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독일 나치 정부의 ‘뉘른베르크법’ 공포와 단종법 제정

↑ 1935년 뉘른베르크 법에 따른 인종 분류. 독일인, 2급 혼혈인, 1급 혼혈인, 유대인으로 구분되어 있다.

 

‘단종법’의 근거 이론은 ‘우생학’

20세기 초중엽,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개를 친 ‘단종법’의 근거 이론은 ‘우생학’이다. 단종법은 생물학적 부적격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상대로 정부가 강제하는 불임수술의 법적 명칭이다. 우생학의 개척자는 사람의 신체적·정신적 특성들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생물통계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한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이다. 우생학이라는 용어를 1883년 처음 만들어 전파한 것도 골턴이다. 그는 사촌형 찰스 다윈의 영향을 받아 1865년 ‘유전적 재능과 특질’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선별적인 교배 기술로 동식물의 품종을 개량하듯 인종도 최고 우성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 생물학적 우성인자를 가진 사람의 수를 늘리고 열성인자를 가진 사람의 수를 줄이는 식으로 인위적인 노력을 하면 궁극적으로 인류가 발전할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19세기 말 골턴과 그 지지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우생학은 상대적으로 우수하게 태어난 사람들의 출산율을 증가시키는 ‘포지티브 우생학’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정신이상자, 저능아, 범죄자 등 생물학적 부적격자들의 자손 번식을 억제하는 ‘네거티브 우생학’이 우세해졌다. 후자에 힘을 실어준 것은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하층민을 생물학적 열등 분자로 몰아 사회악의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하고 공권력을 임의로 행사하는 논거로 ‘네거티브 우생학’을 악용했다.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은 악성 유전성 질환을 예방하고 생물학적으로 인간을 진화시킨다는 명분 아래 경쟁하듯 ‘단종법’을 제정했다. 단종법은 유전 성향을 가진 정신질환자, 간질환자, 알코올중독자들이 자신 때문에 불행한 후손이 나오지 않게 스스로 불임수술을 신청하도록 한다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사자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법원이나 형무소의 감독관이 신청하면 불임수술이 가능하도록 비인간적·반윤리적으로 운영되었다.

 

뉘른베르크법, ‘홀로코스트’로 가는 징검다리

유전적으로 열등한 아동의 출산을 막는다는 구실을 들어 단종법을 가장 먼저 제정·시행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1896년 저능아와 정신박약자의 결혼을 금지한 ‘결혼규제법’을 제정했을 정도로 우생학 연구와 단종법 시행에 적극적이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단종법을 제정·시행한 주는 1907년 미국의 인디애나주다. 1909년 워싱턴주와 캘리포니아주 등이 잇따라 단종법을 도입한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1924년 제정된 버지니아주의 단종법이다.

버지니아주의 첫 피해자는 캐리 벅이란 여성이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정신박약자여서 ‘간질환자.정신박약자 수용소’에 수용됨에 따라 양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17살 때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조카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양부모는 그녀를 어머니가 있는 수용소로 보냈고, 그녀가 출산한 아이조차 빼앗겼다. 수용소 측은 버지니아주의 단종법에 의거해 벅에 대해 불임수술을 시도했고, 이를 둘러싼 논란은 법정으로 옮겨갔는데 소송 명칭은 벅과 수용소장인 존 벨의 이름을 딴 ‘벅 대 벨(Buck v. Bell)’ 소송으로 붙여졌다. 그런데 미 대법원은 1927년 “3대에 걸쳐 저능아라면 충분하다”며 버지니아주의 단종법이 다수의 안전과 복지를 추구한다는 헌법정신에 어긋나지 않는다며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결국 벅은 버지니아주 단종법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이 대법원 판결 이후 미국 33개 주에서 단종법이 시행되어 1970년대까지 강제 불임수술을 받은 수가 6만5000여명이 넘었다. 버지니아주에서만 50여년간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한 주민은 8300여명에 달했다.

