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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名勝(명승) 탐방] ① 전남 강진의 백운동원림(白雲洞原林)… 호남 전통 원림의 원형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별서정원

↑ 원림 초입에서 창하벽(제6경)과 풍단(제10경)을 살펴보는 선근

 

by 김지지

 

월출산 산성대(영암)로 올라가 경포대(강진)로 내려와 부근에서 1박을 했다. 이왕에 멀리 전남 강진까지 온 김에 2021년 12월 6일 월출산 자락의 무위사와 백운동 별서정원에 들렀다. 두 곳 모두 초행이었으나 무위사는 이름이 익숙한 반면 백운동 별서정원은 낯설다. 그런데도 백운동 별서정원이 반가웠던 것은 요즘 내가 꽂혀있는 국가지정 명승(제115호)이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기준 문화재청이 지정한 대한민국 명승(名勝) 127곳 중 다녀온 명승이 60~70%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가는 곳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명승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무조건 OK다. 이곳 이름은 백운동 별서, 백운동 정원, 백운동 별서정원 등 여럿으로 불리지만 강진군의 공식 명칭과 문화재청 지정 명승지 명칭은 ‘백운동원림’이다.

백운동원림 위치

 

▲백운동원림(白雲洞原林)은

백운동원림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히는 별서다. 원림(園林)의 사전적 의미는 집에 딸린 정원이나 공원의 숲이고 별서(別墅)는 살림집(본가)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경치 좋은 별장이다. 담얌의 소쇄원과 명옥헌, 강진의 다산초당, 해남의 일지암 등과 더불어 호남 전통 원림의 원형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운마을에 속하고 자연적으로는 월출산 옥판봉 남쪽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백운동원림은 월출산을 시원으로 하는 계곡과 그 물을 이용한 마당 안 연못, 주변의 대숲과 동백숲길 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소담스러운 정원이다. 조선 중기 선비 이담로(1627~?)가 중년에 정원으로 조성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백운동의 빼어난 경치는 이담로 이전부터 잘 알려진 곳이다. 이담로보다 약 100년 전 광해군 때 인물인 해암 김응정은 백운동 계곡 옆에 ‘신선이 머무는 곳’이란 뜻의 정선대(停仙臺)를 짓고 계곡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었다. 고려 시대에는 계곡에 백운암이란 암자도 있었다. 이곳을 이담로가 공을 들여 별서로 꾸민 것이다.

이담로는 월출산의 암봉인 옥판봉 한참 아래 기슭에 초가를 짓고, 마당에는 계곡 물을 끌어들여 아홉 굽이 물길을 만들었다. 계단 옆 빈공간에는 100그루의 홍매화를 심고 정원 밖에는 동백나무와 대나무 등을 심어 인접 마을과 경계를 삼았다. 그는 자신의 호를 백운동은(白雲洞隱)으로 짓고 이곳에서 은거의 삶을 즐겼다. 이담로가 이곳에 본격적으로 정원을 가꾼 것은 만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1684~1767)을 데리고 들어와 살면서부터다. 손자는 1756년 식구들을 불러들여 살림집으로 꾸몄다. 지금의 주인은 이담로의 13세 손이다. 그는 서울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다가 퇴직 후 홀로 내려와 백운동원림에서 기거한다.

정선대에서 내려다본 백운동원림 내부

 

▲전통 원림(園林) 보존은 ‘백운첩’ 덕분

백운동원림이 지금까지 호남 전통 원림의 원형을 보존하고 경승지(景勝地)로 널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지은 시들과 그의 제자인 초의선사(1786~1866)가 그린 ‘백운동기’를 합첩한 ‘백운첩’의 공이 크다. 여기에 정원을 다녀간 수많은 문사와 유배객들이 이구동성으로 풍치를 극찬한 시(詩)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것도 원림이 관심을 끌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담로의 6세손 이시헌(1803~1860)이 이들 문사들의 시를 엮어 정리한 ‘백운세 수첩’이 남아있는 것도 초기 백운동의 모습을 재구성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의 저자 정민 한양대 교수는 “하나의 별서 공간에 백운동만큼 많은 시문이 존재하는 예는 따로 보지 못했다”며 “담양 소쇄원의 기록이 많다고 해도 작가의 면면과 작품의 양은 백운동 쪽이 훨씬 풍부하고 대부분 친필”이라며 높이 평가한다.

