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계마을 만휴정 모습
by 김지지
■길안면 묵계리와 김계행
▲만휴정과 김계행
안동시 도산면이 퇴계 이황(1501~1570)의 성지라면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는 조선 전기 문신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의 텃밭이다. 묵계리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묵계마을인데 이곳에 김계행이 조성한 멋진 정자와 그가 살았던 종택, 그리고 그를 봉향하는 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은 원래 거묵역이었다. 그러나 1500년(연산군 6년) 김계행이 말년에 낙향한 후 자신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묵계종택을 짓고 우거하면서 원래 마을 이름 대신 묵촌으로 불렸다. 뒤이어 김계행이 하천 건너편 송암계곡에 독서와 사색을 위한 정자를 조성했으니 ‘만휴정’이다. 김계행이 정자 앞 계곡을 묵계(默溪)로 칭하면서 마을 이름은 묵계마을로 또다시 바뀌었다.
김계행은 벼슬이 늦었다. 초시 합격 후 지방의 말직으로 근무하다가 남들보다 한참 늦은 48세에 대과에 급제해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했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직언을 서슴지 않아 사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67세인 1498년 무오사화 때 심한 고초를 겪자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껴 고향인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로 낙향하고 고향에서 멀지않은 길안면 묵계리에 집(묵계종택)을 지어 살면서 당호를 보백당이라 했다. 말년에는 장인이 지은 하천 건너 정자(쌍청헌)를 오가면서 독서와 사색으로 소일했다. 그가 장인의 숨결이 살아있는 쌍청헌 주변을 새롭게 가꾸어 늦을 만(晩)과 쉴 휴(休) 자를 써서 만휴정으로 정한 것은 늦은 나이에 쉬게 된 자신의 말년을 반영한 것이다.
만휴정은 대한민국 명승이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
내비게이션에서 만휴정을 검색하면 만휴정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천천히 마을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오른다. 길안천 위 다리를 건너 10여분 걸으면 숲 사이로 팔작지붕의 만휴정이 눈에 들어온다. 다가가니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좁고 긴 외나무다리 건너편 바위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앞은 계곡이고 뒤는 숲이다.
외나무다리는 2018년 인기리에 방영된 ‘미스터 션샤인’에서 남자주인공 유진(이병헌)이 여주인공 애신(김태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라는 명대사를 날린 곳이다. 영화 ‘봉이 김선달’(2015), ‘궁합’(2018)에도 등장하고 영화 ‘미인도(2008)’에서는 김홍도가 스승을 찾아가는 장면이 촬영되었다.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가 끝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전국에서 찾아온 선남선녀들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곳에서 사진과 추억을 남긴다. 폭포, 계류, 산림경관 등의 조화를 인정받아 2011년 대한민국 명승 제82호로 지정되었다. 명승지 이름은 빼어난 숲과 정원을 뜻하는 ‘만휴정 원림(園林)’이다.
만휴정 대청 마루 위에 만휴정(晩休亭)과 쌍청헌(雙淸軒) 현판이 걸려 있다. 쌍청헌은 정자를 처음 이곳에 지은 김계행의 장인 남상치의 당호다. 남상치는 1453년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이곳 묵계로 낙향, 쌍청헌을 짓고 은일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정자 앞을 흐르는 계곡 위 너른 바위에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이라 쓰인 글자가 크게 새겨있다. 김계행의 유언으로 ‘나의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이 있을 뿐이다’라는 뜻이다. 김계행의 호 보백당(寶白堂)은 여기서 유래한다. ‘청백을 보물로 삼는다’는 뜻이다. 정자 앞을 흐르는 계곡 아래 바위에도 ‘보백당 만휴정 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다. ‘보백당의 만휴정이 자리한 샘가의 돌’이라는 뜻이다. 김계행은 86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고 묘비에는 미사여구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 뒤 오랜 세월 만휴정은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러다가 10세손인 김동도가 1790년 기둥을 세우고, 상량하여 만휴정을 중수했다.
▲묵계서원과 묵계종택
만휴정까지 왔다면 같은 묵계리에 있는 묵계서원도 들러볼 일이다. 만휴정과 서원 사이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길안천이 흐르고 35번 국도가 지나간다. 만휴정에서 승용차로 3~4분 거리여서 걸어갈 수도 있다.
