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노구교 사건과 중일전쟁 발발

↑ 노구교(루거우차오)를 건너 행진하는 일본군

 

일본의 정전협정은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시간 벌기용

노구교(蘆溝橋․루거우차오)는 중국의 북경 서남쪽을 흐르는 영정강 위에 놓여 있는 다리로 1192년 완공되었다.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예찬할 만큼 멋진 곳이다. 그런데 이 다리가 1930년대 들어 중국·일본 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면서 새로운 군사적 거점으로 급부상했다.

중국으로서는 노구교 위를 지나는 철도가 북경과 화북 지역을 잇는 유일한 교통로이고 북경의 3면이 사실상 일본에 포위된 상태라는 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일본 역시 이 철도를 확보하면 화북 지역으로 군대를 이동할 수 있어 중국 북서부로의 진출이 용이해지고 장차 있을 중일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곳이었다. 화북은 북경을 포함해 하북성·산서성·산동성·하남성 4개 성을 포괄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농산물과 각종 자원이 풍부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노구교 부근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1937년 7월 7일 밤 10시쯤, 갑자기 10여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일본군 부대가 즉각 훈련을 중단하고 점호를 실시해보니 신병 1명의 행방이 묘연했다. 일본군 중대장은 이를 중국 측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상부에 보고했다. 상부에서는 “단호히 대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신병이 20분 후 돌아와 용변을 보다가 늦었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도 신병의 귀대 사실은 상부에 보고되지 않았다. 그날의 총격이 일본군의 자작극인지 중국의 항일 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군은 이튿날 새벽 중국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군사력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한 중국군 지도부가 “양보를 통해 국부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시해 전면전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양군은 사태가 확산하는 것을 피해 7월 11일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노구교 인도, 대표자 사과, 책임자 처벌, 항일단체 단속 등 일본 측의 무리한 요구를 중국 측이 수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정전협정이 체결된 그날 일본 정부는 사건을 ‘중국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로 단정하고 일본 본토 3개 사단, 조선 주둔 1개 사단, 만주 2개 여단 파견을 결정했다. 며칠 후에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증원군의 파병도 승인했다. 결국 일본의 정전협정은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시간 벌기용 계략의 산물이었다.

 

공산당 정부, 중일전쟁 덕에 기사회생

당시 일본의 정계․군부․언론은 만주를 쉽게 점령했던 수년 전 경험에 마취되어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면 어렵지 않게 중국 전역을 점령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군사력도 상당해 30만 명 이상의 일본군, 15만 명 이상의 만주·몽골군, 200만 명에 가까운 예비군에 세계 3위를 자랑하는 강력한 해군력과 항공대를 보유했다. 중국 국민당군은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병력이 있었으나 현대식 무장을 갖춘 부대는 장개석의 직속부대 10만 명에 불과했다. 항공력도 사실상 전무했다.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낸다’는 전략하에 본토와 만주에서 온 증원군과 함께 총공세에 나서 7월 30일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8월 13일 상해를 기습했다. 장개석은 그동안 ‘공산당을 먼저 섬멸한 후 외부의 적과 싸우겠다’는 이른바 선내양외(先內攘外)를 고수했으나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된 상황에서 선내양외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7월 17일 “피할 수 없으면 항전만이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공산당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내전을 중단하고 국력을 모아 외세와 싸우자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인정하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 ▲각당·각파·각계·각군 대표회의를 소집해 공동 구국에 나서자 등을 요구했다. 결국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명분 싸움에 밀려 9월 22일 제2차 국공합작에 서명했다. ▲공산당 정부는 중화민국 특구정부로 개칭하고 ▲화북 지역의 홍군은 국민혁명군의 8로군으로, 화중 지역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신사군으로 개편해 국민당 정부의 지시를 받고 ▲공산당은 지주들의 토지 몰수 정책을 중지하고 ▲항일 민족통일전선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장개석은 9월 23일, 모택동은 9월 29일 국공합작을 승인했다. 이로써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토벌로 존폐 위기에 내몰렸다가 기사회생한 것은 물론 전 중국을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11월 12일 상해를 점령하자 상부에서 진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으로 진격했다. 일본 본토의 참모본부는 부랴부랴 현지 일본군을 중지나 방면군으로 칭하고 남경 진격을 사후 승인하는 것으로 체면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일본군은 항공기까지 동원한 총공세 끝에 12월 13일 남경을 점령하고 2개월 동안 남경 대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일본이 파병한 규모는 16개 사단에 50만 명이었다.

남경에 입성하는 일본군

 

중일전쟁으로 인한 중국의 민·군 사상자 수 3,500만 명

국민당군은 1938년 5월 일본군 1만 명을 사살하는 ‘태아장 전투’에서 최초의 승전고를 울리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패전의 연속이었다.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 후 한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다시 공세를 취해 1938년 11월까지 동남쪽의 무한과 광주를 점령하는 등 중국 영토의 3분의 2, 주요 산업 시설 대부분, 항구 전부를 차지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점령지는 도시와 철도 연변의 점과 선을 확보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쟁 양상은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 청년과 학생들은 공산당의 중심지 연안으로 몰려들었고 공산당은 북서부 지역에서 화북과 화중으로 근거지를 확대했다. 국공합작 초기 3만 명 정도이던 팔로군은 1940년 40만 명으로 급증하고 신사군은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기세가 오른 팔로군은 1940년 8월 화북의 5개 성에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백단 전투를 벌여 일본군 2만 5,000여 명을 사살하고 480㎞에 이르는 철도선을 파괴하며 승전가를 불렀다.

그러자 장개석은 불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일본군을 향하던 총부리를 공산당 쪽으로 겨눴다. 1941년 10월 이른바 ‘환남 사변’을 일으켜 7일 동안 9,000여 명의 신사군을 사살했다. 항일 전쟁 중 일어난 최대 규모의 국공 무력 충돌이었다. 결국 ‘환남 사변’으로 국민당군과 공산군 모두 중일전쟁과 국공 내전을 동시에 치러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렇다고 일본의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전쟁의 장기화로 전략 자원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동남아로 남진 정책을 바꿔야 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 일전을 벌여야 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전선을 동남아 전역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전쟁의 당사자가 되자 국민당 정부에 다량의 무기를 지원하면서 전쟁을 독려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이 제공한 무기들을 항일전에 모두 쏟아붓기보다 종전 후 예상되는 공산군과의 싸움에 대비해 비축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남방 작전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하남·호남·광서·광동성 등 남북 10개 성과 100여 개 주요 도시를 또다시 빼앗겼다.

일본 역시 점령 지역을 사수하려면 대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국민당군과 공산군의 지속적인 항전은 일본 육군의 60% 이상과 해군 및 항공력을 중국 전장에 묶어두는 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났을 때 중국에서 항복한 일본군은 128만 명이나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종전까지 양국의 사망자 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 기간 일본군은 45만 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알려졌고 중국의 민·군 사상자 수는 3,500만 명이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공식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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