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중국 천안문 사태’는 우리의 ‘5월 광주’… 민주화 싹 짓밟으려고 중국 공산당이 자행한 대규모 학살극

↑ 1989년 6월 4일 새벽, 천안문광장으로 진입하는 탱크부대를 한 청년이 맨몸으로 막아서고 있다.

 

by 김지지

 

1997년부터 홍콩대 교정에서 24년간 전시해온 중국 천안문 사태 추모 조각상 ‘수치의 기둥’이 2021년 12월 22일 한밤중에 철거되었다. ‘수치의 기둥’은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시위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이다. 덴마크 작가 옌스 갤치옷이 제작해 1997년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연합회(지련회)에 기증했고, 지련회가 홍콩대에 전시했다. 영국 BBC는 조각상 철거가 중국 당국이 주도하는 천안문 사태 흔적 지우기의 일환이라고 전했다. 조각상 철거 후 갤치옷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희생자 묘지에 가서 묘비를 훼손한 것과 같다”며 철거 행위를 규탄했다.

 

개혁개방 과실 독차지한 부패 관료와 공산당 일당 독재에 분노 폭발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노선이 중국 공산당의 정책으로 채택된 1978년 12월 이후, 중국에는 경제 자유가 신장되고 시장 개방의 폭이 넓어졌다. 그러나 경제 분야에만 자유를 향한 열망이 허용되었을 뿐 그것을 감시할 언론자유와 정치 개혁만은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결국 부정부패가 횡행하자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 개혁개방 과실을 독차지한 부패한 관료와 공산당 일당 독재에 대한 불만이  분출했다. 그러던 중 학생들의 신뢰를 받아온 개혁적 성향의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 총서기가 1989년 4월 8일 정치국 회의 도중 심장병 발작으로 쓰러져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그해 봄을 뜨겁게 달군 시위가 점화되었다.

후야오방 장례식

 

후야오방은 10대 시절 공산당 운동에 가담해 11살 위 덩샤오핑과 인연을 맺었다. 문화대혁명 때는 덩샤오핑과 함께 숙청당해 고초를 겪었다. 암울했던 두 사람의 운명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76년 마오쩌둥이 숨진 뒤였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이어 권력을 잡게 되자 마오쩌둥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1978년부터 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 등 4개 분야 현대화를 목표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고 경제특구도 만들었다. 후야오방은 이런 덩샤오핑의 대변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1982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밀월 관계는 거기까지였다. 경제 개혁에만 집중하자는 덩샤오핑과 달리 후야오방이 공산당 1당 독재 체제도 좀 더 민주적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86년 중국 곳곳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급격한 물가 상승, 빈부 격차 확대 등으로 누적되어온 학생과 대중의 불만이 터진 것이다. 후야오방은 무력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으나 결국에는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덩샤오핑에 의해 당 총서기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그에게는 ‘비운의 총서기’ ‘중국 공산당의 양심’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리고 1989년 4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후야오방(왼쪽)과 덩샤오핑

 

후야오방 추모 행사, 민주화, 부정부패 척결, 빈부 격차 해소 요구 집회로 발전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베이징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 추모 대자보가 붙었다. 베이징대 학생들은 후야오방의 공과(功過) 재평가, 언론 자유 등 7개 요구 사항을 공산당에 제시하며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4월 18일에는 수만명의 학생들이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모여 후야오방을 추모하며 명예 회복을 요구했다. 추모 행사는 금세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 빈부 격차 해소를 요구하는 집회로 발전했다. 이후 수일간 적게는 수만명, 많게는 수십만명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언론 자유, 정치 개혁, 부패 척결, 민주화 실현 등 정치 구호를 외치며 밤낮없이 연좌농성을 벌였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대처 방안을 확정하지 못한 채 사태를 주시하고 있을 때 자오쯔양(趙紫陽) 당 총서기는 학생들의 시위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학생 시위가 후야오방 전 당 총서기의 추모에서 시작되었고, 애당·애국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며 온건한 처리를 고수했다. 그러나 4월 23일 자오쯔양이 북한 방문길에 오르면서 정책 결정은 고스란히 강경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리펑(李鵬) 총리 등 강경파는 “이번 시위는 국제적인 적대 세력의 조종에 의한 반당, 반사회주의 동란”이라고 규정,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도 리펑의 주장에 동조했다.

