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알렉스 헤일리 원작 ‘뿌리’ TV 드라마 방송

↑ ‘뿌리’의 한 장면. 가운데가 쿤타 킨테다.

 

맬컴X의 자서전으로 먼저 이름 날려

알렉스 헤일리(1921~1992)는 뉴욕에서 태어나 대학을 중퇴한 뒤 20년(1939~1959년) 동안 미 해안경비대원으로 복무하면서 해상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틈틈이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1960년 흑인 이슬람 지도자 맬컴X의 인터뷰를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은 것을 계기로 맬컴X의 자서전을 집필함으로써 전업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자서전은 1963년 맬컴X의 요청을 받아 1년간의 인터뷰와 1년간의 집필을 거쳐 1965년 7월 출판되었으나 불행히도 맬컴X는 자서전 출판 5개월 전 피살되는 바람에 자신의 자서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자서전은 맬컴X의 극적인 죽음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600만 부나 팔리는 대박을 터뜨렸고, 헤일리는 유명 작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헤일리는 오랫동안 별러온 소설을 구상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에게서 들어온 미국 흑인 노예들의 가슴 아픈 역사였다. 흑인 가족사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헤일리는 먼저 ‘토비 아저씨’라는 6대조 할아버지를 추적했다. 장장 12년 동안 미국의 도서관, 연구소 등 60개소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아프리카의 감비아 강변 주푸레 마을까지 찾아가 자신의 조상 이름이 ‘쿤타 킨테’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영국에서도 당시 노예선에 관한 기록을 조사한 끝에 쿤타 킨테에 관한 구전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헤일리는 쿤타 킨테가 겪었던 노예선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기 위해 아프리카발 미국행 화물선을 타고 열흘 동안 밤마다 속옷만 입은 채 어둡고 추운 배 밑창의 짐칸에서 지내기도 했다. 12년 동안 80만㎞를 돌아다니고 수천 명의 사람을 만나 확인한 그의 조상 쿤타 킨테의 과거는 이랬다.

 

미 TV 드라마 사상 전무한 기록 세워

1767년 쿤타 킨테는 마을 근처 숲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혀 노예선에 실려 다른 흑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보내졌다. 돼지우리나 다름없는 노예선 지하에서 3개월을 지내는 동안 흑인들은 선상 반란을 일으켜보지만 제압당하고, 결국 미국에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다. 농장 주인에 의해 ‘토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쿤타 킨테는 가혹한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농장주 동생에게 다시 팔려 여성 노예인 벨과 부부가 되었다. 노예의 질곡은 자손 대대로 세습되었고, 쿤타 킨테의 피는 몇 대를 거쳐 헤일리에게까지 이어졌다.

쿤타 킨테의 파란만장한 삶은 587쪽의 대작소설 ‘뿌리’를 통해 세상에 소개되었다. 1976년 8월 17일 출간된 ‘뿌리’는 100만 부 이상 팔리고, 이듬해 4월 퓰리처상 특별상 수상작으로 뽑히는 등 대성공을 거뒀다. 소설이 완성되기도 전에 미 ABC 방송은 그동안 흑인 자신이 노예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거의 없고, 백인을 포함하여 자기의 뿌리를 캐고자 하는 분위기가 미국에 강하다는 점에 착안해 드라마 제작에 착수했다.

600만 달러의 거금이 들어간 드라마는 2년의 제작과정을 거쳐, 소설이 출간된 1976년 12시간짜리로 완성되었다. 1977년 1월 23일부터 30일까지 8일 동안 미 전역에 방송된 드라마에 쏟아진 반응은 소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미 TV 시청자의 약 80%에 해당하는 3640만 가구, 1억3000만 명을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들이는 미 TV 드라마 사상 전무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에미상 37개 부문 후보에 지명되어 9개 부문을 휩쓸고, 골든 글로브와 피바디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3월 25일부터 4월 1일까지 TBC-TV를 통해 연속 방송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알렉스 헤일리와 그의 소설 ‘ROOTS’

 

방송 후,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흑인들의 아프리카 여행 붐 일어나

‘뿌리’ 열풍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먼저 거론되는 것이 헤일리가 기울인 12년간의 끈질긴 노력이다. 여기에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자유를 찾는 감동적인 스토리, 자신의 뿌리에 대한 향수와 미국 땅에 흘러들어온 과정을 반추하는 이민자 특유의 감상도 인기몰이에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노예선의 생생한 묘사와 탈주하려다 실패한 노예의 발을 자르는 잔혹한 형벌, 흑인의 딸들을 마구 겁탈하는 백인 주인들, 백인의 힘에 계속 억눌려가며 자유를 갈구하는 흑인 노예 일가의 원한 등 온갖 극적인 요소들이 다양하게 어우러진 것도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또한 흑인노예는 거의 전부가 착하고 선량하고 용감하게 그린 반면 백인은 거의 전부가 비겁하고 무자비한 악인으로 설정해 선악을 선명히 대조시키는 미국식 서부극의 수법이 재미를 배가시켰다는 분석이다.

‘뿌리’가 방송된 후 호적 보관제도가 없고 몇 대에 걸쳐 핵가족 중심으로 이어져 선조가 누구인지 관심조차 없던 미국에서 조상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또 자신의 뿌리를 찾아 순례하겠다는 흑인들의 아프리카 여행 붐이 일어난 것도 ‘뿌리’가 불러온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뿌리’에 대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1965년 앨라배마주의 셀마에서 벌어진 가두 시위 이후 가장 중요한 공민권 사건이었다”, “미국의 인종관계를 가르치는 가장 극적인 교육이었다”는 등 온갖 찬사가 있을 정도로 ‘뿌리’가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이 컸다. 흠이라면 표절 시비에 휘말리고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등 논란에 휘말린 것이다. 헤일리는 결국 ‘뿌리’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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