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5인의 고리’는 세계 첩보계의 전설 … 냉전시대 미국의 극비 정보가 속속들이 소련으로 넘어간 것도 영국 상류층 출신의 그들 때문

↑ 영국 BBC 방송이 캠브리지 5인조를 모델로 2003년 제작한 미니시리즈 ‘cambridge spies’ 포스터

 

by 김지지

 

‘모스크바 스파이들의 스승’이라 불리는 영국과 러시아 이중간첩 조지 블레이크(1922~2020)가 98세 나이로 지난 12월 26일 사망했다. 블레이크는 영국 해외정보국(MI6) 요원 신분으로 소련을 위해 첩보 활동을 한 인물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그는 1948년 주한 영국대사관 부영사 직함을 달고서 MI6이 설치한 서울 거점의 요원으로 파견되었다가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북한군 포로로 잡혀 공산주의자로 전형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 영국으로 돌아가 MI6 요원 활동을 재개하면서 1950년대 동유럽에서 활동하던 서유럽 첩보원 400여 명의 신원을 소련에 넘겼다. 첩보원 42명이 그가 넘긴 명단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공산권을 겨냥한 서방의 정보 수집전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조지 블레이크에 앞서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M16 요원으로 활동하며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첩보계의 전설이 있다. 이른바 ‘5인의 고리’가 어떤 인물들이고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를 알아본다.

조비 블레이크

 

‘5인의 고리’는 1930년대 소련에 포섭된 영국 상류층 출신

1930년대에 들어서자 대공황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이로 인해 계층 간 불평등이 심화되어 자본주의의 모순이 맨살을 드러냈다. 더구나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서구의 젊은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의 타락과 병폐에 염증을 느꼈다. 그들에게 불평등과 빈부격차는 타파되어야 할 자본주의의 산물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열렬한 믿음, 자본주의를 파괴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굳은 결의는 소련을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렸다. 당시 소련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려 그들의 이상향을 설계하겠다는 순진한 결의가 소련의 공산주의에 이용당하면서 서구 세계의 1930년대가 공산주의가 유행했던 ‘붉은 10년’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최고 명문 케임브리지대에 재학 중인 상류층 자제들이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소련에 포섭된 것도 1930년대였다. 당시 케임브리지대학에는 공산주의가 팽배했다. 경제학 교수 모리스 돕은 영국 공산당에 입당하고 당원증을 받은 최초의 영국 지식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민하는 제자들을 공산주의로 끌어들였다.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학생들은 노동자의 불평등과 고통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으나 어느 누구도 힘든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전형적인 부르주아였다. 특히 킴 필비, 도널드 매클린, 가이 버지스, 앤서니 블런트, 존 케른크로스로 구성된 이른바 ‘5인의 고리(Rings of Five)’는 블런트와 버지스, 매클린이 케임브리지대 안에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필비와 캐인크로스가 합류하면서 탄생했다. 조직명은 아니었고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이들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블런트는 국내 방첩을 담당하는 보안국(MI5)에 들어갔고, 필비와 버지스는 해외정보국(MI6)에 침투했다. 매클린은 외무부에서 외교문서를, 케른크로스는 영국 정보통신본부에서 해독한 암호를 KGB에 넘겼다. 다만 첩보요원으로서의 자질은 KGB 요원이 기겁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첩보계의 관행과는 달리 5명 모두 절친한 사이인 데다 보안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영국 런던에 있는 ‘M16’ 본부

 

‘5인의 고리’ 중에서도 대표적 인물은 킴 필비

‘5인의 고리’ 중에서도 대표적 인물이 훗날 ‘20세기 첩보계의 전설’로 불리게 될 해럴드 킴 필비(1912~1988)다. 30년 동안 조국을 배신하고 적국을 위해 암약했던, 그래서 한때는 007로 유명한 영국 해외정보국(MI6)의 국장 자리까지 넘보았던 그의 완벽한 변신으로 영국 첩보계는 철저히 농락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필비는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0세기 초 중동을 무대로 활동한 영국 첩보원이자 고급 외교관이었다. 이 사실은 필비가 영국 정보기관에서 출세하는 데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킴 필비의 ‘킴’은 인도를 배경으로 한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킴’에서 따온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인도 태생인 데다가 키플링 소설의 주인공처럼 고집이 세다고 해서 ‘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킴 필비는 1929년 입학한 케임브리지대에서 가이 버지스, 도널드 매클린 등과 어울리며 공산주의 세례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장차 반 파시즘 투쟁을 하려면 독일을 알고 독일어를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났다. 골수 공산주의자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1934년 빈에서 서슬 퍼런 나치의 폭거를 목도하면서 소련 첩보원이 되었다. 귀국 후에는 영국 정보부에 침투하기 위해 자신의 공산주의 이력을 지워나갔다. 독일계 영국인 사회에 들어가 친히틀러 잡지를 편집하고, 1937년 영국의 ‘더 타임스’ 특파원으로 스페인내전 현장에 뛰어들어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지하는 기사로 우익의 신임을 얻었다.

킴 필비

 

1939년 필비는 마침내 허점투성이의 전력 조사를 거쳐 ‘007’로 유명한 영국의 해외정보국(MI6)에 입사했다. 첩보원으로는 결격 사유였던 선천적인 말더듬이였으나 그 덕에 내근 요원으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수집한 온갖 고급 정보를 소련에 전달했다. 2차대전 후에는 터키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1949년 MI6의 워싱턴지국으로 전출되어 활동영역이 미 CIA 기밀까지 염탐하는 데까지 넓어졌으나 한편으로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졌다.