4월 26일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강경파의 주장을 반영한 ‘선명한 기치를 들고 동란에 반대하자’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학생 시위를 외부 불순세력과 연계된 ‘동란(動亂)’으로 공식 규정했다. 그러자 사설에 대한 반발로 다음날 10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가두 시위가 벌어졌다. 그들은 4월 26일자 인민일보의 사설 철회 등을 요구했다. 자오쯔양도 5월 1일 평양에서 돌아와 인민일보 사설을 비판했다. 5·4 운동 70주년인 5월 4일에는 학생들을 만나 학생들이 부패를 염려하는 것은 ‘이성적’이라고 말하며 공감을 표했다. TV를 통해서는 “학생들의 주장은 반드시 수용되어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역설했는데 덩샤오핑과의 갈등이 처음 외부에 표출된 이 연설은 덩샤오핑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대국민 선언이기도 했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동란’으로 규정한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

 

덩샤오핑이 질서 회복이 우선임을 강조한 것은 계엄령 선포 의미

5월 4일 학생들은 민주주의 실천을 요구하는 ‘5·4 운동 선언’을 발표하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상하이, 난징, 광저우 학생들도 동참함으로써 시위는 전국적 양상을 띠었다. 언론인들까지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자오쯔양은 “시위 보도를 좀 더 허용하고 뉴스를 개방해도 그다지 큰 위험은 없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자오쯔양은 한 걸음 더 나아가 5월 10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을 철회하라며 강경파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자오쯔양으로서는 그때가 절정기였다.

5월 13일, 학생들이 인민일보의 ‘동란’ 규정 철회와 애국·민주운동 인정을 요구하며 천안문광장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시위 현장은 5월 16일에 있을 30년 만의 중·소회담 취재를 위해 베이징으로 몰려온 1000여 명의 외국 기자들에 의해 고스란히 외부 세계로 알려졌다.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도착한 5월 15일, 50만 명에 가까운 시위 군중이 천안문광장에 모여들었다. 5월 16일에는 고르바초프의 자동차 행렬이 시위대들 때문에 천안문 앞을 지나지 못하고 뒷길로 돌아 숙소로 가는, 중국 지도자들로서는 창피한 일도 벌어졌다.

덩샤오핑은 격분했다. 5월 17일 당 원로와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계엄령을 발동할 것인지 논의했다. 자오쯔양은 계엄령에 반대했으나 리펑과 또 한 명은 찬성하고 나머지 두 명은 기권했다. 당 원로 보이보(薄一波)는 “최종 결정권을 덩샤오핑에게 넘기자”고 제안하고 덩샤오핑의 측근 양상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강경 진압을 지지했다. 덩샤오핑은 질서 회복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그것은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암묵적 지시였다. 자오쯔양은 그날 총서기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튿날 사퇴를 철회하긴 했으나 그는 병을 칭하고 당무에서 손을 뗐다.

5월 18일 전국에서 몰려든 수십만 명의 시위대가 “덩샤오핑 퇴진”을 요구하며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같은날 강경파인 리펑 총리가 왕단, 우얼카이시, 차이링 등 학생 대표들을 만나 당장 단식농성을 중단하고 광장을 떠나라고 요구했으나 학생들은 인민일보의 사설 철회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시위를 ‘민주적인 애국 운동’으로 명명할 것을 요청했다. 결국 어느 쪽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5월 19일 저녁, 자오쯔양이 단식 농성 중인 천안문광장에 나타나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너무 늦게 왔다. 여러분이 제기한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라며 학생들에게 단식 농성을 풀 것을 애원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응하지 않았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자오쯔양은 공식 석상에 등장하지 않았다.

1989년 5월 19일, 천안문광장에서 단식 농성 중인 학생들을 만난 자오쯔양

 

인민해방군 장갑차는 광장 한복판으로 진입하고, 무장 군인들은 대검을 총에 꽂고 광장으로 돌진

5월 20일 마침내 중국 공산당 정부가 베이징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질서 회복의 목적도 있었으나 자오쯔양이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계산된 계엄령이었다. 계엄령 발동에 따라 군부대가 베이징에 배치되었으나 학생과 시민들은 탱크를 둘러싸고 거리에 방벽을 쌓았다. 5월 21일 공산당은 원로회의를 열어 자오쯔양의 총서기 직무를 정지시키고 가택연금했다. 그리고 당시 상하이시 서기로 학생운동에 강경하게 대처한 장쩌민(江澤民)을 차기 총서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았고 이른바 ‘북경의 봄’이 계속되었다.

천안문광장에 모여있는 학생-시민들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는 더 과격해졌다. 시위대는 덩샤오핑의 이름인 샤오핑(小平)과 발음이 같은 ‘샤오핑(小甁·작은 병)’을 낚싯대에 매달아 광장 여기저기서 병소리를 내며 끌고 다님으로써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조롱했다. 5월 30일에는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본떠 석고로 만든 ‘민주의 여신상’을 광장에 세우는 등 천안문광장은 사실상의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6월 2일 베이징 사범대학의 교수 류샤오보와 타이완 출신의 유명 가수 허우더제인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천안문광장에서 앞으로 72시간 동안 단식을 하겠다며 ‘6월 2일 단식농성 선언’을 했다.

