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백범 김구,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에 맞고 서거

‘보이지 않는 손들’의 비호로 사건 실체가 가려져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30분. 서울 경교장 2층에서 갑자기 4발의 총성이 울렸다.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비극의 총소리였다. 김구는 책상 모서리에 얼굴을 비스듬히 대고 쓰러졌다. 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1발은 인중을, 또 1발은 목을 관통했다. 다른 2발은 각각 앞가슴과 하복부를 뚫고 지나갔다. 일제 식민 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밝혀온 민족의 등불이자 큰 스승이 꿈에 그리던 조국에서 그것도 동포의 손에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날 김구는 낯이 익은 안두희로부터 면담 신청을 받고 경교장 2층 거실에서 그를 단독으로 접견 중이었다.

73세 노혁명가의 목숨을 앗아간 안두희는 총소리에 놀라 뛰어 올라온 경호원에게 손에 권총을 쥔 채 계단을 내려오며 “내가 죽였다”라고 태연하게 말하고는 순순히 검거에 응했다. 그리고 헌병대로 끌려갔다. 백주 대낮에 일어난 일이고 범인도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니 사건의 전모가 바로 드러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들’의 비호로 사건의 실체가 가려진 채 사건 관련자들의 주장과 반박과 변명만 무성해 논란과 의혹은 좀처럼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안두희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말을 뒤집어 진상 규명을 혼란에 빠뜨리게 한 것이 1차 원인이었지만 안두희가 진상을 털어놓지 않아도 거리낌 없이 대로를 활보할 수 있도록 한 이승만 자유당 정부의 묵인과 방조와 비호가 더 큰 원인이었다. 자유당 정권이 붕괴한 후에는 ‘공소시효 만료’라는 법적인 한계까지 작용해 수사를 가로막았다.

이렇게 저렇게 세월이 흘러 관련자들이 죽거나 도주하면서 사건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미궁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건의 윤곽이 대층 드러난 상태다. 안두희의 범행을 사주한 배후, 범행 후 안두희를 비호했던 세력들의 이름 역시 대부분 거명되었다. 다만 국가기관의 공식 발표가 없고 배후·비호 세력들이 법망을 피해 모두 달아났기 때문에 미진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도 심증은 가는데 결정적인 물증이 발견되지 않아 해결보다는 미해결의 이미지가 더 크게 부각된 측면도 있다. 이승만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각종 설과 추측이 난무할 뿐 구체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사후에라도 당연히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백범의 장례는 7월 5일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져 효장공원에 안장되었다. 진상도 그의 안장과 함께 묻혀버렸다.

 

범인 석방은 이승만 정부의 묵인·방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

첫 수사 결과가 발표된 것은 사건 발생 후 1시간 30분이 지난 오후 2시였다. “김구 한독당 위원장이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저격당해 절명.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 배후를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 범행인 것 같다”는 내용의 수사 결과가 전봉덕 헌병대 부사령관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헌병대는 범인이 분명 ‘안두희’라는 명찰을 단 포병 소위였는데도 ‘정체불명의 괴한’이라고 발표했다. 이틀 후에는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이 “이번 범행이 군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 2일 문상을 가기 위해 경교장으로 향하기 전 “순전히 어떤 행동 노선이 조국을 위해 더 유익한 길인가를 놓고 당내 의견 차이에서 빚어진 비극이라고 본다”고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이 대통령의 발표는 사건의 결론을 내린 사실상의 지침서가 되었다.

최종 수사 결과는 7월 20일 발표되었다. “안두희는 한독당에 가입한 후 6번이나 김구를 직접 만나 지도를 받아오다, 백범의 사상과 한독당의 정치 노선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 특히 한독당의 내부 조직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소련의 주장대로 미군의 완전 철수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탈당하려 했다. 하지만 탈당 후 테러를 당할 것을 우려해 끝내 김구를 살해했다.” 정부 차원의 수사는 이렇게 종결되었다.

안두희는 헌병대를 거쳐 특무대로 이첩된 후 특별대우를 받았다. 8월 3일 시작해 4일 만에 끝난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1월, 15년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6·25 발발 이틀 만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어 1950년 7월 육군 소위로 복귀했다. 2개월이 지난 9월에는 중위, 1951년 3월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그러나 1951년 8월 서인환 의원(무소속)이 안두희의 출옥에 시비를 제기하자 1951년 12월 25일 소령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후 헌병총사령관이 된 원용덕의 문관으로 일하다 한때는 서울 명동에서 건설회사 부사장으로 행세했다. 1956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공장을 차려 강원도에서 세금을 두 번째로 많이 낼 만큼 돈을 벌기도 했다. 1955년 11월에는 ‘시역의 고민’이라는 책자에서 자신의 저격을 ‘애국 충정’으로 호도하는 여유를 보였다.

 

진상 규명 위한 ‘민간 추적자들’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은 1960년 4·19 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다시 시동이 걸렸다. 1960년 6월 ‘백범 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가 결성된 것을 시발로,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안두희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암살 음모의 각본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자유당 시절의 정보 브로커 김지웅도 1960년 8월 일본으로 밀항했다.

