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흑백만화 ‘고우영 삼국지’가 올컬러 종이책으로 재출간되었다는데… 고우영은 한국 만화의 독자층을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끌어올린 성인만화의 개척자였다

↑ 고우영 만화에 등장한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

 

by 김지지

 

고우영이 남긴 흑백 만화 ‘고우영 삼국지’가 10권 분량의 올컬러 종이책으로 최근 출간됐다. 고우영의 아들이 옛 원고를 스캔해 컴퓨터로 옮겨 디지털 채색한 것이다. 40년 시공을 뛰어넘는 부자(父子)의 합작이다. 아들은 부친이 남긴 ‘고우영 십팔사략’에도 직접 색을 입혀 2012년 재출간한 적이 있다.

 

1972년 연재한 ‘임꺽정’은 신문 연재만화의 새로운 지평 열어

고우영(1938~2005)은 한국 만화의 독자층을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끌어올린 성인만화의 개척자였다. 무엇보다 만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근엄한 고전을 번득이는 유머와 해학으로 재해석해냄으로써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이었다.

등장인물마다 부여한 독특한 캐릭터와 감각적이고 튀는 용어는 젊은 층의 입맛을 정확히 충족시키면서 고우영의 만화가 1970~80년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까지 자리잡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는 만화를 통해 가정과 학교가 알려주지 않은 성을 노골적이지만 추하지 않게, 익살스럽지만 천하지 않게 가르친 강호의 스승이자 인생의 선배였다.

고우영

 

고우영은 중국의 만주 심양 근처에서 태어나 해방 후 부모의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제시대 경찰 간부로 근무한 것이 문제가 되어 더 이상 평양에 살지 못하고 1946년 부모의 손을 잡고 월남했다. 학창시절에 이미 만화를 전문가 수준으로 그린 두 형의 영향을 받아 만화에 심취했던 그가 피란지 부산에서 미키마우스를 본떠 그린 16쪽짜리 단행본 ‘쥐돌이’를 세상에 내놓은 것은 중학생 때인 1953년이었다.

고우영이 만화를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은 갑작스럽게 닥친 가정의 불행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룸펜으로 소일하는 동안 실질적인 가장이었던 어머니가 1958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6개월 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두 형 모두 심장마비로 거의 동시에 어머니를 따라가는 바람에 사실상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만화를 호구지책으로 삼은 것이다.

고우영이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둘째 형이 생전에 만화잡지에 연재하던 명랑만화 ‘짱구박사’를 이어받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58년이었다. 어머니와 두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는 ‘짱구박사’의 유명 만화가가 되기도 했지만 중학생 동생이 셋이나 되는 상황에서 순전히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3년 동안 병역 기피자로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만화책

 

18년 동안 신문만화 연재하며 한국 성인만화 시장 쥐락펴락해

1972년 1월 1일은 한국 만화사에 한 획이 그어진 날이다. 그날부터 1973년 2월 말까지 고우영의 만화 ‘임꺽정’이 ‘일간스포츠’지에 연재되었기 때문이다. 신문만화라고 하면 4컷짜리 시사만화나 만평이 전부였던 시절에 관례를 깨고 신문 지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이며 신문 연재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임꺽정’에 독자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만화책을 보면 어른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성인들을 떳떳하게 만화의 세계로 끌여들였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이후 고우영은 중국 고전들을 한편씩 해부하는 또 다른 도전에 돌입했다. 자신만의 유머와 해학으로 재해석한 ‘수호지’를 필두로 ‘삼국지’, ‘초한지’, ‘서유기’, ‘열국지’ 등의 고전을 18년 동안 신문에 연재하며 한국 성인만화 시장을 쥐락펴락했다. 1973년 3월부터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수호지’의 등장인물 ‘무대’는 한국 만화에서 가장 빼어난 캐릭터로 꼽힌다. 당시 대학가에는 리본으로 묶은 머리, 삐져나온 앞니에 단춧구멍만 한 눈을 하고서 요부 반금련과 어울리지 않는 커플을 이룬 주인공 무대를 사랑하는 ‘무대 클럽’이 생길 정도였다.

‘수호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그러나 당국이 ‘수호지’가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온한 내용이라고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에 고우영은 한동안 원고 수정을 거듭하다 1974년 271회를 끝으로 붓을 꺾었다. ‘임꺽정’과 ‘수호지’의 인기는 1971년 2만부에 불과했던 일간스포츠의 신문부수를 4년 후 30만 부로 늘어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1975년 12월부터 1년 동안 연재된 ‘일지매’는 100% 고우영의 창작이다. 그가 아는 거라곤 시대 배경이 병자호란 직전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런데도 살을 붙여 ‘일지매’를 완성하는 놀라운 상상력을 과시했다.

고우영 자신의 캐릭터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흑백만화 ‘삼국지’에서는 원본 삼국지의 근엄한 영웅 유비 대신 촐싹거리는 유비를 등장시켜 영웅의 권위를 부수고 우리의 사고를 개방시켰다. ‘고우영 삼국지’는 기발한 패러디, 서민적이고 현실적인 인물 묘사로 사랑받았다. 완결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검열·삭제 없는 복간본이 2002년 출간되어 지금껏 90만부가 발행됐다.

‘고우영 삼국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고우영이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만화는 ‘일지매’와 ‘십팔사략’

고우영의 만화는 익살맞은 비틀기, 걸쭉한 입담, 능청스러운 외설 등을 통해 고전 속 인간 군상을 독특하게 각색해내는 인물 해석에서 특히 빛났다. 고우영 자신은 ‘일지매’와 ‘십팔사략’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다. ‘일지매’는 100% 창작이라는 이유로, 1998년 11월 전 10권이 완간된 ‘십팔사략’은 시간에 쫓겨 아무렇게나 그릴 수밖에 없는 신문 연재를 하지 않고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기획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고우영은 성인 연재만화를 대표 장르로 하면서도 청소년 만화 작업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5년 ‘소년’지에 연재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도 그중 하나다. 고우영은 글솜씨가 탁월했다. 만화 속 촌철살인의 대사들은 그의 문학적 재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발자취는 창작만화 작업 외에도 평소 그가 여행한 명소들을 중심으로 엮은 기행문 서적, 도서 삽화 작업 등 다방면에 남아 있다.

고우영은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취미가 다양했다. 한국여행인클럽 회장을 지낼 정도로 여행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암벽 등반, 스킨스쿠버, 권투, 낚시, 골프 등에도 능했다. 자신의 만화 ‘가루지기전’을 1988년 영화로 만들 때는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우영이 남긴 최대의 업적을 꼽으라면 단연 독자에게 제공한 만화의 즐거움이다.

최배달의 일대기 그린 ‘대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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