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일본의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 건국… 중국 청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는 2년 후 만주국 황제로 격상

 

부의는 2살 때 청국 황제로 옹립되었다가 6살 때 쫓겨난 비운의 황제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도발하자 국제연맹이 조사단을 구성했다. 조사단은 1932년 2월부터 7월까지 일본과 중국에서 관련자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사했으나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의 관동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초 계획대로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관동군이 만주국의 꼭두각시로 내세운 인물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1906~1967)였다.

부의는 청조의 11대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재풍의 아들로 태어났다. 2살 때이던 1908년 서태후에 의해 임종을 앞둔 광서제의 후계자로 지명됨으로써 황제(선통제)로 옹립되었다. 부의의 아버지와 광서제의 황후가 섭정을 하던 중 1912년 2월 당대의 군사 실력자 원세개가 임시대총통에 오르면서 부의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로써 286년 간 이어져온 청조는 물론 2000년 이상 유지해온 중국의 황제 지배 체제도 무너졌다. 부의는 자금성에서 명목상의 황제로 지내다가 1917년 7월 왕정 복고를 꾀한 북양 군벌 장훈의 쿠데타 덕에 5년 만에 황제로 복위했다. 그러나 쿠데타는 ‘12일 천하’에 그쳤다.

부의가 일본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대지진이었다. 부의가 의연금을 전달하고 일본 정부가 감사를 표시하면서 각별해졌다. 1924년 10월 만주 군벌 장작림의 봉천파와 오패부·풍옥상 등 직예파 두 군벌 사이에 일어난 이른바 ‘제2차 봉·직전쟁’도 부의와 일제를 더욱 가깝게 했다. 봉직전쟁 승리로 북경을 차지한 풍옥상이 부의를 자금성에서 내쫓자 부의는 1924년 11월 북경의 일본공사관에 머물다가 1925년 2월 천진의 일본 조계지 내 장소로 옮겨 일본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만주국 황제였으나 관동군의 결정 사항 추인하는 허수아비

일본이 만주사변 후 부의를 꼭두각시로 내세운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지로 삼게 되면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체결된 9개국 조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미국·영국·프랑스·일본·중국 등이 가입한 9개국 조약은 각국 해군의 감축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중국의 주권·독립·영토 보전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 조약 때문에 관동군은 만주를 직접 통치하기보다는 독립국가를 세워 중국의 행정적 지배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겠다는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더구나 부의가 청조 부흥의 환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호시탐탐 중국을 침략하려는 일본에는 이용 가치가 높은 상품이었다. 부의는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일본의 초대를 받아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천황과 함께 도쿄 교외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된 관병식에 참석했다. 그날 행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이가 이봉창 열사다.

관동군은 만주국 수립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1932년 2월 18일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3월 1일 부의를 국가원수 격인 ‘집정’으로 내세워 만주국 건국을 선언했다. 3월 9일에는 관동군 사령관과 만주철도 총재를 비롯해 만·한·몽·일·조선(滿·漢·蒙·日·朝鮮)의 5족 대표 200여 명이 참석한 집정 취임식을 신경(지금의 장춘)에서 열고 만주국 수립을 공식화했다. 관동군은 “종족 간의 구별을 없애고 국가 간의 싸움을 제거해 왕도낙토를 실현하자”며 건국 이념을 ‘오족협화’, ‘왕도낙토’ 등의 미사여구로 포장했다.

만주국은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골 동부 지역, 열하성을 판도로 삼았다. 면적은 113만㎢(한반도의 6배)에 달했다. 1937년 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만주에 살고 있는 각 민족은 한족 81.6%(2,970만 명), 만주족 12.0%(435만 명), 몽고족 2.7%(98만 명), 조선인 2.6%(93만 명), 일본인 1.2%(42만 명), 유럽인 0.03%(1만 명) 등으로 분포되었다. 총인구는 3,639만 명이었다.

 

