식(古式)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찍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국보의 중요 조건인 건립 연대가 밝혀지지 않아 국보로는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0년 대웅전 보수를 위해 건물을 해체하던 중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 불단 조성’이라는 묵서가 발견됨으로써 국내 최고(最古)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인정받아 2009년 마침내 국보로 승격했다. 그 무렵 대웅전의 후불벽화인 ‘영산회상도’도 수리했는데 뒷면에서 ‘세종 10년(1428년)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는 묵서가 발견되어 그 동안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1476년)보다 48년 앞선 것임이 확인되었다.

대웅전 오른쪽 숲속에 영산암이 있다. 다가가니 6개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ㅁ(미음자)로 배치된 구조다. 마당 한가운데 바위와 소나무 등 공간이 주는 아름다움에 안마당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조화를 이뤄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9세기 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뿐 구체적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과 ‘나랏말싸미’(2019년)도 촬영지로 유명하다.

영산암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은 거대한 자연 암석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 머리는 다른 바위를 조각해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머리 높이는 2.43m이고, 전체높이는 12.38m다.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된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어서 보물 115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처럼 머리와 몸통 부분을 따로 조각한 예는 고려시대에 자주 보이는 형태다. 경기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과 공주 계룡산 마애불 등도 이런 형태다. 마애여래입상의 특징은 인자하게 뻗은 긴 눈과 두터운 입술, 잔잔한 미소다. 전설에는 신라 때 세웠다고 하지만 얼굴 모습의 인상이나 옷주름 등 불상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인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학계는 판단한다.

마애여래입상은 안동시 북쪽 이천동 태화산 산록 제비원에 자리잡고 있어 ‘제비원 미륵’으로도 불린다. 제비원은 민요 ‘성주풀이’ 가사에도 등장한다.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원이 본이 되야 / 제비원에다 솔씨 받어 동문 산에다 던졌더니….” 제비원은 연미원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출장을 떠난 관리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다. ‘연미’는 이곳에 연미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미사는 신라 때인 634년(선덕여왕 3) 세운 사찰이나 지금은 폐사된 상태다. 마애여래입상 뒤의 산 위 암벽에는 고려시대 석탑5으로 추정되는 3m 높이의 이천동 삼층석탑이 있다. 원래 석불상 뒤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서 복원한 것이다.

안동 마애여래입상

 

■체화정, 형제의 유별했던 우애를 상징

안동에는 역사적 스토리를 품고 있는 정갈하고 운치 있는 정자가 많다. 고산정, 만휴정, 백운정, 체화정 등이다. 그중 체화정은 안동시 풍산읍 상리2리에 있다. 비교적 속세와 떨어져 있는 다른 정자들과 달리 체화정은 대로변에 가깝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근대화의 산물로 도로를 개설하면서 체화정 앞으로 길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924번 지방도로(풍산사태로)를 타고 가다 풍산장터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체화정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시끌벅적한 대로변에 세상과 담을 쌓은 듯 평온한 정자가 자리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체화정(棣華亭)은 조선 영조 때인 1760년 무렵 이민적이 창건했다. 그는 형 이민정과 함께 기거하면서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했다. 1761년 이민적이 먼 친척인 이상진에게 체화정 기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자 이상진이 ‘체화정기(棣華亭記)’를 지었는데 내용 중에 “이민적이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그 앞에 못을 파서 잉어를 기르고 좌우에 좋은 꽃을 심어 형 이민정과 더불어 침식을 같이하니, 그 즐거움이 비할 데 없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체화란 시경 상체편의 첫 구절인 상체지화(常棣之華)에서 따온 말이다. ‘체’란 산앵두를 말하는 것으로 산앵두는 반드시 꽃을 쌍으로 피운다. 그래서 이민적 형제의 유별했던 우애를 상징하는 의미로 정자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민적 사후에는 아들 이한오가 이곳에서 노모를 모셨다.