진상규명투쟁위원회는 활동 10개월 만인 1961년 4월 ‘악의 진상’이란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발표가 있기 열흘 전 위원회 간사 김용희는 서울 도심에서 4·19 직후 잠적한 안두희를 발견해 격투 끝에 붙잡아 서울지검에 넘겼다. 그러나 ‘처벌 시효’라는 현실의 벽이 가로막아 안두희는 법망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역사의 시효’에서까지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법 테두리를 벗어나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간 추적자’들이 등장했다. 1965년 12월 강원도 양구에서 곽태영에게 폭행을 당해 뇌 수술을 받았고 1987년 3월 권중희에게는 백주에 노상에서 각목으로 구타를 당했다. 이들 말고도 ‘추적자’들은 10여 명에 이른다.

안두희는 1~2년이 멀다 하고 집을 옮겨다녔다. 1968년부터 1986년까지 12번이나 이사했다. 몇 차례 미국 이민을 시도했으나 “해외 도주를 막아야 한다”는 비난 여론으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1992년에는 권중희에 의해 거의 반강제로 서울 효창공원 내 백범 묘소 앞으로 끌려가 뒤늦은 회한의 울음을 토해냈지만 열릴 듯 말 듯 하던 ‘진실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6년 10월 23일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에 머리를 맞고 살해되었다. 살해되기 전 1992년 6월 그를 추적해온 김석용을 만나 1년 동안 녹음 테이프 121개 분량을 녹음해 ‘마지막 증언’을 남겼다. 이 증언에서 안두희는 백범 암살을 지시한 인물은 당시 포병사령관 장은산이라고 자백했다.

 

 

☞각종 의혹들

 

▲경찰과 의사보다 먼저 현장에 출동한 헌병대

사건이 일어난 후 경교장 측에서 가장 먼저 연락한 곳은 인근의 서대문경찰서와 적십자병원이었다. 그런데 경찰과 의사보다 헌병들이 먼저 나타나 안두희를 연행해 갔다. 필동에 있는 헌병사령부가 연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알고 가장 먼저 현장에 나타난 것일까. 당연히 의심을 살 만한 대목이지만 당시 안두희를 연행한 헌병 책임자는 “사고 순간 인근 적십자병원에 있다가 이 사실을 알았다”며 우연을 강조했다.

의혹은 이것 말고도 많았다. 사건 당시 헌병사령부 당직사관은 “백범이 피격되기 전인 11시 20분쯤 비상소집이 걸린 사실을 당직 일지에 기록했다”고 증언했다가 파면을 당했다. 서울지검장 최대교는 피격 소식을 접하고 경교장으로 달려갔으나 정문 입구에서 헌병들에게 저지당했다고 증언했다. 피격 당일 성묘를 갔던 임정 계열의 헌병사령관 장흥 대령은 피격 소식을 듣고 급히 귀대했으나 안두희가 의무실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지하 감방으로 보냈다가 사건 발생 이틀 만에 해임되어 강원도 병사구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군의 비호

수사는 안두희의 신병을 처음 확보한 헌병대에서 맡았다. 그런데 안두희는 아무런 감시나 신문도 받지 않은 채 의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틀 후에는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이 일명 특무대로 불리는 육군 정보국 특수정보대(SIS)로 안두희를 옮기도록 지시했다. 특무대장 김안일 소령에게는 “안두희 사건을 취급하지도 말고 곁에도 가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김 소령은 얼마 안 되어 원주의 6사단으로 전보되었다.

안두희는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다 후임 특무대장 김창룡, 정치 브로커 김지웅과 면회 후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김창룡은 숙직실을 개조한 특별 감방을 마련해주고 술과 담배 등을 제공했다. 수사 흐름은 ‘한독당 내분’으로 윤곽이 잡혀갔다. 서울지검장 최대교는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시킨 김학규 등 민간인 7명에 대한 구속 영장을 당시 검찰총장이 서울지법원장에게 직접 청구해 발부받는 희한한 일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승만의 묵인과 방조

이승만을 암살 배후로 의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1949년이라는 시점에서 김구가 이승만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다. 이승만이 정적 제거 차원에서 암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김구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뒤 정치적 입지가 극도로 축소되어 있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아 현실 정치에서 별다른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두 번째 이유는 안두희에 대한 이승만의 미온적인 처리다. 민족지도자를 살해한 현행범이 불과 1년도 안 되어 석방되고 심지어 현역 군인으로 다시 채용되어도 수수방관한 이승만의 태도는 이승만 사주설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정황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1992년 9월 안두희가 “사건발생 1주일 전인 1949년 6월 20일경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났을 때 이승만이 ‘얘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들으라’며 격려했다”고 말한 증언이다. 안두희는 그러나 곧 이 진술을 부인했다. 이처럼 이승만과 관련된 안두희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 않아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안두희가 범행 후 활개치도록 방치한 것은 이승만 정부의 묵인과 방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승만은 결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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