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사해문서’ 발견…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최대 발견

사해문서를 기록한 주인공은 에세네파

1947년 이른 봄, 이스라엘 예루살렘 동쪽으로 16㎞m 떨어진 사해(死海) 서북쪽 쿰란에서 아랍계 베두인족 양치기가 사라진 양을 찾아 바위산을 헤매고 있었다. 문득 낯선 동굴이 눈에 들어와 동굴 안으로 돌멩이를 던져보았다. 곧이어 “쨍그랑”하는 항아리 소리가 들려오자 양치기는 호기심이 발동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넓다란 동굴 안에는 8개의 큰 항아리가 있었고 그 속에는 곧 부스러질 것 같은 두루마리가 엉켜 있었다. 양치기는 자신이 1900년 만에 동굴 속으로 들어간 첫 사람인지, 그의 손에 쥐어진 두루마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당연히 알지 못했다.

두루마리는 골동품상을 거쳐 시리아 정교회 소속 성 마르코 수도원의 사무엘 대주교 손에 넘겨졌다. 대주교는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진 두루마리가 구약성서의 원본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당시로서는 거금인 24파운드에 구입, 헤브루대 수케닉 교수에게 보관을 요청했다. 수케닉은 다시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 동방연구소의 트레버 박사에게 두루마리를 보여주었고 트레버는 두루마리가 구약성서 이사야서 사본임을 확인해주었다.

1948년 2월 트레버가 두루마리를 사진으로 찍어 전 세계 저명 고고학자들에게 보내자 한 달 만인 1948년 3월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한 고고학 교수가 사무엘 대주교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구약성서 원본이며 기원전 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최대 발견’으로 일컬어지는 사해문서임이 확인된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성서고고학자들이 추가 발굴에 관심을 보였으나 1948년 5월 제1차 중동전의 발발로 탐사를 못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조직적인 탐사를 시작했다. 당시 쿰란 지역은 이스라엘이 아닌 요르단 영토에 속했다. 1952년에서 1956년까지 학자들은 쿰란 주변의 험한 바위산에서 267개의 동굴과 바위 틈을 뒤졌다. 그 중 문서가 발견된 동굴은 양치기가 발견한 동굴까지 합쳐 모두 11개였고 동굴에서는 850여 개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조그만 조각까지 포함하면 2만 5,000점이나 되었다.

연대를 측정해보니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작성된 문서였다.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성서 전체, 구약에 포함되지 못한 외경, 쿰란 사람들의 공동생활 규율 등이 적혀 있었다. 이사야서처럼 원형 그대로 발견된 것도 있어 학자들을 경악시켰다. 요르단 정부가 관리하던 사해문서는 1967년 요르단이 6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스라엘 손으로 넘어가 현재는 대부분이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최대 발견

사해문서의 어떤 점이 성서학자들을 흥분 속으로 몰아넣은 것일까. 그때까지의 성서가 서기 8~10세기 무렵의 사본을 바탕으로 현대어로 번역한 것인데 사해문서가 제작된 연도는 그보다 한창 전인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성서고고학적 가치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사본을 작성한 당시 사람들의 생활 규칙에 관한 기록까지 발견되어 예수 시대의 종교·정치·사회·문화상에 대한 많은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사해문서를 작성한 주인공들은 자칭 ‘빛의 아들’이라고 칭했던 에세네파였다. 이들은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두개파와는 달리 쿰란 근처에 틀어박혀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수많은 필사본을 만들었다. 에세네파는 서기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 직전 마사다 요새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로마군과 장기간에 걸친 마지막 항전 끝에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에세네파는 로마군의 침입 소식이 전해지자 필사본을 양피지로 싼 다음 항아리에 담아 로마군의 눈에 띄지 않는 동굴 깊은 곳이나 메마른 바위 틈새에 숨겼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사해문서에 등장하는 한 지도자를 세례 요한이라고 추정했다. 신약은 세례 요한이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광야, 즉 암석 사막지대를 배회하며 청년기를 보내다가 때가 이르자 사해 가까운 요단강변에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 특유의 회개의 징표로서 세례를 베푼 곳은 쿰란과 가까운 곳이다. 쿰란의 에세네파와 세례 요한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또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였다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예수 역시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지 등으로 추측이 확장되면서 사해문서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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