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동족(유대인)의 밀고로 나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숨진 안네 프랑크의 삶과 일기

↑ 안네 프랑크(왼쪽)와 ‘안네의 일기’

 

by 김지지

 

2차 세계대전 당시 ‘안네의 일기’ 주인공인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 가족의 은신처를 나치에 밀고한 사람이 또 다른 유대인이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었다. 독일 디벨트와 미국 CBS 등은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공증인으로 일하던 유대인 아르놀트 판덴베르흐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안네와 부모, 언니 등 4명이 1944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은신처에서 발각되어 나치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 지 약 78년 만이다.

안네 프랑크

 

공포와 불안, 또래 소년에 대한 호기심을 일기에 차곡차곡 기록

안네 프랑크(1929~1945)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1차대전 때 독일군 장교로 참전하고 종전 후에는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자 예상되는 유대인 박해를 피해 그해 8월 가족을 데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그런데도 암스테르담에 향료회사를 차려 독일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는 전형적인 유대인 상인의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는 1939년 2차대전 발발 직후까지 독일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사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나치가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1941년 유대인을 본격적으로 박해하자 네덜란드에 새로운 은신처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안네는 13번째 생일인 1942년 6월 12일 아버지에게서 일기장을 선물 받았다. 안네는 빨간 체크무늬 일기장에 ‘키티’라는 애칭을 붙여준 뒤 6월 14일 첫 일기를 썼다.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6월 12일 금요일, 나는 아침 6시에 눈을 떴습니다.” 6월 12일의 일기를 6월 14일에 쓴 것이다.

그로부터 20여일이 지난 1942년 7월 5일 안네의 3살 위 언니 마코트에게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그것이 죽음의 수용소행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안네 가족은 이튿날 미리 준비해둔 은신처에 몸을 숨겼다. 그곳은 암스테르담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3층 사무실 건물 책장 뒤에 숨겨진 비밀 창고였다. 안네 가족 4명과 다른 유대인 가족 3명, 치과의사 1명은 그곳에서 숨소리를 죽이며 살았다. 작은 라디오 하나와 외부에서 가끔 들러 생계에 도움을 주는 지인들만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안네 가족이 은신해있던 암스테르담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3층 사무실 건물 안

 

안네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내게 참된 친구가 없기 때문”(1942년 6월 20일)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엄마와 갈등을 빚은 일부터 함께 은신한 페터 판 펠스에 대한 풋풋하고 로맨틱한 감정 등 여느 10대 소녀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안네는 10대 소녀가 느낀 전쟁의 공포, 극심한 불안, 또래 소년에 대한 호기심, 어머니와의 말다툼, 같이 사는 다른 가족들과의 갈등을 일기에 차곡차곡 기록했다. 안네가 ‘키티’라고 부른 일기장은 극도의 불안 속에서 자신의 모든 비밀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친구였다.

안네는 엄혹했던 나치 정권의 풍경도 묘사했다.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착하고 죄 없는 사람들이 칭얼대는 어린애들을 데리고 독일군들에게 얻어맞아 비틀거리면서 줄을 지어 걸어가는 것을 창문으로 내다볼 수 있어. 노인이건 어린이건, 임신한 여자건 병자건,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는 거야… (중략) 이런 곳에서나마 아무런 박해 없이 살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몰라!”(1942년 11월 19일)라고.

가족의 절망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난 후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안네의 일기는 1944년 8월 1일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사흘 뒤인 8월 4일 누군가의 밀고로 독일 비밀경찰이 은신처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결국 안네 가족 4명을 포함해 8명 전원과 그들을 도운 네덜란드인 2명이 어디론가 끌려갔다.

 

1945년 3월 어느 날 15살의 나이로 세상 떠나

안네 가족은 1944년 9월 6일 다른 유대인 1,000여 명과 함께 화물차에 실려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가족은 선별 작업을 거쳤다. 아버지는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아우슈비츠에 남고 어머니와 안네 자매는 철로를 사이에 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안네와 언니는 다시 10월 28일 독일의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어머니는 비르케나우에 남았다가 1945년 1월에 숨졌다.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안네와 언니가 수용된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절멸수용소가 아니고가스실도 없었다. 하지만 도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초만원 상태가 되면서 극심한 영양 부족, 열악한 위생 상태, 의류와 난방 부족으로 생활 조건이 극도로 좋지 않았다. 안네는 절망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아 다른 수용자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1945년 3월 초 티푸스에 걸린 언니가 죽으면서 안네는 희망을 잃고 3월 어느 날 1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존자 가운데는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도 있지만 당시 수용소 안에서는 시간 개념이 없어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다.

영국군이 이 수용소를 해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남짓 후였다. 아버지 프랑크는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에 들이닥친 소련군에 구출되어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그에게 안네와 같은 수용소에 있던 한 간호사가 안네 자매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한때 아버지의 회사에 다니던 한 여성은 붉은색 바탕 오렌지색 무늬의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안네 가족이 체포된 이튿날 은신처에서 뒹굴던 안네의 일기장이었다. 아버지는 1947년 6월 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하지만 사춘기 소녀였던 안네의 성에 관한 호기심, 부모에 대한 반발 등의 내용은 빼고 출간했다. 전체 분량의 4분의 1이 되는 누락 부분을 모두 살린 이른바 완전판은 안네 아버지 사후인 1991년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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