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용운 ‘님의 침묵’ 시집 출간

남북한을 통틀어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작품

‘님의 침묵’(회동서관·168쪽)은 한용운(1879~1944)의 이름을 한국문학사에 굵게 새겨준, 한국 서정시에 길이 빛나는 기념비적 시집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표제시를 비롯해 ‘알 수 없어요’, ‘비밀’, ‘첫 키스’, ‘님의 얼굴’ 등 88편의 시가 수록된 ‘님의 침묵’에서 한용운은 그리운 모든 것을 ‘님’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평론가들은 ‘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어 막연히 ‘사랑하는 사람’, ‘종교적 해탈’, ‘고난에 찬 우리 민족’ 등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님’을 어떻게 해석하든 놀라운 것은 ‘님의 침묵’을 내기 전까지 한용운이 우리말을 익히고 또 고운 울림이 있는 서정시를 쓴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설악산 백담사에서 쓴 시들을 1925년 8월 탈고하고 1926년 5월 20일 ‘님의 침묵’ 시집을 발간했다. 단숨에 지었다는 주장과 오랜 사유 끝에 쓴 것이라는 주장으로 엇갈리는 가운데 평론가들이 주목한 것은 한용운이 읽은 고려대장경이다. 경전들은 문학성이 강해 두루 섭렵하다 보면 아름다운 비유나 상징이 몸에 배고 심경에 변화가 생겼을 때 이것이 자신도 모르게 감성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시에 불교 용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세기 100년간 남북한을 통틀어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작가는 이광수이고 작품은 ‘님의 침묵’이라고 할 정도로 ‘님의 침묵’은 20세기 내내 우리 문학계의 화두였다. 한용운은 이처럼 빼어난 서정시를 남긴 탁월한 시인이었지만 그에 앞서 불교 개혁을 외친 불교 사상가였고 독립운동가였다.

 

한일합방 때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 걷어차

한용운은 충남 홍성의 몰락한 양반 집에서 태어나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조혼 풍습에 따라 13살이던 1892년 결혼했으나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서 방랑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해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를 둘러본 뒤 1903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04년 12월 아들 보국이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날 무렵 한용운은 26세 나이로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1905년 1월 26일 출가했다. 계명은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였다.

한용운은 1908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6개월 동안 머물며 일본 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동종의 대표와 친교를 맺고 일본어와 불교를 수학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불교의 왜색화에 적극 반대하고 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에 힘썼다. 강원도 건봉사에서 대중공양 중이던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도 승려들이 계속 공양하는 것을 보고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을 걷어찰 정도로 항일 정신이 투철했다. 한용운은 1910년 가을 만주로 가 망국의 설움을 달래며 이회영, 김동삼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유하고 애국 청년을 격려했다. 그러던 중 일본 정탐꾼으로 오해를 받아 독립군 청년이 쏜 총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가 관음보살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

한용운은 왜색 불교에 적극 반대했다. 1910년 10월 친일 승려 이회광이 자신이 종정으로 있는 조선의 원종을 일본 조동종에 합병하자 전남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이회광을 종문난적, 법적, 매국매교자로 규탄하고 박한영, 진진응 등과 함께 1911년 1월 조선불교 임제종을 창종했다.

한용운은 왜색 불교에 반대하면서도 승려의 결혼은 지지했다. 1910년 “승니(僧尼)가 혼인해 순산을 하게 된다면 불교의 교세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유효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조선총독부에 냈다. 훗날 발간할 ‘조선불교 유신론’에서는 “나에게 ‘불교를 무슨 방법으로 장차 부흥시킬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승려의 결혼 금지를 푸는 것도 중요하고 시급한 대책의 하나일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러자 당시 정통 수행승들이 크게 반발했다. 오늘날 비구 승단인 조계종이 한용운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3·1운동 독립선언서 중 ‘공약 3장’ 작성