묵계서원은 김계행과 옥고(1382∼1436)를 봉향하는 1687년(숙종 13) 창건한 서원이다. 옥고는 세종 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조선 전기 문신으로 청렴결백하고 학문에 힘쓴 청백리였다. 1869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徹·헐어서 치워버림)되었다가 나중에 읍청루(문루)와 진덕문(대문), 동재(東齋) 건물 등을 복원했다. 읍청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인데 제법 규모가 크고 위풍당당하다. 서원 왼쪽에는 ㅁ자형 주사(관리인이 살던 집)가 있다. 서원 중 다른 건물은 모두 후대에 복원한 것이나 주사는 서원이 훼철될 때 헐리지 않고 남아 사료적 가치가 크다.
서원 안에 비교적 커다란 배롱나무가 자란다. 한 여름의 배롱나무는 언제 보아도 매혹적이다. 안동에서 배롱나무가 멋진 곳을 꼽으라면 체화정과 병산서원이다. 묵계서원 옆에는 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김계행이 정주하며 여생을 보낸 묵계종택은 묵계서원 가까이 있다. 묵계종택은 용계당(정침)과 보백당(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ㅁ자형의 팔작지붕 집이다. 보백당은 묵계종택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건물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루에는 ‘보백당’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 말기 김가진의 글씨이다. 묵계종택은 건물 구조의 짜임새와 비례감이 좋고 건립 당시 사용된 목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많아 당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가치가 있다. 500년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택에선 한옥숙박체험이 가능하다.
■용계리 은행나무
안동시 길안면에 발을 들여놨다면 수령이 자그마치 700년이나 되는 용계리 은행나무께 문안 인사를 올릴 것을 권한다. 용계 은행나무는 길안초등학교 용계분교 운동장 한켠에서 태어나 700년간 숱한 풍상을 겪으면서도 마을의 평안을 지켜준 마을 당산나무 역할을 했다.
은행나무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임하댐 건설 계획이 발표된 1987년이었다. 댐이 완공되면 창졸간에 마을은 물속에 잠겨야 했다. 주민들이야 이사 가면 되었지만 천연기념물 제175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그대로 두면 수몰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재앙을 예견하는 신목을 살려야 한다는 탄원과 진정을 냈고, 정부가 받아들였다.
문제는 나무가 너무 커 옮겨 심는 게 간단치 않다는 거였다. 높이는 37m, 흉고(사람 가슴 높이)는 15m로 우리나라 최대 크기다. 결국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이식(利殖)이 아니라 높이만 들어 올리는 상식(上植) 공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자칫하면 나무가 죽을 수도 있어 공사비만 날릴 수 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대책으로 공사업체와 특별한 계약을 체결했다. 이식 후 6년 동안 85%~90%이상 생존을 유지시키지 못할 때는 공사비 전액을 반환키로 한 것이다.
공사는 피라미드 형태로 흙을 쌓으며 나무를 조금씩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뿌리와 가지는 상당 부분 자르고 철제 버팀목을 댔다. 그렇게 나무는 15m 높이까지 들어 올려졌고 나무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인공 산이 쌓였다. 2년 4개월(1990년 11월~1993년 3월) 동안 진행된 공사에 들어간 비용만 23억원이나 되었다. 단 한 그루의 나무를 살리기 위해 이 정도의 비용을 들인 예는 세계 조경사에서도 유례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바라보면 어마어마한 크기에 압도당한다. 지지대도 그냥 쇠봉이 아니라 철근이다. 댐 주변이어서 막힌 곳이라곤 뒷산뿐이다. 나무 주변에 벤치도 많아 한가한 날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힐링될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 안내문에 적혀 있는 ‘용계의 은행나무’라는 명칭이다. 안동시 홈페이지에서도 ‘용계의 은행나무’다. 그냥 ‘용계 은행나무’나 ‘용계리 은행나무’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표기한 건 관형격조사의 남용이다. 이렇게 상투적으로 관형격조사를 붙이는 건 일본어 투다. 매끄러운 맛도 떨어진다. 자칫 가려 쓰지 않으면 군더더기가 된다.
■임하면 내앞마을·백운정·개호송숲
길안면 북쪽에 임하면이 붙어있다. 그곳에 백운정과 개호송 숲이 있다. 국가 명승 제26호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백운정과 개호송 숲은 바로 옆 내앞마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일 터이니 내앞마을의 역사를 먼저 알아본다.