백운첩(白雲帖)은 다산 정약용이 1812년 9월 12일 제자인 초의선사 등과 함께 월출산에 놀러갔다가 내려와 백운동원림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느낀 감흥을 숙소인 다산초당으로 돌아가 시를 짓고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모습을 그리게 한 뒤 자신의 연작시와 그림을 합첩한 20쪽짜리 시첩이다. 백운첩에는 정약용이 쓴 12편의 연작시와 초의선사가 백운동 정원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백운동도’와 다산이 머물렀던 다산초당의 당시 모습을 그린 ‘다산도’가 실려 있다. 정약용은 백운첩 발문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임신년(1812) 가을, 다산에서 백운동으로 놀러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남은 미련이 오래 지나도 가시지 않기에 승려 의순(초의선사)을 시켜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勝事)의 시를 지어서 주었다. 끝에 다산도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

 

▲초입에서 대문까지

진입로는 월출산 다원주차장과 안운주차장 두 곳이다. 원림 북쪽 언덕 위에 있는 다원주차장이 도로변에 있어서 찾기 쉽고 넓지만 언덕 아래 안운주차장을 탐방길로 삼는 게 좋다. 동백나무숲과 대문이 그쪽에 있고, 정약용이 시로 노래한 백운동 12경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어 원림을 순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운주차장으로 접근하려면 구릉에 넓게 펼쳐진 차밭 사이 1차선 소로(小路)를 지나야 하고 주차장 크기가 작아 불편하지만 그래도 선택하라면 안운주차장이다. 주차장 부근에 간단한 설명과 지도,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가 있어 미리 숙지하고 발걸음을 옮기면 좋을 것 같다.

초입에서 대문으로 이어진 250m 길은 윤기가 살아있는 진초록의 동백숲길이다. 길 오른쪽으로 동백나무 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고 그 옆으로 월출산에서 내려온 계곡이 흐른다. 이 동백숲이 정약용이 제2경으로 칭한 ‘산다경(山茶徑)’이다. 산다(山茶)가 동백나무의 별칭이므로 동백나무(山茶) 숲의 작은 길(徑)이라는 뜻이다. 시를 소개하면 이렇다. ‘언덕을 끼고 심은 동백나무가 / 이제는 길 가득 그늘 만드네 / 가지마다 꽃 보숭이 맺혀 있으니 / 세한(歲寒)의 마음을 남겨둔 걸세’. 매년 이른 봄 이곳에서 붉은 동백꽃이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제2경 산다경

 

산다경이 끝나는 지점에서 계곡과 만난다. 계곡은 상류에서부터 백운동원림의 담장을 끼고 흘러내려와 대문 앞쪽에 놓인 다리 밑을 지나면서 작은 폭포를 이룬다. 정약용은 이 폭포를 가리켜 제4경 홍옥폭(紅玉瀑)이라 했다.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면 그 빛이 폭포에 어려 물색이 마치 붉은옥(紅玉)과 같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정약용의 노래와 달리 지금은 계곡 물이 말라 있다. 지금이 초겨울이기도 하지만 위에서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만드는 바람에 물길이 끊긴 탓이다.

동백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 왼쪽에 ‘白雲洞(백운동)’을 새겨놓은 바위가 있다. 중국 주자의 백록동(白鹿洞) 서원을 의식해 ‘백운동’을 새긴 것으로 해석되는 이 세 글자는 입산조인 이담로의 글씨로 전해진다. 글씨가 진입로 반대 방향에 새겨져 있고 위치도 시야를 약간 비켜선 지점에 있어 지나치기 쉬우니 살짝 주의해 살펴야 한다.