1913년에는 ‘조선불교 유신론’을 발간, 불교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일본 불교의 영향을 몰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부패가 만연한 당시 불교계에 큰 경종을 울려주었다. 200자 원고지 1만 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불교 유신론’은 조선불교의 실상을 비판하고 개혁안을 제기한 실천적 지침서였다. 한용운으로서는 최초의 인쇄출판물이고 한국 불교사에는 큰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1914년 4월에는 통도사의 고려대장경 6,802권을 1912년 여름부터 낱낱이 살펴본 뒤 이를 현대적으로 정리한 800쪽의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펴냈다. ‘조선불교 유신론’이 불교의 혁신을 불교계에 호소한 것이라면 ‘불교대전’은 불경을 간소화하고 실용화해 승려의 교육과 불교의 대중화에 보탬이 되도록 한 것이다. 한용운은 1917년 가을 백담사로 들어갔다가 12월 3일 밤 10시, 좌선 중에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오도(悟道)에 이르렀다.

1918년 9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 ‘유심’을 창간했다. ‘유심’은 60여 쪽의 빈약한 잡지였지만 불교 관련 글 이외에도 청년들이 갖춰야 할 수양적인 글도 많이 실렸다. 대부분 한용운이 직접 쓴 글로 채워졌지만 박한영, 백용성, 이능화, 최남선, 최린, 현상윤 등 당대의 명사도 다수 참여했다. 하지만 1918년 12월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한용운의 열정과 항일 정신은 3·1 운동에도 오롯이 배어있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 대해, 항일 저항 정신이 약하다며 좀 더 과감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주문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의견 충돌을 벌이다 마지막 행동 강령인 ‘공약 3장’을 작성하는 것으로 독립선언문 기초에 참여했다. 공약 3장도 최남선이 작성했다는 반론도 있으나 만해가 썼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도 하지 않은 최남선이 공약 3장 가운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같은 행동 강령을 쓸 수 있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한용운은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을 맡아 2월 28일 밤 중앙학교 학생 10여 명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 독립선언서 3,000장을 건네주었다. 거사 직전에는 민족 대표들에게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 원칙을 제시하고 3·1 운동 당일 독립선언서를 공표할 때는 식사(式辭)를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감옥에서 일부 인사가 불안에 떨며 대성통곡할 때는 똥물을 뿌리며 “울기는 왜 우느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며 호통을 쳤다.

한용운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수감 중이던 1919년 7월 53장의 ‘조선독립 이유서’를 작성했다. 이 선언문은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50여 종의 독립선언문 중 신채호의 ‘조선혁명 선언’(의열단 선언)과 함께 대표적인 선언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용운은 선언문에서 일제의 조선 침략을 주도한 군국주의를 준열하게 꾸짖고 일본이 장차 1차대전 때의 독일처럼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선언문은 감옥에서 몰래 빼내져 1919년 11월 4일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제25호 부록에 게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

한용운은 1921년 12월 출옥 후에도 민족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훗날 지조를 꺾은 최남선이 길거리에서 그를 보고 반가워할 때 “최남선은 벌써 죽어 장사를 지냈다”며 쌀쌀맞게 외치며 돌아서 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친일에 대해서는 추상같았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 설립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신간회가 창설되었을 때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신간회 발전에 열성을 보였다.

한용운은 1933년 서울에서 간호원과 재혼하고 이듬해 딸 영숙이 태어났으나 일제하에서는 결코 호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고집해 딸의 이름도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자신도 배급 대상에서 제외되어 가족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궁핍한 한용운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사람이 당시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였다. 방응모는 한용운을 위해 1933년 성북동 뒷산 자락에 팔작지붕 기와집 ‘심우장’을 지어주었다. 집을 지을 때 한용운은 마주 보이는 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집을 틀었다. 추운 겨울에도 조선 전국이 감옥이라며 심우장 냉방에서 꼿꼿이 앉아 지냈다.

한용운은 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으로 방응모의 고마움에 보답했다. 소설 ‘흑풍’(1935.4~1936.2)과 ‘박명’(1938.5.~1939.3)을 연재하고 1939년 11월부터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삼국지’를 번역·연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는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로 시작되는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를 지어 비통함을 달랬다.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 신문 폐간으로 중단한 ‘후회’(1936), ‘불교’지에 연재하다가 중단한 ‘철혈미인’(1936) 등 장편소설도 발표했다.

한용운은 그토록 바라던 조국 독립을 결국 보지 못하고 1944년 6월 29일, 65세로 입적했다.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고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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