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대한민국 첫 하계올림픽 출전… 김성집 역도에서 동메달 따내 대한민국 최초 메달리스트로 이름 올려

↑ 런던 올림픽 입촌식을 하는 대한민국 선수단(1948년 7월 9일)

 

선수단, 21일 동안 9개국 12개 도시 거쳐 런던에 도착

1948년 7월 29일, 제14회 올림픽이 세계 59개국 4,0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영국 런던에서 개막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후 2차대전의 발발로 도쿄 올림픽(1940)과 런던 올림픽(1944)이 무산되어 12년 만에 치러진 올림픽에 처음 명함을 내민 신생국은 한국을 포함해 15개국이었다. 다만 일본, 독일, 이탈리아는 전범국가였기 때문에 초청받지 못했고 중국은 국공내전이 한창이어서 소련은 미국과 냉전이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스스로 참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의 혼란과 경제난이 심각했으나 축구, 복싱, 역도, 육상, 레슬링, 사이클, 남자농구 등 7개 종목 50명의 선수와 17명의 임원 등 총 67명이 참가했다. 문제는 경비였다. 그래서 준비한 게 액면가 100원짜리 올림픽후원권(1947.12 발행) 140만 장이었다. 공채와 복권 성격의 올림픽후원권에 걸린 1등 상금은 100만 원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8,300원, 소고기 한 근이 260원 하던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었다.

선수단은 1948년 6월 21일 종로2가 서울YMCA를 출발해 가두행진으로 서울역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6월 22일 부산을 출발, 일본 후쿠오카를 거쳐 6월 26일 요코하마에서 3만 톤급 대형 여객선 ‘제너럴 맥스’로 갈아타고 중국 상해를 거쳐 7월 2일 홍콩에 도착했다.

유럽행 항공기는 정원 40명의 4발 프로펠러 비행기뿐이어서 선수단은 1진(7.4), 2진(7.7)으로 나누어 출발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항공기가 방콕(태국), 콜카타(인도), 바그다드(이라크), 카이로(이집트), 로마(이탈리아), 암스테르담(네덜란드)을 거쳐야 하는 머나먼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21일 동안 9개국 12개 도시를 거쳐 마지막 2진이 파김치 상태로 런던에 도착한 것은 7월 11일 저녁이었다. 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한 손기정은 부산에서 맹장수술을 마치고 홀로 먼 길을 돌아 7월 21일 도착했다. 우리 선수단은 7월 29일 개막식에 손기정 기수를 선두로 당당하게 입장했다.

 

종합 순위는 1위 미국, 2위 스웨덴, 3위 프랑스… 대한민국은 59개 참가국 중 32위

7월 29일 개막한 올림픽 첫 출전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는 게 무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래도 희망까지 접을 수는 없었다. 기적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홍일점인 박봉식이 투원반에서 하위권으로 탈락하고, 남자농구는 2승2패로 8강전에 오르긴 했지만 본선에서 연패를 거듭해 결국 8위에 그쳤다. 레슬링은 2일째 경기에서 4개 체급 모두 패하고, 축구는 멕시코와 첫 경기에서 5-3으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나 2회전 경기에서 런던 올림픽 우승팀 스웨덴에게 12-0으로 대패해 탈락했다. 8월 7일의 마라톤은 1년 전 서윤복이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한 터라 좋은 성적을 기대했으나 서윤복은 27위, 홍종오는 25위, 최윤칠은 레이스 도중 기권해 국민을 안타깝게 했다.

낭보는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날아들었다. 8월 10일 김성집이 역도 미들급(75kg)에서 동메달을 따내 한국의 올림픽 출전 사상 첫 메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김성집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추상 종목에서 122.5kg, 인상에서 112.5kg을 기록해 3위에 바짝 달라붙었다가 마지막 용상에서 145kg을 번쩍 들어올려 총계 380kg으로 공동 3위에 올랐다. 다행히 체중이 1.92kg 적게 나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틀 후 한수안도 복싱 플라이급에서 동메달을 획득, 두 번째 태극기를 시상대에 게양시켰다. 한국계 미국인 새미 리는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런던 올림픽에서 역도 바벨을 들어올리는 김성집

 

8월 14일 막을 내린 런던 올림픽의 종합 순위는 1위 미국, 2위 스웨덴, 3위 프랑스였다. 한국은 59개 참가국 중 32위를 차지했다. 중국과 일본이 참가하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금메달 1개를 딴 인도 다음의 2위였다.

사실 런던 올림픽은 한국의 첫 올림픽 출전은 아니었다. 1948년 1월 30일부터 10일 동안 열렸던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이미 출전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단 3명뿐인 초미니 선수단으로 노메달에 그쳤지만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곧 정부가 수립될 독립국가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비록 일본 이름을 달고 출전했지만 한국인이 처음 출전한 올림픽은 1932년의 LA 올림픽이다. 마라톤과 복싱에서 일본 대표로 3명이 출전해 김은배가 마라톤에서 6위를 기록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손기정·남승룡 등 7명의 선수가 일본 대표로 참가해 마라톤에서 금․동메달을 휩쓸었다.

 

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 따낸 김성집은 올림픽 출전 사상 첫 메달의 주인공 

대한민국에 최초 메달을 안겨준 김성집(1919~2016)은 평생을 스포츠 외길만을 걸어온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 그 자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역도에 입문하고 휘문고보 시절이던 1936년 일본 역도선수권대회와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조선 선수를 가급적 배제하려 한 일본체육회의 방해로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일본은 베를린 올림픽에 역도 선수를 아예 출전시키지 않았다.

김성집은 1943년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휘문고에서 체육교사로 활동하던 중 해방 후 런던 올림픽 출전이 확정되자 운동선수로는 적지 않은 29살의 나이로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출전해 올림픽 2회 연속 동메달 획득의 쾌거를 이루고 19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도 출전해 37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5위에 오르고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 후 은퇴해 체육 행정가로 변신했다.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시절엔 민관식 대한체육회장과 함께 1966년 12월 완공한 태릉선수촌 건립을 주도했으며 1968년부터 1976년까지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을 지내고 1976년 9월부터 18년간 태릉선수촌장을 맡아 한국 스포츠의 부흥을 이끌었다. 선수촌장 시절엔 흐트러짐 없고 수도자처럼 절제된 생활을 했던 까닭에 ‘걸어다니는 시계’, ‘태릉의 기인’으로 불렸다.

대쪽 같은 성격의 그는 1990년대 말 모교인 고려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했지만 “그냥 운동선수로 남아야 김성집”이라며 끝내 고사하는 일화를 남겼다. 그는 미·소 간 갈등으로 반쪽 대회가 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빼놓고는 해방 후 열린 하계올림픽에 11번, 아시아경기에 9번이나 선수·감독·임원·부단장·단장 등으로 참가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2011년 처음 제정된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 손기정과 함께 선정되었다. 한수안은 한국 복싱팀의 효시인 해병대팀을 창단하고 프로복서 현역 시절 플라이급에서 미들급에 걸쳐 국내 1위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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