바위 앞 다리를 건너면 큰 칼로 삭둑 잘라낸 듯한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정약용은 이 바위를 제6경 ‘창하벽(蒼霞壁)’이라고 이름 지었다. 붉은색(霞) 글씨가 있는 푸른(蒼) 절벽(壁)이라는 뜻으로 정약용이 붉은 글씨로 ‘蒼霞壁’을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마모되어 흔적조차 없다. 창하벽 바로 위에 제10경인 ‘풍단(楓壇)’이 있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楓)가 심어진 단(壇)이라는 뜻인데 정약용은 그 모습을 ‘홍라보장(紅羅步障)’이라 묘사했다. 즉 단풍철에 잎이 물들면 온통 붉은 비단 커튼을 둘러친 것 같대서 이렇게 불렀다.

 

▲원림 안

창하벽에서 계곡 위쪽으로 대문이 있다. 흔히 별서나 원림에는 담장과 대문이 없지만, 손자 이언길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일반 가옥처럼 담을 두르고 대문을 단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에는 ‘흰 구름에 그윽하게 깃들다’란 뜻의 ‘白雲幽居’(백운유거) 현판이 달려있다. 원림 안 본채에도 같은 이름의 ‘白雲幽居’가 걸려있다.

백운동원림 대문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대문 밖 계곡에서 끌어온 물길이 대문 옆을 지나 마당을 한 바퀴 돌아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약용이 그것을 보고 이름지은 제5경 곡수유상(曲水流觴)이다. 곡수는 물길을 꺾어 굽이굽이 돌아나가게 만든 장치를 가리키고 유상은 물길 위로 술잔을 흘려 띄운다는 뜻이다.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물길이 돌아나가는 곳마다 앉아서 상류에서부터 연신 흘려서 내리는 술잔을 받아 마시며 시를 지었다. 정약용도 이렇게 노래했다. ‘담장 뚫고 여섯 굽이 흐르는 물이 / 고개 돌려 담장 밖을 다시 나간다 / 어쩌다 온 두 세 분 손님 있어 / 편히 앉아 술잔을 함께 띄우네’. 그런데 정약용이 여섯 구비라고 한 것과 달리 실제는 아홉 구비 물길이다. 그리고 아홉 구비로 마당을 안아 흐르는 곡수유상은 민간 정원에서는 이곳에만 남아 있다.

마당 안을 지나는 제5경 곡수유상

 

백운동원림 안은 경사면 위쪽을 평평하게 다져 집을 짓고 그곳에서 마당으로 내려가는 길을 3단으로 쌓아 화계(花階·꽃계단)를 조성했다. 계단 양쪽엔 모란과 매화 등을 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약용이 지은 이름이 제3경 백매오와 제8경 모란체다. 이담로 당대에는 집 둘레 언덕에 100그루의 매화가 심어져 있었다. 그것을 본 정약용은 제3경 백매오의 ‘백매암향(百梅暗香)’ 즉 100그루의 매화에서 그윽이 풍기는 향기라고 노래했다. 다만 지금은 고매(古梅)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모란체(牡丹砌)는 계단에 모란을 심은 화단이라는 뜻이다. 제9경은 십홀선방(十笏禪房)의 ‘취미선방(翠微禪房)’이다. 십홀이 좁은 크기를 나타내고 선방이 내부의 조촐함을 드러낸 표현이므로 취미선방은 산허리(翠微·취미)에 있는 꾸밈없고 고즈넉한 작은 방을 말한다.

