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3년 6월 9일 오전 포항제철소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오자 박태준 당시 포항종합제철 사장과 임직원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있다.
by 김지지
국내 철강 역사의 증인이자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초석인 포스코의 ‘포항 1고로’가 2021년 12월 28일 자정을 기해 쇳물 생산을 중단하고 29일 종풍(終風·고로가 수명을 다해 쇳물 생산을 마치는 과정)식을 갖고 은퇴했다. 이 땅에 첫 쇳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지 48년 6개월 만에 가동을 멈춘 것이다.
밝은 오렌지색 섬광이 치솟더니 시뻘건 쇳물이 힘차게 쏟아져
포항종합제철 박태준 사장과 직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고로(용광로) 아래 출선구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한 것은 1973년 6월 8일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그날 박태준이 태양열로 채화한 원화(元火)로 점화로에 불을 지핀 고로에서 쇳물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예정된 시각이 한참 지나도록 쇳물이 나오지 않자 박태준을 비롯한 임직원은 가슴을 졸인 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21시간이 지난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마침내 출선구가 열리면서 밝은 오렌지색 섬광이 몇 미터쯤 치솟는가 싶더니 용암처럼 시뻘건 쇳물이 힘차게 쏟아졌다.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 고로에서 쇳물이 생산되는 순간, 현장에 있던 직원들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다만 박태준의 표정만은 담담했다. 너무나 오랜 기다림 끝에 어렵게 쇳물이 나오는 순간을 보고 허탈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쇳물을 생산하기 시작한 포항종합제철소 1기 준공식은 1개월이 지난 7월 3일 오후 2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조강 생산 능력 103만t 규모의 포항종합제철의 완성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의 3배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 들어가 단일사업으로는 단군 이래 가장 큰 대역사였다. 이후 1고로는 사람으로 치면 평균수명 3배 이상 세월을 살아왔다. 고로는 내부에 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지피기까지 반년이 걸리기 때문에 항상 뜨거운 열기 속에 가동돼야 한다. 이 때문에 고로의 평균수명은 15년을 넘기기 어렵다. 포스코는 1979년과 1993년 두 차례 개보수를 거쳐 50년 가까이 1고로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철강 기술이 발달한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드문 사례다.
포항 1고로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상징으로, 한국 경제발전의 초석이자 젖줄 역할을 했다. 생산한 쇳물의 양은 총 5520만t에 이른다. 이는 30만t급 초대형 유조선 1380척을 건조하거나, 중형 자동차 552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또 인천대교 1623개를 건설할 수 있다. 포스코도 이 기간에 연간 조강 생산량 3594만t(2020년 기준)을 자랑하는 세계 6위 철강사로 성장했다. 포항 1고로의 성공적인 준공으로 한국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을 자력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조선, 자동차, 가전 등 국내 제조업은 단기간 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포항 1고로는 국가 경제 성장을 뒷받침한 공로를 인정받아 ‘민족 고로’ ‘경제 고로’로 불려왔다. 철강협회는 국내 최초·최장수 고로로서 포항 1고로의 상징적 의미를 기념해 첫 출선일인 6월 9일을 ‘철의 날’로 제정했다. 포스코는 1고로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기리기 위해 고로 내부를 완전히 냉각하고 철거 작업 등을 거쳐 ‘포항1고로 뮤지엄’으로 바꿔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다.

