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출간…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명저

‘광기’와 ‘성’의 문제를 ‘권력에 의한 억압구조의 틀’로 새롭게 해석

미셸 푸코(1926~1984) 이전의 근대 서양철학은 한마디로 이성주의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푸코는 ‘이성’을 기반으로 한 기존의 지식과 상식을 뿌리부터 흔들며 새로운 시각으로 근대철학을 재구성했다. 그는 권력의 본질에 천착하면서도 이미 학계의 정설로 자리잡은 계급제도, 관료제도, 정당 조직 등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동시대 철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던, 얼핏 권력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광기’와 ‘성’의 문제를 ‘권력에 의한 억압구조의 틀’로 새롭게 해석했다.

푸코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1년 5월 소르본대의 박사학위 논문 ‘광기의 역사’가 발표되고부터였다. 논문에 따르면 광기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문화현상이었다. 논문은 오늘날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발표 당시만 해도 그렇게까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광기의 역사’에 따르면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만 하더라도 광기는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천재적 예술세계에서 관용되어온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17~18세기 들어 강력한 이성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성주의는 그동안 한데 엉켜 있던 이성과 비이성 또는 광기 사이에 경계선을 긋더니 광기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었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노동윤리는 근면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부르주아 사회를 등장시켰다. 근면한 노동을 외면하고 가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지탄을 받았다. 그들은 나태하고 열등하고 부도덕한 부적응자가 되었다.

이런 변화로 인해 서구사회는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상인’과 ‘비이성적이고 반사회적인 비정상인’으로 나뉘었고, 후자는 배제와 교정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7세기 중반 유럽 각국은 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가두었다. 한때 파리시민의 1% 이상이 감금될 정도였다.

 

‘광기의 역사’,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아

감금 대상에는 광인뿐만 아니라 극빈자, 거지, 부랑자, 방탕자, 매독환자, 무신앙자, 동성애자 등이 총망라되었다. 당시에 그들은 모두 같은 부류로 여겨졌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이런 자의적 감금이 비난받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는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부류별로 감금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산업현장의 최하층 노동자로 편입되었고, 일부 병자는 의료시설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광인은 끝까지 풀려나지 못했다. 그들은 위험분자로 낙인찍히고, 부르주아 윤리에 의해 부도덕한 타락자로 지목되었다. 결국 그들에 대한 비참한 격리와 감금은 대책 없이 지속되었다.

감옥과 정신병원이 상징하는 근대적 억압구조를 분석하는 푸코의 작업은 결국 ‘구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언어와 일상적 삶 속에 우리의 주체적 의식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구조주의도 푸코에겐 또 하나의 근대적 이성의 산물이자 억압이었다.

‘광기의 역사’에 이어 푸코의 명성을 높여준 것은 ‘말과 사물’(1966년)이었다. ‘광기의 역사’가 문학이나 역사에 가까웠다면 ‘말과 사물’은 철두철미하게 인식론의 문제를 다뤄 일반 독자에게는 매우 난해했다. 그런데도 책은 10만 부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는 이 출세작에서 지식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을 빌려 각 시대나 사회마다 에피스테메가 다르므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짓는 ‘경계선’도 시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말과 사물’이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고, 인문과학이 ‘허구의 과학’이라며 이데올로기에 관한 마르크스적 분석을 혹독하게 비판하자 프랑스의 문예 주간지들은 “인간은 죽었다”라는 헤드라인을 달아 대서특필했다. 니체에 이어 사르트르가 신을 죽였고 이제 푸코가 인간마저 죽였다는 저널리즘적인 표현이었다.

