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오스만튀르크 623년 만에 멸망…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다음해 초대 대통령 취임

제국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린 것은 러시아와의 전쟁 참패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1299년 창건되어 수세기 동안 전성기를 구가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의 동로마를 함락해 유럽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고 아랍지역, 북아프리카, 발칸반도, 흑해 북부, 코카서스 남부까지 아우르며 로마 시대 이후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17세기 말 서유럽의 관문인 오스트리아와 일전을 벌였다가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여기에 술탄(황제)의 무능, 지배계급 내부의 알력, 무역로 쇠퇴에 따른 산업 침체 등이 거듭되면서 점차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무엇보다 오스만 제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것은 1877~1878년 러시아와의 전쟁 참패와 이후 점화된 발칸반도 국가들의 독립 열풍이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루마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 등 발칸반도 국가들의 독립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자 부패하고 무능한 술탄 체제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국가를 현대화해야 한다는 각성의 목소리가 확산했다. 1889년 개혁을 추구하는 청년 장교와 시민들이 ‘통일진보위원회’를 비밀리에 결성한 것은 그런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 유럽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의 강요로 1876년 술탄 압둘하미드 2세가 제정·공포했던 근대적·자유주의적 헌법을 압둘하미드 2세가 이듬해 폐기하고 절대주의적 전제정치를 강행한 것도 이들에게는 개혁의 대상이었다.

술탄은 개혁주의자들을 국외로 추방하고 감금했으나 통일진보위원회는 세력을 키워 1908년 6월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이른바 ‘청년 튀르크인 혁명’을 성공시켰다. 혁명의 성공은 과거 술탄이 폐기한 헌법의 부활과 총선을 통한 의회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1909년에는 압둘하미드 2세를 폐위하고 메흐메트 5세를 새 술탄으로 앉혔다. 정적들도 제거한 후 정부 요직을 차지했으나 이질적 구성과 분열상으로 정파간의 이합 집산이 반복되었다.

 

오스만튀르크군은 예상대로 종이호랑이

이런 와중에 1911년 9월 이탈리아가 리비아의 트리폴리를 침공했다. 당시 트리폴리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었다. 이탈리아는 1주일 만에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11월 5일 트리폴리 병합을 선언했다. 무력했던 오스만튀르크는 1912년 3월 휴전 조약을 체결, 트리폴리를 비롯해 북아프리카 영토의 상당 부분을 이탈리아에 넘겨주었다. 이로인해 통일진보위원회는 ‘자유연합’ 연정에 정권을 내주고 물러났다.

그러자 이에 고무된 발칸반도 4개국이 1912년 3~5월 ‘발칸동맹’을 체결하고 1912년 10월 오스만튀르크 영내의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독립운동 지원을 명분으로 삼아 오스만을 공격함으로써 제1차 발칸전쟁을 촉발했다. 예상대로 오스만튀르크군은 종이호랑이였다. 결국 오스만튀르크는 1912년 11월 알바니아가 독립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12월 발칸동맹국과 영국 런던에서 강회회담을 해야 했다.

자유연합 정권마저 발칸전쟁에서 패하자 통일진보위원회 청년 장교들이 정치적 반격을 개시했다. 청년 장교들은 1913년 1월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의 정권을 전복시키고 새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자 발칸동맹국이 휴전을 취소하고 전투를 재개했다. 결국 오스만튀르크는 1913년 5월 30일 강화조약을 맺어 이스탄불을 제외한 유럽 대륙에 있는 영토 대부분과 크레타섬을 잃었다.

 

결정적으로 쇠락을 가속화한 것은 1914년 발발한 1차대전

결정적으로 오스만의 쇠락을 가속화한 것은 1914년 발발한 1차대전이었다. 독일 측의 동맹국에 가담했다가 1918년 독일의 패전과 함께 연합국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시절의 영화는 고사하고 오랜 세월 오스만튀르크인들이 터 잡고 살아온 땅마저 연합국에 빼앗길 위기에 놓였다. 그 누란의 위기 상황을 타개한 이가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다.

아타튀르크는 당시는 오스만의 영토였으나 지금은 그리스 땅인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났다. 1905년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통일진보위원회에 가입·활동했다. 1908년 6월 통일진보위원회 군대가 이스탄불로 진격할 때는 진공 작전을 지휘했다.

아타튀르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차대전 때였다. 그는 오스만이 독일 측의 동맹국에 가담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막상 전쟁에 돌입하자 조국의 승리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1915년 4월 연합군과의 갈리폴리 전투에서도 뛰어난 작전을 펼쳐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갈리폴리 전투는 서구 열강에 패배만 하던 오스만에 실로 오랜만에 값진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 승리로 그는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후에도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오스만은 1차대전에 패전해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수도 이스탄불에 연합군이 진주하고 500여 년 동안 오스만의 지배를 받아오다 독립한 그리스까지 에게해에 연한 교역 도시 이즈미르를 점령(1919.5)할 정도로 오스만은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아타튀르크는 1919년 5월 아나톨리아(소아시아)로 잠입,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오스만의 병사들을 아나톨리아로 그러모아 민병대를 조직한 뒤 총선을 요구했다. 패전 후 우왕좌왕하던 정부는 아타튀르크의 압력에 굴복, 1920년 1월 총선을 실시하고 새 의회를 구성했다.