▲내앞마을과 청계종택
내앞마을은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위치한 의성김씨 청계파의 집성촌이다. ‘내앞’은 한자로 천전(川前)이니 반변천 앞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안동에서 영덕 방향으로 반변천과 나란히 달리는 34번 국도를 10여 분 정도 달리면 임하보조댐이 나오고 왼편으로 고가가 즐비한 마을이 내앞마을이다. 1760년대 이종악의 ‘허주산부군수화첩’의 반변천 12경에 ‘운정풍범(雲亭風帆)’이라는 제목으로 마을 풍광 그림이 남아 있을 정도로 유서깊은 곳이다.
내앞마을의 입향조(入鄕祖)는 김만근(1446~1500)이고 중시조(中始祖)는 그의 손자인 청계 김진(1500~1580)이다. 의성김씨 청계파는 김진의 호에서 땄다. 김진은 청계 가문을 퇴계 가문과 쌍벽을 이룰 만큼 500년 명문가 반석 위에 올려 놓은 핵심 인물이다. 김진은 자신의 성취보다는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특별한 아버지였다. 넷째 아들 학봉 김성일은 부친 사후 기록한 ‘청계 행장’에서 자식을 키웠던 부친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자녀가 모두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 아이 이거나 강보 속에 있었다. 한밤중에 강보 속 어린아이가 어미젖을 찾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다.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진의 이런 노력 덕에 다섯 아들(극일, 수일, 명일, 성일, 복일)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과 학문으로 가문을 일으켰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집안을 가리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고 칭송했다. 5형제는 성장해 신당·금계·예천 등지에 종택과 집성촌을 이뤘다. 이후 5개 파에서 문과 급제 24명, 생원 진사 64명을 배출했다. 5형제 중 특히 유명한 인물이 학봉 김성일(1538~1593)이다.
내앞마을의 중심은 보물 제450호로 지정된 의성김씨 청계파 종택이다. 의성김씨 파시조인 청계 김진의 종택이어서 청계종택으로도 불린다. 따라서 내앞마을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은 김진의 넷째아들 학봉 김성일이 지은 청계 종택이다. 김성일이 중국 북경에 갔을 때 그곳에서 그려온 상류층 주택의 설계도를 가져와 참고했기에 구조와 배치가 독특해 건축학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 안채, 사랑채, 사당채를 기본으로 하며 몸 기(己)자 형태의 한옥이다.
▲내원마을 독립운동
근대 들어 내앞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독립유공자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집성촌으로 이뤄져 있던 안동 지역의 특성을 감안해 성씨별로 서훈 받은 독립유공자의 수를 헤아려보면,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낳은 성씨는 진성이씨로 52명이다. 의성김씨는 두 번째 많은 47명이다. 의성김씨 집성촌 중에서도 내앞마을 출신 독립유공자의 수는 20명이다. 내앞마을에 있다가 흩어진 일가 친척들까지 합하면 33명이다. 내앞마을에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잡은 건 우연이 아니다.
내앞마을 출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알려진 이름이 많다. 먼저 내앞마을의 독립운동을 이끈 백하 김대락을 들 수 있다. 당시 김대락의 집은 ‘삼천석 집’이라고 불렸다. 사람이 천석, 글이 천석, 땅이 천석 있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김대락과 일가 친척들은 땅과 재산을 모두 팔아치운 돈을 갖고 그해 음력 섣달 만주 서간도로 떠났다. 고난을 시작했을 때 김대락의 나이는 65세였다. 내앞마을 사람들의 고증에 따르면 현재 가치로 당시 처분한 재산은 수백억원에 달한다. 얼마나 많은 내앞마을 사람들이 서간도로 이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러 자료에 비춰봤을 때 150명 이상이 3차례에 걸쳐 떠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대락은 만주로 망명 후 백두산 언저리에 산다는 뜻으로 백하(白下)라는 별호를 사용했다. 내앞마을 안쪽에 자리잡은 김대락의 옛 집은 현재 경상북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백하 김대락의 옛 집, 즉 ‘백하구려(白下舊廬)’라는 이름이 붙은 이 집에는 지금 김대락의 후손이 살고 있다.
또 다른 인물은 독립군 양성에 앞장서 만주벌 호랑이로 이름을 떨친 일송 김동삼이다. 김동삼은 1907년 마을에 신식학교로 세워진 협동학교 교사로 활동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군사학교인 백서농장을 조직하고 서로군정서에서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내앞마을에는 김동삼의 생가도 있다.
