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에리사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 이끌어

↑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하고 귀국한 대표팀이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사진 맨 앞이 이에리사 선수

 

중3이던 1969년부터 전국종합선수권대회 7연패는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

현역 시절 이에리사(1954~ )는 여자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한 드라이브를 구사했다. 그의 주무기는 ‘루프 드라이브’였다. 공의 아랫면에 라켓을 마찰시키며 휘감아 올리면 스핀에 걸린 공이 공중에서 잠깐 포물선을 그리다가 역회전이 풀리는 순간 쏜살같이 상대 코트에 내리 꽂히는 변칙 타법이다. 상대가 라켓을 갖다 대도 반동이 너무 커 감당이 안 된다. 루프 드라이브를 구사하려면 다리, 허리, 어깨, 손목이 한순간에 같이 움직여 줘야 힘이 실리는 데 이에리사는 타고난 강한 어깨 덕에 하루 700개씩 ’루프 드라이브‘를 때리며 훈련했다.

이에리사는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라켓을 잡았다. ‘에리사’는 그가 태어나기 2년 전(1952년) 즉위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에서 딴 이름이다. 충남 홍성여중에서 탁구선수로 활동하던 이에리사가 전국적인 선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서울 문영여중으로 전학한 후였다. 1969년 5월 전국학생종별대회에서 개인전을 석권한 데 이어 11월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 실업팀 언니들을 모두 제치고 처음으로 국내 정상에 오른 게 문영여중 3학년 때였다. 1969년 중3의 어린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에리사는 그해부터 1975년까지 전국종합선수권대회를 7연패하며 한국 여자탁구를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었다.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70년 탁구명문 서울여상으로 진학한 그는 그해 4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주니어부 개인전 단식을 휩쓸고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고교 2년생이던 1971년 역시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으나 지구촌의 내로라 하는 고수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개인전 예선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맛봤다. 대신 한국은 단체전 3위를 차지해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에리사는 1972년 11월 스칸디나비아오픈에 출전, 고3 나이로 개인전 단식에 이어 박미라와 한 조를 이룬 복식까지 평정해 세계무대에 비로소 자신감을 가졌다.

 

1973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구기 종목 출전사상 첫 세계 제패

이에리사는 1973년 4월 5일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개막된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4단식 1복식으로 진행된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을 단식에, 이에리사와 박미라 조를 복식으로 내보냈다. 2개조로 나뉘어 풀리그를 벌여 각 조 1, 2위를 차지한 4개팀이 결승 리그에 진출한 예선 리그에서 한국은 B조에 속했다. 한국은 예선에서 루마니아, 서독, 스웨덴, 프랑스, 유고슬라비아를 잇달아 격파하며 5연승을 질주했다. 그것도 그냥 5연승이 아니라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았던 완벽한 5연승이었다.

4월 7일 예선 마지막 상대는 세계 최강 중국이었다. 한국은 결승 리그 진출이 확정되었지만 우승을 하려면 중국을 어떻게든 이겨야 했다. 예선 리그에서 겨룬 팀은 결승 리그에서 다시 싸우지 않고 예선 리그 성적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회 규정 때문이었다. 한국은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두 단식에서 먼저 승리해 기선을 잡았으나 복식에서 이에리사와 박미라조가 패해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네 번째 단식에서 이에리사가 또 승리해 중국전을 3-1 승리로 장식했다.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중국을 격파한 것은 1958년 도르트문트 대회 이후 15년 만이었다.

예선전에서 6전 6승으로 수위를 차지한 한국은 결선 리그 첫 상대인 헝가리를 3-1로 가볍게 물리쳤다. 마지막 결승전 상대는 전 대회 여자 단체전 챔피언 일본이었다. 일본과는 2년 전 열린 일본 나고야대회에서 2-3으로 패해 아쉽게 3위에 그쳤었다. 4월 9일 첫 단식에는 이에리사가 ‘루프 드라이브’로 완승을 거뒀다. 두 번째 단식에서 정현숙이 일본에 졌으나 이에리사·박미라조의 복식과 4번째 단식의 이에리사가 상대 선수를 완파함으로써 우리나라는 3-1로 여자 단체전 우승을 거머쥐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구기 종목 출전사상 첫 세계 제패였고, 손기정의 마라톤(1936년 올림픽), 장창선의 레슬링(1966년 세계선수권)에 이은 세계 대회 세번째 금메달이었다.

 

‘사라예보 영광’ 이후 전국에 탁구 열풍 불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임원과 선수 할 것 없이 서로 부둥켜 끌어안았다. 7000여 명의 관중 속에 파묻혀 가슴 졸이며 경기를 지켜본 21명의 교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울려나오지 않았다. 그때까지 한 번도 우승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애국가 테이프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을 앞두고 현지 언론은 대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한 이에리사에게 주목했다. 이에리사는 19전 전승을 기록, 전체 선수 중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유일한 선수였다. 그러나 이에리사도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을 감당하지 못해 개인전 4회전에서 아쉽게 탈락했다. 정현숙까지 준준결승에서 탈락한 가운데 그나마 박미라가 개인전 3위에 올라 단체전 우승국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해 12월 세계탁구연맹은 이에리사를 세계 랭킹 2위로 꼽았다. 박미라는 5위, 정현숙은 8위에 랭크되었다.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는 스포츠 선수로는 처음으로 국민훈장 최고훈장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이에리사는 1975년 캘커타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단체전 준우승을 이끌고 1976년 서독오픈에서는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사라예보의 영광’ 이후 전국 도처에 탁구장이 속속 개장하고 탁구대가 불티나게 팔리는 등 탁구 열풍이 불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 탁구는 1987년 제39회 뉴델리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양영자·현정화 복식조가 금메달을 따낼 때까지 세계대회 노메달의 수모를 당했다. 한동안 지도자의 길을 걷던 이에리사는 2005년 3월 여성으로는 처음 태릉선수촌장에 부임하고 2012년에는 국회에 입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IOC 위원이 되는 게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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