새 의회는 그 무렵 연합국끼리 논의하고 있는 대 오스만 조약이 불평등하다며 종전(1918.10) 당시의 영토 범위 내에서 독립한다는 국민헌장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연합국이 무력으로 간섭했다. 그들은 1920년 3월 이스탄불의 점령지를 확대하고 의원들을 체포·구금한 뒤 의회를 해산했다. 아타튀르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1920년 4월 아나톨리아 내륙의 앙고라(나중에 앙카라로 개명)에서 ‘터키 대국민의회’를 구성한 뒤 행정수반으로 연합국의 무력 개입에 저항했다.

 

아타튀르크의 관심은 과거의 광활했던 영토가 아니라 터키 민족만의 독립된 영토

연합국은 오스만 정부의 의견을 묵살한 채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오스만의 영토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오스만은 이스탄불과 트라키아(유럽 대륙에 위치한 발칸반도의 남부 지역) 일부 지역에서만 제한된 영유권을 행사할 뿐 아랍 지역은 모두 내놓아야 했다. 아나톨리아의 광범위한 지역은 신생 아르메니아에, 아나톨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에게해 섬들과 이즈미르는 그리스에 양도해야 했다. 다르다넬스·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해는 국제화되고 외국 군대가 주둔했다.

당시 아타튀르크의 관심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광활했던 영토가 아니라 터키 민족만의 독립된 영토였다. 비록 1차대전 이전 터키의 국외 영토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국의 고유 영토만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겠다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그런데도 연합국이 터키 고유 영토마저 분할하려 하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내에 주둔하고 있는 외세를 상대로 전투를 시작했다. 1920~1921년 전투 결과, 동쪽 영토는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아(현 조지아)로부터 빼앗고, 남쪽의 프랑스군은 시리아로 쫓아냈다. 영국을 믿고 영토를 확대하려 한 그리스군도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터키 땅에서 몰아냈다. 연합국은 결국 아타튀르크를 터키 대표로 인정하고 모두 철수했다.

한편 대국민의회는 1921년 1월 기본법을 제정해 주권은 술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고, 대국민의회가 국민의 유일한 대표 기구임을 선언했다. 국명은 ‘튀르키예(영어로 Turkey)’로 정하고 국가 운영의 실권은 아타튀르크가 주도하는 집행위가 장악했다. 1922년 11월에는 술탄과 칼리프(이슬람교 최고 지도자)를 분리하고 술탄제 폐지를 의결한 뒤 술탄 메흐메트 6세를 축출했다. 이로써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623년만에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23년 10월, 아타튀르크를 초대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 선포

연합국은 터키의 실체를 인정해 1923년 7월 24일, 3년 전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로잔 조약으로 대체했다. 조약에 따라 터키는 터키 영토의 보존과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받고 대국민회의는 터키의 유일 합법 정부로 인정받았다. 새롭게 획정된 국경에 따라 130만 명의 그리스인이 터키를 떠나고 40만 명의 그리스 내 터키인이 고국으로 귀환했다. 터키 대국민의회는 1923년 10월 29일 아타튀르크를 초대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을 선포했다. 수도는 이스탄불 대신 아나톨리아 반도 중심의 앙카라로 정하고 헌법은 1924년 4월 20일 공포했다.

아타튀르크는 개혁을 추진하면서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정당은 집권당만 인정하고 구체제·반정부 인사들은 감시·숙청했으며 반정부 언론은 가차 없이 폐간시켰다. 1925년에는 ‘모자법’을 제정, 종래 이슬람의 상징처럼 따라다니던 여성들의 차도르와 남성들의 붉은 색 페즈 모자의 착용을 금지했다. 또한 이슬람 달력과 역법을 폐지하고 서양력을 채택했다. 여성의 지위와 사회 참여에도 힘써 1926년 일부다처제를 폐지하고 1930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여성에게도 주어 남녀평등을 실현했다. 1928년에는 이슬람을 국교의 지위에서 격하함으로써 터키는 세속 공화국으로 다시 출발했다.

아랍어로 표기하는 터키어가 너무 어렵다며 아랍식 터키어를 폐지하고 로마자 알파벳으로 터키어를 표기하는 새로운 터키어를 만든 문자 개혁은 대변혁을 몰고 왔다. 1934년에는 모든 국민이 성을 만들도록 하는 강제 규정을 신설했다. 터키 의회는 1934년 11월 성씨법을 제정하면서 케말에게는 ‘국부’를 뜻하는 아타튀르크를 부여했다. 이후 터키에서는 아타튀르크를 모욕하는 발언이나 행동은 불법으로 처벌받았다. 아타튀르크는 이처럼 사실상 독재정치로 터키를 탈종교화·현대화해 놓고 1938년 11월 10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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