 

명저 ‘감시와 처벌’에서는 지배계급의 억압적 장치들을 분석

1975년 출간한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에서는 17세기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감옥, 병영, 학교, 병원, 공장 등 여러 감호 시설의 변화를 상세히 분석한 뒤 지배계급이 이런 억압적 장치들을 통해 사회적 동요를 수용하고 노동력을 훈련시키는 데 이용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에 따르면 감옥, 병영, 학교, 병원, 공장 등은 알게 모르게 공통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관한 과학적인 관리법을 적용하여 예속적이고 복종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국가, 근대사회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새로운 해석으로 그때까지 지배적 개념이었던 중앙집중적이고 피라미드 형태를 지닌 권력의 개념을 파괴했다고 해서 푸코에게 붙여진 별명이 ‘권력의 사상가’였다.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17세기 이전의 처벌 방식은 신체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는 신체형이었다. 그것은 범죄자의 일탈로 인해 일시적이라도 상처받은 권력, 즉 군주권을 회복시키려는 의식이다. 따라서 신체형에는 권력의 본질적 우월성에 대한 과시적 주장이 담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범죄자의 신체에 대한 과도한 물리적 공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권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신체형의 정치적 목표이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죄인을 감옥에 가둬두는 징역형이 일반화되었다. 징역형이 정신까지도 통제할 수 있고 범죄마다 일일이 신체형을 집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징역형은 더 ‘적게’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처벌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인 것이다.

 

파리의 ‘5월 혁명’ 후 전투적 지식인으로 변모

1968년 5월 파리에서 이른바 ‘5월 혁명’이 점화되었을 때 그는 튀니지에 있어 역사의 현장을 지키지 못했다. 그해 말 귀국한 그는 그 부재를 벌충하기라도 하려는 듯 사회운동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극좌 학생들과 행동을 같이하기도 하고 감옥 수감자들이나 이민 노동자들의 인권문제 등의 정치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는 등 전투적 지식인으로 변모했다. 사르트르가 2차대전을 분기점으로 창백한 철학자에서 격렬한 투사로 변신했듯이 푸코도 ‘5월 혁명’ 이후 실천적인 철학자가 되어 모든 전선에서 투쟁을 벌이는 격렬한 투사가 되었다.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주로 재소자, 노동자, 불법 이민자, 정치적 반대자, 동성연애자 등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의 인권 개선이었다. 1970년대에 핍박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프랑스 안이든 밖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1975년 9월 프랑코 총통 체제 하에서 부당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11명의 스페인 사람을 구명하기 위해 영화배우 이브 몽탕 등과 함께 마드리드로 날아가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고, 극좌 신문이 정부에 압수되었을 때는 사르트르 등과 함께 직접 가두판매에 나섰다.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울 때는 사르트르와 함께 했으나 사르트르가 마르크시즘의 깃발을 들 때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푸코는 사르트르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사르트르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이해하지 못했다. 사르트르 역시 마찬가지여서 푸코의 저서 ‘말과 사물’을 혹평했다. 둘은 서로를 긍정하고 부정하면서 1970년대 시위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푸코는 이란의 호메이니에도 열광하고 흥분했다. 두 번이나 이란을 방문해 팔레비의 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쓰며 호메이니에 심취했으나 호메이니 집권 후 시작된 투옥과 탄압 등의 인권 침해 사례를 목격한 뒤로는 자신이 얼마나 허튼 짓을 했는가를 후회했다.

 

현실 참여에 열심이면서도 글에는 단 한 줄도 자기 주장 내세우지 않아

푸코의 책에는 비장한 어투나 존재론적 성찰이 없다. 마르크스나 그 후계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비분강개조의 인간 고찰이나 역사 해석도 없다. 차분하고 세밀하고 건조한 필치로 사실만을 나열하거나 서술할 뿐이다. 그토록 현실 참여에 열심이었으면서도 그의 글에서는 단 한 줄의 자기 주장을 찾아볼 수가 없다. 1976년 출간된 제1권 ‘앎의 의지’를 시작으로 총 8권으로 예정된 ‘성의 역사’는 1984년 ‘쾌락의 사용’(2권)과 ‘자신에 대한 배려’(3권)를 끝으로 그의 죽음과 함께 중단되었다.

1984년 6월 25일 58세의 푸코를 죽게 한 것은 당시 세상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에이즈였다. 언론은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좌파 신문인 리베라시옹은 1면 전면에 그의 사진을 실었고 사르트르 사망 특집 이후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해 대대적인 특집을 꾸몄다. 르몽드 역시 두 면에 걸쳐 추모기사를 실었다. 르몽드의 한 추도문은 “그는 역사가인가 철학자인가 사상가인가. 아니면 진리의 파괴자인가. 대답은 단순하지 않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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