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은래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민들
4인방, 주은래 죽자 등소평을 표적으로 삼아
1976년 1월 8일 주은래 총리가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국인들은 비통함을 참지 못해 슬퍼하고 통곡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후 한동안 주춤해 있던 ‘4인방’은 최대 정적 주은래가 사라진 것을 기뻐하며 반겼다. ‘4인방’은 강청(모택동의 4번째 아내), 왕홍문(당 부주석), 장춘교(정치국 상무위원), 요문원(정치국원)인데 이들은 근거지가 상해여서 주로 ‘상해방’으로 불리다가 1976년 모택동 사후 ‘4인방’으로 불렸다.
4인방이 보기에 주은래 사후, 당 부주석 겸 국무원 제1부총리인 등소평이 아직 남아 있긴 해도 등소평은 그 무렵 모택동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데다, 등소평을 지원해온 주은래마저 사라져 유명무실한 존재에 불과했다. 등소평은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5년 간의 연금과 유배 끝에 1973년 3월 원직으로 복귀했으나 1975년 11월부터 다시 모택동의 비판을 받았다. 이런 현실을 꿰뚫고 있는 4인방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했다. 중국인들의 눈에 이런 4인방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특히 1월 10일 등소평이 주관한 장례식장에서 모자를 벗지 않은 채 묵념을 하고, 남들이 애도하고 있을 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강청의 모습이 TV에 비치자 한목소리로 강청을 비난했다.
그래도 4인방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등소평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병석의 모택동도 공개적으로 등소평을 비판하고 정치국도 등소평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4인방은 그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문회보 기사로 “자본주의 노선을 따르는 주자파(走資派)가 아직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며 주은래를 부정하고 등소평을 압박했다. 반면 중국인들은 여전히 주은래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고 4인방을 비난했다. 4인방의 거점인 상해에서 추도회가 열린 1월 15일 오전 9시 57분에는 주은래의 사망 시각에 맞춰 선박들이 기적을 단속적으로 30분 이상 울리기도 했다. 3월 30일에는 주은래를 애도하고 4인방을 성토하는 노동자 명의의 애도시가 천안문 인민영웅기념비에 붙었다. 이를 시작으로 애도사, 표어, 대자보 등과 온갖 기념비가 천안문 광장에 붙거나 세워졌다.
모택동이 임명한 주은래의 후임자는 비교적 온건한 이미지의 화국봉이었다. 화국봉은 국무원 총리대행 겸 당 제1부주석에 임명됨으로써 단숨에 당과 정부 양쪽에서 서열 제2위 지도자로 부상했다. 4인방은 화국봉의 기용이 장기적으로 그들의 권력 장악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해 화국봉을 환영했다.
제1차 천안문 사태는 4인방을 겨냥해 일어난 비극
이런 가운데 1976년 4월 4일 중국의 청명절이 다가왔다. 청명절은 중국인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망자의 영혼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일요일이던 그날 천안문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100만 군중의 열기로 뜨거웠다. 꽃들로 파묻힌 인민영웅기념비에는 주은래의 거대한 초상화가 놓였고, 그 밑에는 “우리는 밤낮으로 경애하는 주 총리를 생각합니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가 걸렸다. 뒤이어 “주은래 총리는 영원 불멸!”, “주은래 총리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타도하라!”는 구호가 군중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4인방을 겨냥한 분노의 목소리였다.
그날밤 군중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고 일부만 광장을 지켰다. 그러자 4월 5일 새벽 1시, 수천 명의 민병과 경찰이 인민영웅기념비를 봉쇄했다. 그러고는 2000여 개의 화환은 치워버리고 현장을 지키던 57명은 끌고 갔다. 5일 아침 다시 광장으로 몰려든 군중은 밤새 화환이 사라지고 수십 명이 잡혀갔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수만 명의 군중이 민병과 경찰 지휘부로 달려가 차량과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낮이 지나고 밤 9시 반쯤, 갑자기 광장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1만여 명의 민병과 수천 명의 경찰·인민해방군이 일제히 군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군중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광장 곳곳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북경에서만 380여 명, 전국 각지에서 1000명 이상이 체포된 것으로만 전해졌다. 사람들은 그날의 비극을 1989년의 ‘천안문 사태’와 구별하기 위해 ‘제1차 천안문 사태’라 부르고 있다.
