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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발렌티노 첫 주연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 개봉 100주년… ‘최초의 섹스 심벌’ ‘문화적 신드롬의 주인공’으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 장식

↑ 루돌프 발렌티노

 

by 김지지

 

‘묵시록의 네 기사’, 최고 흥행 수익 올린 무성영화

이탈리아의 카스텔라네타에서 태어난 로돌프 구글리엘미(1895~1926)가 미국의 뉴욕으로 건너간 것은 18세 때인 1913년이었다. 미국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그가 가진 것이라곤 방랑의 10대를 보내며 파리에서 배운 난폭한 스타일의 아파치 댄스와 4,000달러가 전부였다.

미국에서 돈이 떨어져 노숙자, 정원사, 접시닦이 등을 전전했으나 춤에는 자신이 있어 카페에서 ‘택시 댄서’ 생활을 했다. ‘택시 댄서’는 돈을 받고 유한마담들과 춤을 추는 직업으로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제비족 같은 것이다. 그의 무기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탱고춤이었다. 어떻게 해야 여성들이 즐거워하는지를 터득하게 되자 이름을 루돌프 발렌티노로 바꾸고 외모 관리에 더욱 치중했다. 몸매가 날렵해 보이도록 셔츠 속에 코르셋을 입고 여성들만 차는 것으로 여겨온 손목시계도 착용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탱고춤으로 여성들의 혼을 빼놓던 그가 스타를 꿈꾸며 할리우드로 떠난 것은 20대 초반인 1917년이었다. 초기 몇 년간은 첫 출연 영화 ‘이혼수당’(1917)을 비롯해 20여 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다가 제작자이자 극작가인 준 마티스의 눈에 들어 1921년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마티스는 발렌티노의 극 중 인물 비중을 높이기 위해 원작에도 없는 술집 탱고 신을 넣어 발렌티노를 돋보이게 했다.

1921년 3월 6일 개봉된 ‘묵시록의 네 기사’에서 발렌티노는 탱고를 선보이며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휘했다. 발동작은 경쾌하고 가벼웠으며 행동에는 절제가 배어 있었다. 여성 관객들은 극 중에서 젊은 여성을 춤으로 유혹하는 그의 춤동작에 숨을 죽이고 극 중 한 여성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는 장면에서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도 최고의 흥행 수익을 올린 무성영화로 평가받고 있는 ‘묵시록의 네 기사’가 개봉된 후 미국 사회에는 탱고 열풍이 불었다.

발렌티노 첫 주연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의 한 장면

 

강렬한 눈동자와 넘쳐나는 관능으로 여성들 열광시켜

발렌티노가 등장하기 전까지 할리우드에서는 건장한 몸을 가진 거친 태도의 백인 남성이 ‘스크린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강렬한 눈동자와 넘쳐나는 관능으로 여성들을 열광시켰다. 또한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합된 ‘양면적 섹슈얼리티’가 대중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알려준 최초의 스타가 되었다.

발렌티노는 1921년 ‘족장(Sheik)’에서 새로운 타입의 정열적인 영웅을 탄생시켰다. 이 영화를 계기로 그는 ‘최초의 섹스 심벌’, ‘문화적 신드롬의 주인공’으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아랍계 족장으로 분한 영화에서 그가 백인 여성을 치명적 매력으로 유혹하자 이후 영화 제목 ‘셰이크’는 미남자, 호색한이라는 의미로 불리며 발렌티노의 별칭이 되었다.

발렌티노 주연 ‘족장(The Sheik)’의 한 장면

 

발렌티노는 수많은 여성 관객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면서도 정작 자신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919년 여배우 진 애커와 결혼했으나 그가 레즈비언인 것을 알고 6시간 만에 헤어졌고 1921년 의상감독이자 미술감독인 나타샤 람보바와 연인 관계가 되었으나 법적으로 전처인 진 애커와 이혼하지 않은 것 때문에 간통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1만 달러의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진 애커와 법적으로 이혼한 후 람보바와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람보바가 아이 낳는 것을 거부해 3년 만에 또다시 이혼했다. 이로 인해 발렌티노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고 여배우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발렌티노는 ‘혈과 사’(1922) 이후 한동안 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시집 ‘백일몽’(1923)을 내거나 잡지에 개인사를 연재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발렌티노가 죽자 여성 팬들 사이에 집단 히스테리 현상 벌어져

잠시 영화계를 떠나 있었지만 인기는 여전해 ‘더 이글’(1925)과 ‘족장’의 속편인 ‘족장의 아들’(1926)에 출연했다. 그러나 ‘족장의 아들’을 모두 촬영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던 1926년 8월 15일 궤양 악화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가 2차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8월 23일 눈을 감았다. 결국 9월 3일 개봉된 영화는 유작이 되었다.

발렌티노가 죽자 여성 팬들 사이에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 벌어졌다. 그의 죽음에 상심한 여성 팬들의 자살 보도가 잇따르고 수십 명의 여성이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등 대소동이 벌어졌다. 여름비가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장례식에는 3만여 명이 참석했고 뉴욕 시내의 연도에는 10만 명이 운집해 그와의 작별을 슬퍼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상복 차림으로 묘지를 찾는 여성도 있었다.

발렌티노 장례식 장면

 

발렌티노는 배우로서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비평가들로부터도 “소질 없는 배우”, “화장한 호모”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100년이 넘는 할리우드 역사에서 발렌티노처럼 강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스타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여성 관객들의 영혼을 훔친 최초의 아이돌이었으며 댄디(여성적 남성)의 표상이었다. 죽음으로 대중의 광란을 몰고 온 할리우드 최초의 아이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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