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페라 역사에서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은 기원전(BC)”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체피렐리는 마리아 칼라스(1923~1977)를 가리켜 “오페라 역사에서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은 기원전(BC)”이라고 칭송했다. 그의 말을 기준으로 하면 칼라스의 BC와 그 이후를 구분하는 경계는 1947년이 된다. 칼라스가 자신의 데뷔 무대인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에 입성한 것도, 무명의 설움을 떨쳐버리는 데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은 남편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난 것도 1947년이기 때문이다.
칼라스는 미국 뉴욕에서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노래에 재능이 있었으나 지독한 근시에 심한 비만이어서 주목을 끌진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오페라 가수로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1937년 이혼 후 14살의 칼라스를 데리고 자신의 고국 그리스로 돌아갔다. 칼라스는 아테네 국립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타고난 재능 덕에 곧 프리마 돈나로 가다듬어져 아테네 오페라단에 입단했다.
자신감을 찾은 칼라스는 1945년 미국으로 돌아가 오페라 무대를 두드렸다. 하지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어렵게 따낸 계약도 기획사의 도산으로 물거품이 되는 등 하는 일마다 순탄치 않아 결국 이탈리아로 건너가야 했다. 이탈리아에서 베로나 오페라 음악제의 ‘라 조콘다’ 오디션을 통과해 1947년 8월 2일 어렵게 무대에 올랐으나 극도의 긴장으로 가창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 기대 만큼의 반향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이 공연을 계기로 2년 후 남편이 될 메네기니와 당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을 만났으니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칼라스와 메네기니는 예술적 동지 관계를 거쳐 27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1949년 4월 결혼했다. 남편은 칼라스가 재능을 발휘하도록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칼라스는 남편의 도움 덕에 유럽 각지의 무대에 섰다. 1951년에는 콧대 높은 라 스칼라 무대에도 당당히 데뷔했다. 1954년에는 90㎏이나 되는 체중을 23㎏이나 줄이는 데 성공, 오페라 여가수는 뚱뚱하다는 통념을 깨뜨리며 호리호리한 몸매에서도 뛰어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보였다.
강렬하고 개성 넘치는 목소리로 전 세계 오페라 팬들 사로잡아
유럽에서의 성공은 미국 무대로 이어졌다.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 무대 위의 칼라스는 7년 전 미국 무대에서 퇴짜를 맞고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떠났던 그 칼라스가 아니었다. 1956년에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로 과거 자신을 거부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열린 ‘토스카’ 공연에서는 10여 차례의 커튼콜을 받는 등 무대마다 절찬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루치아’를 공연할 때는 1만여 명의 관객이 2,000석뿐인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칼라스는 강렬하고 개성이 넘치는 목소리,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흡인력, 무대를 장악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렇게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무대 밖의 칼라스는 변덕과 질투심, 탐욕과 우월감, 자기중심적 성격들로 인해 조용한 날이 없었다. 동료 음악가와 불화하고 극장주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언론과는 삐걱거렸다. 1958년 1월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한 공연 때는 몸이 아프다며 1막이 끝난 후 집으로 가버렸고 1958년 5월에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라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과 크게 다퉈 결국 라 스칼라와 결별했다.
남편의 지극한 정성에도 다른 남자들의 사랑을 갈구
무대 밖에서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들의 사랑을 갈구했다. 1954년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비스콘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접기도 했다. 칼라스의 인생행로에 중대한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58년 파리 공연에서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를 만나고부터였다.
1959년 7월 오나시스가 초대한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유람선의 항해 여행이 끝나갈 즈음 칼라스와 오나시스는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만들어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뚱뚱하고 유명하지도 않은 자신을 감싸 안은 남편의 사랑도, 오나시스가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모두 잊은 채 오나시스에게 빠져들었다.
칼라스는 결국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남편이 받아들이지 않자 오나시스와 동거에 들어가 공식적으로 오나시스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사랑에 빠진 칼라스는 무대보다는 상류층 파티에 빠져들고 자신의 공연 스케줄보다는 오나시스의 일정에 관심을 보였다. 노래와 무대도 멀리했다. 지인들의 권유로 1964년 다시 무대에 섰으나 이미 노래도 시들해지고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았다.
결국 칼라스는 1965년 7월 5일 로열 갈라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1966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획득하면서까지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갈망했다. 당시 그리스는 그리스정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혼인은 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메네기니와의 결혼은 취소되었다. 오나시스는 값비싼 보석과 옷, 부동산을 선물하며 칼라스에게 사랑과 애정을 쏟았지만 그녀가 아기를 갖는 것만은 극구 반대했다. 이 때문에 칼라스는 43세에 임신했는데도 오나시스의 강요로 유산해야 했다.
‘선박왕’ 오나시스가 죽고 2년 후 쓸쓸히 53년의 생을 마감
1968년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나시스가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과 재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은 1968년 10월 20일 결혼했다. 칼라스는 이후 음악 전문지보다 주간지 가십난에 더 자주 등장하는 처지가 되자 파리의 아파트에 칩거하면서 세간의 동정과 비웃음을 피해갔다. 1969년 이탈리아 영화 ‘메데아’에 출연하고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재기를 시도했지만 우울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옛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를 비롯한 지인들의 설득으로 1973~1974년 미국, 유럽, 아시아를 경유하는 세계 투어를 시작했다. 한국도 방문해 1974년 11월 이화여대 강당에서 ‘카르멘’, ‘라보엠’, ‘토스카’ 등을 선보였다. 목소리는 과거의 칼라스를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지만 칼라스는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특유의 음악성과 표현력으로 무대를 장악한 그의 공연은 연일 성황을 이뤘다. 관객은 칼라스의 주옥같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서 있는 칼라스의 전설적인 아우라에 심취했다.
1차 투어를 통해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 무대라는 것을 깨닫고 2차 투어를 계획하던 1975년 3월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마지막까지 결합을 기대했던 오나시스가 죽었다는 것이다. 칼라스는 생의 의욕을 모두 상실한 채 2년 동안 파리에서 은둔하다 1977년 9월 16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쓸쓸하게 53년의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