박정희 대통령, 1968년 포항종합제철 초대 사장에 박태준 임명
우리나라에서 종합제철사업의 꿈이 처음 펼쳐진 것은 1950년대의 자유당 말엽이었다. 1958년 8월 상공부가 연산 20만t 규모의 종합제철공장 건설계획을 발표했으나 외자 조달에 실패해 결국 포기해야 했다. 1961년 5·16 쿠데타 후에도 박정희의 군사혁명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제철소 건립을 구상했으나 또다시 꿈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박정희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제철소 건립은 196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방미 길에 미국 제철공업의 본고장 피츠버그를 둘러보면서 구체화되었다.
정부는 제철소 건립에 필요한 외자를 마련하기 위해 1966년 12월 미국의 피츠버그에서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한 국제 차관단회의를 마련했다. 회의 끝에 미국, 독일 등 4개국 7개 회사(1년 뒤 프랑스의 1개 회사가 추가되어 5개국 8개 회사)를 중심으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발족되었다. KISA는 현금 차관 대신 종합제철 건설에 필요한 설비를 차관 형식으로 제공하기 위한 기구였다. 정부는 1967년 4월 KISA와 가협정을 체결하고 1967년 10월 3일 경북 포항시 영일만 대송면에서 ‘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식’을 열었다. 종합제철공장건설추진위원장으로는 박태준(1927~2011) 대한중석 사장을 1967년 11월 임명했다.
“나는 고속도로를 감독할 거야.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박정희)
박태준은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나 6살이던 1933년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성장했다. 1945년 와세다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2학년을 마치고 중퇴한 후 귀국했다. 1948년 7월 육사 6기로 군문에 입문, 당시 육사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박정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박정희 소장은 1960년 1월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할 때 박태준을 인사참모로 발탁했다. 다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박태준을 쿠데타에 가담시키지 않았다.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 그의 가족을 책임져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5·16 후 박태준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 최고회의 위원을 거쳤다.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하고 1964년 12월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박 대통령은 일본 철강업계를 둘러본 박태준으로부터 1965년 6월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거야.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라고 말했다. 박태준은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대한중석을 2년 만에 흑자로 바꿔 놓을 정도로 경영 수완이 있었다. 박태준 공장건설추진위원장은 1967년 말, 박 대통령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낙하산 인사를 배제한 전폭적 인사권과 공사 발주 및 설비 구매의 전권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중상모략 시 해명 기회 등을 요구하는 메모였다. 박 대통령의 서명으로 이른바 ‘종이 마패’가 박태준 손에 쥐어졌다.
박태준은 1968년 3월 20일 포항종합제철의 창립총회에서 초대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회사 이름만 존재할 뿐 무엇하나 확정된 것이 없었다. 곧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영일만 언덕 위에 목조 2층 건물이 들어섰다. 2차대전 때 사막의 여우로 불린 롬멜 장군의 지휘력을 빗대 ‘롬멜하우스’로 불리게 될 건설본부였다. 이 건물과 백사장은 장차 한국 산업화의 심장으로 탈바꿈시킬 산실이 되었다.
1968년 6월부터 시작된 부지조성공사 때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1969년 2월 초, 돌연 미국과 서독의 차관 기피설이 나돌았다. KISA가 차관을 끌어들이기 위해 타당성 조사를 의뢰한 IBRD(세계은행)와 EXIM(미 수출입은행)이 “한국은 아직 내자를 동원할 역량이 없고 기술 축적도 없어 시기 상조”라는 결론을 낸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KISA는 결국 뒤로 나자빠졌다. 박태준은 1년여를 씨름하다가 KISA와 마지막 담판을 짓기 위해 1969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가 얻어낸 성과는 없었고 결론은 KISA의 불참이었다. 박태준은 머리를 식힐 겸 하와이로 날아갔다. 그때 한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기술 제휴선을 일본으로 바꾸고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한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이었다.

박태준의‘우향우 정신’은 영일만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각오
박태준은 서울로 돌아와 박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받고 일본 측의 의향을 타진했다. 일본은 한국의 농업 개발에 10년간 균등하게 투자하기로 한 청구권 자금을 제철소 건립으로 전용하고 조기 인출하는 건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우리 측의 끈질긴 설득 끝에 1969년 8월 26일, 국교정상화 이후 세 번째로 열린 도쿄의 한일각료회담에서 ‘하와이 구상’에 합의해주었다. 9월 17일 일본 측 조사단이 정밀조사를 위해 내한하고 뒤이어 IBRD 조사단도 재평가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IBRD의 역할은 우리가 일본에 내민 우리 측 어음에 보증을 서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IBRD의 조사 결과 역시 일본 측의 조사만큼이나 중요했다.
한국 측의 집요한 설득에 IBRD 조사단은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에 대한 경제적․기술적 타당성’을 인정하는 보고서를 썼다. 그 결과 1969년 12월 3일 한일 양국 대표가 포항제철 건설 자금조달을 위한 기본조약에 서명할 수 있었다. 3년 동안 7370만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유상 4290만 달러, 무상 3080만 달러) 및 일본수출입은행 상업차관 5000만 달러 등 총 1억2370만 달러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1970년 4월 1일, 마침내 ‘영일만의 기적’을 이룩하기 위한 첫 삽질이 시작되었다.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 기공식이었다. 이날의 발파 폭발음은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환하고 있음을 대내외에 알리는 팡파르였다. 자금 때문에 수년 간을 허송세월한 탓에 공기 단축을 해야 하는 박태준의 집념은 무서웠다. 그는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모두 오른쪽 영일만에 빠져 죽는다는 이른바 ‘우향우 정신’을 강조하며 모랫바람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박 대통령은 준공 때까지 총 13차례나 포항 현지를 방문해 직접 눈으로 현장을 보고 직원들을 격려했다. 그러기를 3년 3개월여. 1973년 6월 9일 오전, 마침내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제철소 고로에서 쇳물이 생산된 것이다.

“중국에는 박태준과 같은 인물이 없지 않습니까”
포항제철은 준공 첫 해에 40여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후 세계적인 석유 파동과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십 년 연속 흑자 경영이라는 세계 철강업계 초유의 기록을 시현했다. 그러자 박태준에 대한 찬사가 전 세계에서 끊이지 않았다. 1968년 IBRD 조사팀의 일원으로 방한해 당시 한국의 종합제철사업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냈던 IBRD의 한 조사원은 1988년 방한했을 때 “당시의 우리 판단은 모든 점에서 타당했으나 단 한가지 박태준의 존재를 간과한 것이 유일한 잘못이었다”라고 술회했다. 1978년 8월 일본을 방문한 등소평이 일본의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철과 같은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신일본제철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과 같은 인물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답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세계 철강업계는 한때 박태준을 가리켜 ‘미러클 메이커’라고 지칭하며 포철의 성공 사례를 케이스 스터디로 연구했다. 1991년 11월 일본 미쓰비시 종합연구소의 보고서와 1992년 5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만든 보고서 역시 박태준의 탁월한 리더십을 포철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