그런 가운데 시위대의 인간 벽에 막혀 있던 인민해방군이 6월 3일 밤, 천안문광장 주변에 집결했다. 그러자 오늘날 ‘천안문 4군자’로 불리는 류샤오보, 가오신, 저우둬, 허우더젠이 죽음을 무릅쓰고 계엄부대를 찾아가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천안문광장 동남쪽에 한 가닥 퇴로를 열어준다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학생운동 지도부는 해산과 결사 항쟁으로 갈렸다. 결국 수천명 정도가 마지막까지 광장에 남았다. 그러자 인민해방군이 장갑차로 밀어붙이며 광장 한복판으로 진입했다. 무장한 군인들은 대검을 총에 꽂고 광장을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 시위대가 투석과 육탄 저지로 막아섰으나 이내 계엄군의 총탄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총탄을 피해 후퇴하던 군중은 기관총 소사가 멈추면 쓰러진 사람들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앞으로 나왔다가 또다시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6월 4일 새벽, 마침내 탱크와 장갑차가 시위대의 천막촌을 유린하고 ‘민주 여신상’을 쓰러뜨렸다. 광장은 총소리와 비명 소리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새벽 5시, 마침내 계엄군이 천안문광장을 장악함으로써 천안문 사태도 막을 내렸다. 그동안 수십만 명의 대학생과 시민이 계엄군의 탱크·장갑차와 뒤엉켰던 광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적만 감돌았다.

1989년 6월 4일 새벽, 천안문광장으로 진입하는 탱크부대를 한 청년(맨 왼쪽)이 맨몸으로 막아서고 있다.

 

1976년 제1차 천안문 사태와 구별해 제2의 천안문 사태로 불러

자오쯔양은 이후 3년여 동안 당의 공식적인 조사를 받았다. 당적은 유지했으나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2005년 1월 생을 마감했다. 당 분열 행위라는 비난을 받은 그는 끝까지 자신의 행위가 옳았다고 주장했다. 후야오방은 살았으면 100살이었을 2015년 복권되었다.

중국 정부는 학생 대표들을 지명 수배했다. 일부는 홍콩을 통해 탈출하고 일부는 체포되어 형을 살았다. 일반 학생들도 1000명 넘게 체포되었다가 대부분 석방되었으나 일부는 사형을 당했다. 반체제 인사로 몰린 왕단은 감옥에 있다가 1990년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요청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위구르족인 우얼카이시는 홍콩을 거쳐 대만으로 가 반공산당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류샤오보는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반체제 인권·민주화 운동으로 201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17년 7월 간암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천안문 사태는 1976년 4월 일어난 제1차 천안문 사태와 구별하기 위해 제2의 천안문 사태로 불린다.

천안문 사태 후 중국 정부는 319명 사망, 민간인 부상자 3,000명, 계엄군 측 부상자 6,000명이라고 발표했으나 1980년 우리의 5월 광주 때 정부 발표가 그러했듯이 중국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 통계를 믿지 않았다. 중국 경찰은 1년이 지난 1990년 7월 10일 다시 사망자 숫자를 공식 발표했는데 그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만4550명이었다. 군인은 56명이 사망하고, 7525명이 부상했다.

물론 이 발표 역시 여전히 신뢰받지 못하고 있으나 달리 반박 증거가 없어 그냥 수천명 사망설만 흘러다닐 뿐이다. 천안문 사건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주중 영국대사관 직원이 작성해 본국에 보고했다가 2017년 12월 비밀해제된 영국 외교문서에 사망자가 1만명이 넘는다는 증언이 실려있긴 하나 이 역시 전언(傳言)에 따른 숫자여서 정확하지는 않다.

홍콩 영자신문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CMP)’지 일요판인 ‘선데이 모닝 포스트’지 6월 4일자에 보도된 천안문광장 학살 기사

 

중국 군대의 유혈 진압은 분명 중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중국 공산당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극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천안문 사건이나 사태 단어는 중국에서 금기어다. ‘1989년 6월 4일’ ‘6월 4일’ ‘6·4’ 단어들도 중국 SNS나 인터넷 포털에서는 금기어여서 검색이 안된다. 중국 정부는 1989년을 기억하는 세대들에겐 ‘침묵’을 강요하고 있고, 그 후세대들에겐 실재했던 역사지만 가르치지 않는다. 천안문 사태를 극소수 반사회적, 반공산주의 세력이 노동자와 서민을 선동해 일으킨 ‘폭란(暴亂)’으로 이미 규정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민주화 요구를 따르다가 패망한 소련을 예로 들며 그들의 유혈 진압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급속한 경제발전에 집중,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중화주의에 빠져 민주화에 관심을 두지 않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중국 공산당이 귀를 닫는 이유에 대해 공산당의 내부 분열과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정치 개혁이 본격화하지 않는 한 재평가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의 ‘5월 광주’가 진상이 밝혀져 명예회복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듯 1989년 천안문 사태의 진상 규명 역시 중국에 민주화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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