만주국 수립 후, 만주는 무서운 속도로 근대화돼

만주사변을 조사한 국제연맹의 리턴 보고서는 1932년 10월 1일 국제연맹에 제출되었다. 일본의 만주사변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할 수 없고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라는 게 요지였다. 일본은 조사 결과를 사전에 감지하고 1932년 9월 15일 ‘일만(日滿) 의정서’에 조인하는 것으로 만주국을 독립 국가로 정식 승인했다. 외교적인 노력도 병행해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등으로부터 만주국 승인을 끌어냈다. 그러나 1933년 2월 25일 국제연맹이 리턴 보고서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자 이에 반발해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국은 1934년 3월 1일 제정(帝政)으로 바뀌고 부의는 집정에서 황제로 격상했다. 그렇다고 실질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치·군사적 실권은 여전히 관동군 손에 있었고 경제권은 그곳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해 만주국이 마치 독립국가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황제, 국무원 총리, 각부 장관, 성장(省長), 현장(縣長) 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장, 만주국 군대나 경찰의 주요 보직에 다수 중국인을 앉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만주국의 최고 통치권자인 관동군이 국정을 총괄하고 일본인으로 구성된 총무청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일본인은 만주국 권력의 핵심인 국무원·최고법원·최고검찰청 관리의 90%를 차지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만주국의 군인과 경찰도 그들이 지휘했다. 만주국 황제는 관동군과 총무청에서 결정한 사항을 추인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만주국 수립 후 만주는 무서운 속도로 근대화되었다. 만주국은 인구 16만 명의 변두리 소읍에 불과했던 신경을 수도로 정하고 도시명은 신경특별시로 개칭했다. 일본 최고의 도시 건설 전문가들도 속속 만주로 건너와 프랑스 파리와 호주 캔버라의 도시계획을 모방하고 전원도시 운동의 주창자인 에버니저 하워드의 이론을 참고해 ‘대신경 도시계획’을 마련했다.

도로 시스템은 대형 로터리(회전교차로)를 중심으로 한 방사형으로 설계되었다. 도시 곳곳에는 대규모 녹지가 조성되어 녹색 도시로 이름난 미국 워싱턴의 녹지 면적을 능가했다. 도시 전체에는 상하수도 시스템을 완비하고 아시아 최초로 수세식 변기를 설치했다. 1940년대 초에는 중국 대륙 최초로 지하철 건설 계획을 세웠으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착공하지는 못했다.

1932년 말 일본인 1만 8,000여 명, 조선인 4,000여 명, 중국인 14만 명을 포함해 16만 명이던 신경시 인구는 1939년 일본인 8만 9,000여 명, 조선인 1만 1,000여 명, 중국인 29만 3,000여 명 등 총 39만 여명으로 7년간 2배 이상 증가했다. 중화학과 군수공업단지 건설에 힘입어 1931년 2억 2,400만 엔이던 공업생산은 1943년 39억 3,600만 엔으로 뛰었다. 일본이 1930년대 세계를 휩쓴 대공황에서 빨리 벗어난 것도 만주 특수 덕분이었다.

 

만주국은 종전 후 남북한의 권력을 잉태한 공장

만주국은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끝이 났지만 한일 양국에는 이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7년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된 후 관료가 통제하는 경제는 종전 후 일본에 이식되어 관주도형 경제로 굳어졌다. 기시 노부스케로 대표되는 이른바 ‘만주 인맥’은 전후 일본 보수 정치의 한 축을 형성했다.

만주국은 종전 후 남북한의 권력을 잉태한 공장이기도 했다.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쪽 지도자들과 박정희, 정일권 등 남쪽 지도자들 모두 만주국의 질서에 저항 또는 순응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해방 후 만주군 출신의 만주 인맥이 한 축을 형성했다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한국의 근대화 전개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만주국은 박정희의 국가주도형 개발 모델의 원형이었다. 만주는 ‘동양의 서부’로 불리며 당시 주변 여러 민족의 도피처 역할을 했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만주로 숨어들었고 본국에서 차별을 받고 살아온 부락민 출신 일본인들은 만주에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다.

조선에는 만주 이민 열풍이 휘몰아쳤다. 총독부가 1936년 내놓은 ‘만주 집단이민 안(案)’이 열풍을 부추겼다. 1930년대 후반 경성역에는 개척민을 실은 북만주행 이민 열차가 거의 매일같이 지나갔다. 1932년 60만 명 정도이던 만주 거주 조선인 인구는 1942년 150만 명을 돌파했다. 10년 동안 2,400만 명 인구 중 100만 명이 빠져나갔으니 가히 ‘엑소더스’(대탈출)라 불릴 만했다. 조선에서 살 수 없어 떠난 방랑과 유랑의 길이었으나 척박하기는 만주도 마찬가지였다.

만주는 조선의 망명객들에게는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고 조선의 엘리트들에게는 재기의 무대였다. 최남선은 만주국의 친일지 ‘만몽일보’의 고문과 만주국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건국대 교수를 역임했다. 염상섭은 친일 성향의 조선어신문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활동했다. 시인 백석 역시 1939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근무했다.

만주국은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관동군이 괴멸되고 8월 17일 부의가 소련군에 체포된 후 저절로 소멸했다. 부의는 1946년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석하고 1950년 중국으로 압송되어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다. 1959년 모택동의 특별사면령으로 풀려난 뒤에는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다가 1967년 10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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