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메인호 폭발과 미국·스페인 전쟁

↑ 원인미상의 폭발로  침몰한 메인호

 

스페인의 가혹한 진압, 쿠바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에게 좋은 구실

유럽의 열강이 전 세계에 걸쳐 영토와 이권을 확대하며 제국주의 시대를 펼치던 19세기 내내 미국은 서부 개척과 남북전쟁 등 국내 문제에만 매달렸다. 그러다가 국민 통합과 영토 다지기가 끝나자 ‘먼로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 고립주의를 포기해야 한다는 팽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은 넓은 땅을 차지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타고났다”는 등 내세운 명분은 다양했다. 기업가들은 더 넓은 시장을 원했고, 종교인들은 기독교가 멀리 아프리카에까지 퍼지기를 소망했으며 군인들은 해외에서 근육을 과시하고 싶었다. 그 첫 무대가 쿠바였다.

쿠바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지만 미국 플로리다에서 140㎞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미국이 수천만 달러나 투자해 미국과는 특수 관계였다. 스페인에도 쿠바는 남미 지역 대부분이 이미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상황에서 마지막 거점이자 돈이 되는 식민지였다. 따라서 노쇠한 스페인 제국과 신흥 강대국을 꿈꾸는 미국 모두에 쿠바는 경제·전략적 요충지였다. 발단은 쿠바산 설탕에 대한 미국의 무관세 정책 철폐였다. 수출길이 막힌 농장주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해결책을 독립에서 찾았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쿠바 독립의 영웅’ 호세 마르티는 1895년 4월 쿠바에 상륙, 독립 전쟁을 지휘했다. 스페인 군대는 혁명 가담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가두고 적법절차 없이 처형했다. 마르티 역시 참혹하게 처형했다.

스페인의 가혹한 진압은 쿠바 사태 개입을 원하는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되었다. 하지만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개입을 원치 않았다. 대신 그는 쿠바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락하라고 스페인에 조언했다. 스페인은 1897년 자유주의 내각이 들어선 후 쿠바에 다소의 자치를 허용했지만 이런 유화 정책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반란은 더욱 격렬해졌고 그럴수록 진압도 더욱 잔인해졌다. 이런 와중에 당시 미국의 신문업계를 양분하고 있던 조지프 플리처의 ‘뉴욕월드’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뉴욕저널’이 쿠바 사태를 신문사 간 경쟁에 이용하면서 여론은 점차 참전 쪽으로 기울었다. 두 신문은 연일 쿠바 반란군의 활약상과 이에 대한 스페인의 만행을 쏟아내며 무력 개입을 촉구했다.

결국 미 정부는 쿠바 내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1898년 1월 15일 6,682t급의 전함 메인호를 쿠바 아바나항에 입항시켰다. 메인호가 정박해 있을 때 ‘뉴욕저널’은 매킨리 대통령을 비판한 워싱턴 주재 스페인 대사의 편지를 입수해 ‘미합중국 역사상 최악의 모욕을 당하다’라는 제목으로 전쟁을 촉구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 무렵 쿠바에 파견된 뉴욕저널 특파원 겸 삽화가가 “쿠바에서는 할 일이 없다”며 뉴욕으로 돌아가도 되는지 전보로 물었을 때 허스트는 “계속 체류하게. 자네는 그림이나 만들게. 전쟁은 내가 만들 테니까”라고 답장을 보냈다.

미군이 쿠바의 산 후안 전투(1898.7.2)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는 그림

 

“메인호를 기억하라!” “스페인을 타도하라!”

그러던 중 2월 15일 오전 9시 40분쯤 메인호가 갑자기 폭발해 승무원 355명 중 266명이 사망하는 폭발 사건이 일어났다. 기뢰설과 폭파설이 무성했으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신문은 “스페인군의 비열한 행위”라고 비난하고 미 정부의 즉각적인 보복을 촉구하면서 전쟁 슬로건 “메인호를 기억하라!” “스페인을 타도하라!”가 미 전역에 울려 퍼지도록 선동했다. 메인호 사건은 특히 허스트에게 두 가지 희망을 안겨주었다. 하나는 스페인과의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발행부수 경쟁에서 퓰리처의 뉴욕월드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메인호 폭발 사건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심지어 조선의 ‘독립신문’도 1898년 2월 19일자 호외를 발행해 이 사실을 급보로 알렸다. 이 호외는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호외로 기록되고 있다.

매킨리 대통령은 메인호 폭발 초기에는 “서두른다고 해서 애국적인 것은 아니다”라며 개입을 거부했지만 결국에는 들끓는 여론을 어쩌지 못해 강경론으로 돌아섰다. 매킨리는 4월 11일 억압받는 쿠바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장 개입 승인을 의회에 촉구했고 미 상하 양원은 4월 19일 전쟁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스페인이 4월 23일 선전포고를 하고 미국 역시 4월 25일 선전포고로 대응하면서 미국·스페인 간의 제국주의 전쟁이 불을 뿜었다.

그런데 첫 전투는 쿠바가 아닌 태평양의 필리핀에서 벌어졌다. 필리핀은 16세기부터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898년 5월 1일, 홍콩을 거점으로 삼고 있는 미 함대가 필리핀 마닐라만에 정박해 있는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면서 미국 최초의 해외 전쟁이 마침내 막이 올랐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380여 명이 전사한 반면 미군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았다. 미국의 완벽한 승리였다. 필리핀의 독립 세력도 육지에서 미국 쪽에 가세하면서 전쟁은 가볍게 끝이 났다. 그런데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투에는 3년 후 미 대통령 자리에 오를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참전했다. 루스벨트는 당시 해군성 차관보였으나 전쟁이 시작되자 차관보를 그만두고 사설 부대인 ‘러프 라이더’를 창설해 중령 계급장을 달고 참전했다. 해군 차관보라는 정치 엘리트가 장군도 아닌 비정규군 중령으로 참전하고 죽음을 무릅쓴 각오로 전선을 누비고 다니는 그의 모습에 미국인들이 열광했다. 점차 ‘애국심의 화신’, ‘전쟁의 영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루스벨트(가운데)와 그가 이끄는 러프 라이더 대원들

 

쿠바에서는 해상을 장악하는 전술을 구사하다가 7월 3일 3만여 명의 스페인군이 수비하고 있는 산티아고에 상륙, 2주일 만에 점령했다. 미군은 쿠바 전투에서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고 스페인은 카리브해마저 미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3개월 만에 끝난 전쟁은 한 비평가의 말대로 그야말로 ‘소풍 같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쟁 외적인 요소로 죽어간 미군도 적지 않았다. 전체 미군 전사자 5,400여 명 중 370여 명만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을 뿐 나머지는 황열병과 말라리아 등의 질병으로 병사했기 때문이다.

1898년 12월 10일 조인된 파리강화조약 내용은 가혹했다. 스페인이 필리핀은 물론 푸에르토리코와 괌까지 미국에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와이는 이미 7월에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미국에 병합된 상태였다. 쿠바는 여론에 밀려 공개적으로는 식민지로 삼지 않았지만 쿠바 내에 영구적으로 미군 기지를 두고 필요할 경우 언제든지 쿠바 내정에 끼어들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 사실상 식민지화했다. 오늘날까지 미국 소유로 남아 있는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이때 결정된 것이다. 미국의 전쟁 승리는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스페인 제국의 종말과 신흥 강대국 미국의 등장을 전 세계에 알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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