 

▲원림 밖

원림 안에서 남쪽의 담장 밖을 바라보면 제11경 정선대(停仙臺)와 눈이 마주친다. 정선대 앞에 서면 멀리 월출산 옥판봉이 바라보이는데 정약용은 ‘선대봉출(仙臺峰出)’로 표현했다. 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선대라는 뜻이다. 실제로 정선대에 올라서서 보면 저 멀리 옥판봉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운동원림의 최고 조망이다. 정약용은 정선대에서 바라보이는 옥판봉을 제1경으로 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옥판봉 경치를 ‘옥판상기(玉版爽氣)’라 했다.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이 백운동의 첫손 꼽히는 풍경이라는 것이다.

정선대에서 바라본 옥판봉(제1경)

 

여기서 잠깐. 옥판봉은 월출산의 한 봉우리로 강진에서 바라볼 때 톱날 같은 바위들이 학의 날개처럼 수없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름조차 없고 월출산 국립공원 안내지도에 표시조차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강진에서 광주 쪽으로 가는 국도 13호선 성전 부근에서 옥판봉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올라가 보면 검붉은 벼랑이 웅장하고, 발아래 난대림 숲 바다가 강진평야까지 뻗어나가며 강진만에 닿는다고 한다. 옥판봉에서 보면 오른쪽에는 무위사, 왼편에는 월남사가 자리하고 있고 정중앙에 백운동이 위치한다.

제7경은 정선대 뒤 소나무 군락이다. 정약용은 그것을 정유강(貞蕤岡)의 ‘유강홍린(蕤岡紅麟)’이라 노래했다. 정유는 소나무의 별칭이고 강은 언덕이며 홍린은 소나무의 껍질이 붉은 용의 비늘 같다는 뜻이다. 정약용이 제12경으로 꼽은 것은 대나무가 울창한 담장 옆 운당원(篔簹園)이다. 운당은 왕대나무를 뜻하는데 넓은 대지에서 자라는 무성한 대숲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바라만 봐도 시원하다.

제12경 운당원

 

마당 안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살펴보고 있는데 60대 초중반의 남자가 본채에서 나와 반갑게 맞는다. 알고보니 이담로의 13대 손이다. 우리가 멀리 서울에서 내려온 것을 알고 마침 관광객도 없다며 친히 안내를 자처한다. 그는 백운동원림 전체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후 본채 뒤에 조성된 이담로 묘소로 이동해 이담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러고는 담장 옆 대숲만 보지말고 대숲을 따라 내려가 만나는 계곡에서 다시 계곡을 타고 대문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다시 밟아보라고 권한다. 그가 알려준대로 해보니 왜 이곳에 원림을 조성했는지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된다.

 

▲설록다원과 강진의 차

이담로 묘소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포장도로(백운로) 부근에 백운동원림과는 다른 초록 세상이 펼쳐진다. 인근의 무위사에서 월남사지까지 월출산 자락에 넓게 조성된 설록다원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백운옥판차가 생산되던 자리에 태평양퍼시픽에서 조성한 대규모 다원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국내 녹차를 대표하는 브랜드인 설록차다.

설록다원과 월출산 암릉 (출처 강진군청)

 

사실 차밭 경관이라면 전남 보성이 가장 이름났지만, 이곳 차밭도 뒤질 게 없다. 부드러운 곡선과 초록빛의 차밭이 월출산의 솟아오른 바위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기 때문이다. 차밭을 관리하기 위한 농로가 잘 포장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제격이다. 넓고 멋진 차밭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 힐링까지 해준다. 무엇보다 백운동원림 정선대에서는 나무에 가려 일부만 보이던 옥판봉 전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일대는 오래전부터 야생차 산지였다. 정약용의 제자이기도 한 백운동 6대 동주 이시헌이 3증3쇄라는 독특한 제다 법으로 차를 제조하고 ‘동다기’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문헌을 필사기록으로 남겼다. 해방 직전까지 판매된, 우리나라 최초로 상표화된 ‘백운옥판차’가 생산된 곳도 이곳이다. 차인들 사이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전설의 명차를 빚어내 백운옥판차를 만든 이는 이한영(1868~1956)이다. 부근에 이한영 생가도 있으니 한번 들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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