▲백운정과 개호송 숲 일원
내앞마을 앞 반변천 가에 개호송 숲이 있다. 지금은 부근에 세운 임하보조댐 때문에 사실상 유속이 멈춰있지만 그 전까지는 유유히 때로는 급하게 흘렀을 것이다. 이곳에 송림이 조성된 것은 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하다는 풍수지리설에 근거한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비보림(裨補林)으로 조성한 숲이 개호송 숲이다.
이곳에 처음 나무를 심은 인물은 내앞마을 입향조인 김만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5년(선조 38년) 대홍수로 숲 전체가 유실되었다. 그후 내원마을의 중시조인 김진의 손자 김용이 1617년(광해군 9) 마을 사람들과 함께 1,000여 그루의 소나무를 다시 심었다. 그는 문중회의를 통해 이 숲을 보호하기 위한 결의문을 작성하는데, 이것이 ’개호종송금호의서(開湖種松禁護議序)’라는 결의문이다. 개호송 이름은 이 결의문에서 유래한다. 개호송 숲은 국가 지정 명승 제26호 답게 나름 운치와 멋이 있다. 하회마을 만송정 숲보다는 넓고 소나무 굵기도 더 아름드리다. 경주 삼릉 소나무숲과는 견줄만하다. 반변천과 사이에 승용차가 교차할 수 있는 정도 폭의 흙길을 만들어 반변천을 바라보며 걷는 맛도 있다.
‘안동 백운정 및 개호송 숲 일원’도 대한민국 명승
개호송 숲에서 바라보면 반변천 건너 산 중턱의 풍광좋은 자리에 고고한 모습의 정자가 반변천을 굽어보고 있다. 김진의 둘째아들 김수일(1528-1583)이 아버지에게서 부지를 얻어 1568년(선조 1년) 지은 백운정이다. “판서에 증직된 김진이 세우고, 그의 아들 수일이 옛 제도에다 늘려지었다”고는 기록이 있다. 김수일은 아버지 김진과 마찬가지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던 인물이다. 김수일은 동생 김성일과 함께 백운정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김성일은 백운정에 머물며 많은 시를 남겼다. 김성일의 ‘학봉집’을 보면 부모상을 다 치르고도 산소가 보이는 백운정에 머물며 부모님을 추모하고, 주위 풍광을 노래한 ‘백운정 십이영’(白雲亭十二詠)을 남겼다.
백운정으로 가려고 하는데 반변천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다리가 없어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마을 주민이 조금만 내려가면 있는 임하보조댐 위로 가면 된다고 알려준다. 보조댐으로 가니 대형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마침 댐을 관리하는 잘생기고 친절한 젊은 직원이 있어 관광객이라 하니 들어가게 한다. 백운정은 보조댐까지 승용차로 2~3분이면 도착한다. 그러니 걸어갈 수도 있다. 직원은 할 일은 한 것이지만 그가 고마워 감사의 표시로 천혜향 2개를 선물했다.
백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누마루는 반변천을 굽어보게 동향으로 배치했다. 뒤쪽에 ‘ㄷ’자형 주사(관리인이 살던 집)가 연접되어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이다. 백운정의 현판은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특이한 전서체이다. 현판 옆에 작은 글씨로 ‘미수 허목이 90 노인에 쓰다’라고 쓰여 있다. 분실을 우려해 진품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
앞마당에 회화나무와 향나무가 있다. 두 나무 모두 안동시가 관리하는 보호수다. 회화나무 높이는 18m쯤 되고 수령이 300년이라는데 백운정의 아담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보통 회화나무는 높이는 30m, 직경은 2m까지 크게 자랄 수 있어 은행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거목 중 하나다. 전국적으로 500~1000년 된 회화나무 10여 그루가 노거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회화나무 곁에 향나무도 한 그루 있다. 수령이 300년이라는데 크지는 않다. 다만 서 있는 모습이 조금 독특하다. 언덕 아래쪽으로 뻗은 줄기가 기어가듯 구불구불 자라면서 땅에 완전히 닿았다가 다시 위로 자란 모습이다. 백운정 앞마당에서 반변천 건너편을 바라보면 개호송 숲이 반변천을 따라 길게 이어져있다. 국가 명승 정식 이름은 ‘안동 백운정 및 개호송 숲 일원’이다. 100대 명산이 실망시키지 않듯 국가 명승 역시 전국 어딜가도 실망하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