체화정

 

담락재(湛樂齋) 현판, 김홍도 글씨여서 사료적 가치 높아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중층 팔작지붕집이다. ‘체화정’ 현판 안쪽에는 담락재(湛樂齋)라고 쓴 현판이 있다. 조선 최고의 서화가 김홍도가 이곳에 직접 들러 쓴 글씨다. ‘담락재’ 현판은 김홍도의 글씨가 별로 전해오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진품은 안동 국학진흥원에 있다. ‘담락(湛樂)’의 의미는 도를 행함에는 차례가 있고 나아감에는 순서가 있으므로, 낮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잘해 나가면 저절로 높고 먼 곳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정자 안에는 ‘효자정려(孝子旌閭)’라고 쓴 편액도 걸려 있다. 이민적의 아들 이한오가 노모에게 효의 도리를 다한 것을 가상히 여겨 순조가 하사한 것이다. 2019년 12월 보물 제2051호로 승격했다.

김홍도가 쓴 담락재(湛樂齋) 글씨와 현판(아래)

 

이민적은 체화정 앞에 네모난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3개의 석가산(정원 따위에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을 쌓았다. 석가산에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의 이름을 붙였는데 중국 전설에서 유래한 삼신산(三神山) 즉 신선이 사는 산을 의미한다. 지금은 체화정 바로 앞으로 도로가 뚫려 있어 정자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지만 체화정에 올라 연못안의 ‘삼신산’을 바라보는 것도 꽤나 운치가 있다.

체화정 주변에 흐드러진 배롱나무는 단아한 건축물과 함께 조선 정자의 백미를 보여준다. ‘백일홍’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7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100일 동안 차례로 분홍 꽃을 피워 한여름 폭염에도 화사함을 연출한다. 나무가 크지 않아 옆으로 퍼지면서 나무줄기의 곡선과 빛깔이 멋지고 맵시가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예로부터 배롱나무는 사찰이나 선비들의 공간에 많이 심었다.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도 세속을 벗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선비들의 거처하는 서원 등 건물 앞에 심는 것은 청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안동에서도 배롱나무 붉은 자태의 백미를 볼 수 있는 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병산서원이지만 이곳 체화정의 배롱나무도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체화정 배롱나무

 

☞ TIP : 식당(대구식육식당)과 숙소(풍산 강노을펜션)

여행을 해도 왠만하면 식당과 숙소를 소개하지 않는데 안동 풍산에서는 추천하고 싶은 식당과 숙소가 있다. 식당은 풍산읍에 있는 ‘대구식육식당’을 추천한다. 블로그를 보니 나만 몰랐을 뿐 이미 방송에도 소개되고 각종 블로그에서도 추천하는 곳이다. 물론 방송에 나왔다고 식당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새삼스럽게 이곳을 추천하는 것은 나처럼 식당 정보에 어두운 사람을 위해서다. 추천 이유는 오로지 하나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돼지고기, 소고기 모두 있지만 돼지주물럭이 맛도 좋고 가격도 착했다. 알아서 판단하시길.

다음은 숙소.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강노을펜션’이 괜찮아 보였다. 내비가 안내해주는 곳을 따라갔는데 생각했던 곳과는 다르다. 알고보니 안동에서 ‘강노을펜션’을 검색하면 두 군데가 나오는데 내가 찾아간 곳은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에 소재한 펜션이었다. 실내는 알지 못하지만 펜션 위치와 주변 분위기는 내 기대에 많이 떨어진다.

다시 풍산 지역을 확인한 후 다른 강노을펜션을 찾아갔다. 늦은 밤에 도착한 터라 실내가 깔끔하다는 정도만 알았을 뿐 밖은 깜깜해서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주위를 살펴보니 전망이 최고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그 건너에는 너른 백사장이 펼쳐있는데 영화 ‘신기전’ 촬영지란다. 흔들의자에 앉아 강을 바라볼 수도 있고 강가를 산책할 수도 있다. 단점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마땅한 식당이 없다는 것. 대신 실내에 주방이 있어 조리는 가능하다. 물론 한적한 것을 장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음날 여행지가 풍산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안동 남동쪽이어서 하루만 자려고 했는데 맘에 들어서 하루 더 이곳에서 잠을 청했다. 평일 6만원에 공휴일은 8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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