4인방 체포로 중국 역사의 물줄기가 다른 쪽으로 방향 틀어
주은래 사후 시작된 권력투쟁은 9개월 후인 9월 9일 모택동까지 죽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당시 모택동에 이은 서열 제2위는 화국봉이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모택동이 살아있을 때만 유효할 뿐 모택동이 없을 때는 위태위태했다. 4인방은 이런 화국봉을 압박해 바지저고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화국봉은 결국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화국봉은 모택동의 후원 말고는 권력 투쟁에 필요한 조직 기반이나 무력적 배경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으나 4인방이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다행히 당내에는 문화대혁명 초기, 4인방에게 쓰라린 굴욕을 맛보았던 섭검영이 건재했다. 섭검영은 공산당 부주석이면서 국방부장까지 겸하고 있던 실세 중의 실세였다. 4인방이 그토록 경계하는 등소평과도 코드가 맞았으며 1920년대 황포군관학교에서 알게 된 주은래의 소개로 공산당에 입당한 주은래의 맹우였다. 화국봉은 비밀리에 섭검영, 이선념 등 당·군 원로들과 반(反) 4인방 구도를 형성한 뒤 모택동의 경호를 맡아오던 왕동흥까지 포섭, 무력면에서는 4인방을 능가했다. 4인방 스스로도 군 기반이 취약한 걸 알고 그 대책으로 그들의 본거지인 상해에 민병 10만 명의 무장을 서둘렀으나 무력면에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4인방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섭검영에게 “4인방에 매수된 인민해방군 장갑부대가 북경으로 돌입할지 모른다”는 급박한 보고가 전달되었다. 바야흐로 먹느냐 먹히느냐의 긴박한 상황이었다. 4인방이 권력 탈취를 위해 최종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고 판단한 섭검영은 ‘선발제인’(先發制人․먼저 공격하면 뭇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을 주장하며 주저하고 있는 화국봉을 설득했다.
그리고 10월 6일 오후 8시가 지난 시간에 강청을 집에서 체포했다. 강청은 이미 사태를 예감하고 있었던 듯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나머지 세 사람도 차례로 검거했다. 중국의 운명을 좌우한 역사적 체포극은 불과 1시간 30분 만에 막을 내리고 역사의 물줄기는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4인방 지지자들까지 회유와 협박으로 무력화된 가운데 10월 12일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모택동 미망인 체포되다”라는 기사를 1면 머리에 실으면서 4인방 체포 사실이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강청은 1991년 자살로 생 마감
‘당 간부에 대한 박해’, ‘정권 전복’, ‘대중 탄압’, ‘상해 무장계획’ 등의 죄목으로 기소된 4인방 재판은 4년이 지난 1980년 11월 20일 시작되었다. 재판을 받는 태도는 각기 달랐다. 왕홍문은 기소 사실을 전면적으로 시인했고 요문원은 사소한 말 한마디까지 신경을 쓰면서도 혐의 사실을 대부분 인정했다. 반면 장춘교는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고 강청은 모택동의 노선을 충실히 수행했다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981년 1월 강청과 장춘교에게는 사형, 왕홍문과 요문원에게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사형이 언도되는 순간, 강청은 “혁명 무죄!”라고 외치며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중국 정부는 2년 동안 사형 집행을 연기했다가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그러고는 젊어서 자궁암을 앓았던 병력에 후두암과 식도암까지 겹치자 모택동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집에서 치료를 받도록 1984년 5월 극비리에 석방했다.
그러다가 1989년 초 중국의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어 정치범 석방서명 운동의 물결 속에서 한 잡지가 강청의 병보석 사실을 폭로하자 중국 정부는 그해 3월 강청을 재수감했다. 그러나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어 1991년 3월부터 다시 딸집에 나가 살도록 허락했으나 절망적인 병세에 딸과의 사이가 나빠져 1991년 5월 14일 아침 딸집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중국 정부는 모택동 비판을 다시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강청의 장례식을 일체 금지시켰다. 왕홍문은 1992년 8월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장춘교도 2005년 4월 숨졌으나 공식 발표는 없었고, 요문원은 20년의 형기를 마치고 1996년 출소했다가 2005년 12월 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