2차대전 종전 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이 미국의 유전학 프로그램과 ‘벅 대 벨’ 소송을 인용하며 자신들의 유대인 학살정책을 변명할 정도였다. 버지니아주 의회는 2002년 벅 할머니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2006년에는 주 상원에 벅 할머니 성폭행범에 대해 거세형을 가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하는 등 뒤늦게 과오를 인정했지만 벅 할머니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미국에 이어 스위스·캐나다(1928), 덴마크(1929), 독일(1933), 스웨덴과 핀란드(1935), 중미 국가들(1941), 일본(1948) 등에도 단종법이 도입되었다. 다만 영국은 근대 우생학의 발원지이고 적극적인 우생학 지지자가 적지 않았는데도 강력한 민주주의 전통에 밀려 단종법을 제정하지 못했다. 불임수술은 전체적으로 여성이 많았으나 적지 않은 남성도 대상이 되었다. 불임시술을 받아야 할 대상은 법정에서 판결했다. 근거는 나라마다 약간씩 차이가 났다. 사회적 무능력자를 대상으로 불임수술을 강요하던 단종법이 인종 말살 정책의 근거로 악용된 것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독일 나치당이 단종법을 공포한 것은 1933년 7월 14일이었다. 정신질환, 간질, 알코올중독 등 유전질환 당사자의 신청을 받아 우생재판소에서 단종수술 결정을 내린다는 게 법의 취지였으나 독일 역시 본인이 아니더라도 병원이나 형무소 감독관의 신청이 가능하도록 해 실제로는 타의에 의한 단종이 다수를 차지했다. 독일 단종법의 특징은 사회적 무능력자는 물론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까지 무능력자로 간주해 불임수술을 강요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 이뤄진 불임시술자의 수는 수 십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단종법으로 유대인 말살의 근거를 마련한 히틀러는 2년 뒤 유대인을 추방하고 급기야 학살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새로운 악법을 제정·공포했다. 1935년 9월 15일 공포한, 이른바 ‘뉘른베르크법’으로 통칭되는 ‘독일제국 시민법’과 ‘독일 혈통 및 명예보존법’이 그것이다. 법 제정의 목적은 유대인의 혈통이 섞인 국민을 독일인과 차별하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홀로코스트(대학살)’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악용되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 인종 말살 정책의 근거로 단종법을 악용

독일제국 시민법에 따라 유대인은 선거권과 공직취임권 등 모든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독일 혈통 및 명예보호법은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도 밝혔듯 ‘고등인종인 아리아 민족의 피가 하등인간의 피와 섞여서는 안 된다’는 인종차별적 맹신에서 비롯되었다. 법에 따라 유대인·독일인 간의 결혼과 성관계가 금지된 가운데 나치는 법을 명확히 적용하기 위해 1935년 11월 14일 보충법령으로 ‘유대인의 범위’를 정했다. 친가와 외가 조부모 4명 중 3명 이상이 유대인이면 유대인, 2명이 유대인이면 1급 혼혈, 1명이 유대인이면 2급 혼혈로 분류해 훗날 적용할 학살의 기준을 마련했다.

1급과 2급 혼혈아로 분류된 유대인에게는 독일인의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해방’ 절차가 있긴 했으나 이를 통해 해방된 유대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1급 혼혈에 해당되어도 ▲유대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 ▲배우자가 유대인인 사람 ▲한 유대인에 의해 맺어진 혼인 관계에서 출생한 자녀 ▲혼외 관계에서 출생한 자녀 등은 다시 유대인으로 간주되어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소유하는 제국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뉘른베르크법 제정에 큰 충격을 받았으나 곧 체념하고 2등 시민 자리라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에 만족했다. 그러나 전쟁 준비가 가시화할수록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탄압 조치는 더욱 가혹해졌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의 첫 단계가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면 다음 단계의 목표는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1938년 3월 나치는 모든 유대인 공동체의 권리를 박탈하고 11월에는 유대인 변호사들의 활동을 금지했다. 이와 병행해 경제 외적인 탄압 조치들도 잇달아 시행했다. 1938년 8월부터 모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남자)과 ‘사라’(여자)라는 이름을 써야 했으며 10월에는 모든 유대인 여권에 유대인인임을 표시하는 ‘J’자가 인쇄되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