당시 워싱턴의 영국 대사관에는 2년 전 부임한 케임브리지대 동창 가이 버지스(1911~1963)가 근무하고 있었다. 버지스는 영국군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 재학 중 앤서니 블런트(1907~1983)에게 포섭되어 소련의 스파이가 되었다. 졸업 후 ‘더 타임스’ 기자를 거쳐 M16과 외무부에서 근무하는 등 인생 역정이 필비와 비슷했다.

블런트는 영국성공회의 성직자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1933년 KGB에 포섭되어 소련의 첩보원이 되었다. 동성연애자인 블런트는 한때 그의 연인이기도 한 가이 버지스 말고도 도널드 매클린(1913~1983)을 포섭했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블런트는 M15(보안국)에 입사해 런던 주재 주요 중립국 대사관에서 나온 외교 서류 가방들을 비밀리에 검열하고 촬영해 M15와 소련의 KGB에 각각 보고했다. 1944년에는 유럽 내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M15 사이의 연락 업무를 맡아 영국의 극비 암호해독 작전인 ‘울트라 작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연합군의 고급 군사작전 계획들을 엿듣고 소련에 전달했다.

필비는 미국에서 FBI, CIA와 정보를 공유하며 주요 정보를 확보했다. 1950년 1월 스탈린에게 미국 내 원자폭탄 비축량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정보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이었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영국과 영연방의 정보 연락관으로 일하면서 맥아더 사령부와 미 국방부 사이에 오가는 작전통신문을 입수해 모스크바로 보냈다. 모스크바는 이 정보를 중국의 모택동에게 전달했다.

 

극비작전 ‘베노나 프로젝트’ 때 정체 드러나자 소련으로 탈출

필비에게 어느 날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소련 정보기관의 통신을 해독하는 미국의 극비작전 ‘베노나 프로젝트’를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미 수사기관이 과거 워싱턴의 영국 대사관에서 원자폭탄에 대한 비밀을 소련에 타전한 ‘호머’라는 직원의 암호를 발견하고 영국 정보부에 조사를 의뢰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필비는 이 첩자가 영국 외무부 내 미국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도널드 매클린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매클린은 영국의 유력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 2학년 때 공산당에 가입하고 4학년 때 블런트의 포섭으로 소련 첩자가 된 인물이었다. 1934년 영국의 외무부에 들어갔고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그곳에서 캐낸 중요 정보들을 소련에 보냈다.

10대 시절의 도널드 매클린

 

당시 매클린이 영·미 정상 간에 오간 통신문이나 정책에 대한 기밀을 스탈린에게 보고한 덕에 스탈린은 얄타회담, 카이로회담, 포츠담회담 등 각종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갔다. 전후 미국의 핵저장소는 텅 비었고 소련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은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고 있다는 정보, 1948년 소련의 베를린 봉쇄와 관련해 트루먼 대통령이 마치 원자폭탄으로 무장한 듯한 것처럼 B-29를 유럽에 배치했으나 B-29에는 재래식 무기만이 탑재됐을 뿐이라는 정보, 또 6·25 때 트루먼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전쟁을 제한적으로 치르기로 했다는 정보 역시 매클린이 빼낸 것이다. 매클린은 1948년 카이로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1950년 1월 영국으로 귀국해 외무부 미국 과장으로 근무했다.

필비는 매클린이 미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는 버지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버지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1951년 5월 매클린과 함께 소련으로 달아났다. 필비는 두 사람을 빼돌린 배후 인물로 의심을 받아 1952년 미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미 수사기관은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필비를 더 이상 조사하지 못하고 영국 측에 필비를 소환·조사하도록 요청했다. 필비를 소환한 영국 정부는 그에게서 사직서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영국 정보부는 영국 정부와 달리 필비가 소련의 스파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필비를 자유롭게 놔뒀다가 미행을 붙여 덜미를 잡자는 계략을 짰다. 1956년 9월 ‘옵서버’지 특파원으로 레바논 베이루트에 부임한 필비가 예상대로 수상쩍은 인물들을 만나는 것이 영국 정보부에 포착되었다. 1963년 영국 정보부의 추궁에 필비는 자신이 소련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자백했다. 그러면서 자발적으로 귀국하겠다고 해놓고 도주를 준비했다. 필비는 1963년 1월 23일 베이루트를 출항하는 소련 화물선에 잠입했다. 6주일 후 모스크바에서 “필비의 정치적 망명을 허락한다”는 발표가 흘러나왔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킴 필비, 가이 버지스, 도널드 매클린, 존 케른크로스, 앤서니 블런트

 

정체 드러난 이후 삶은 제각각

일찌감치 소련으로 망명한 매클린과 버지스는 소련에서 어렵게 살았다. 버지스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1963년에 죽었고, 매클린은 젊은 날의 오판을 후회하며 악몽에 시달리다 1983년 암으로 죽었다. 필비는 평생의 동지였음에도 매클린과 버지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버지스 때문에 자신이 소련으로 망명하게 되었다는 분노가 풀리지 않았고, 매클린의 부인을 유혹해 결혼했다는 미안함으로 차마 장례식에 얼굴을 들고 참석할 수 없었다. 필비는 소련에서 최고 훈장인 ‘적기’ 훈장을 받아 윤택하게 살았다. 하지만 모든 전화는 도청되었고 편지와 방문객들은 조사를 받았다. 결국 필비는 소련 체제에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생각 때문에 말년에는 술에 빠져 살다가 1988년 5월, 76세로 생을 마감했다. 소련 정부가 1990년 그의 초상화가 실린 기념우표를 발행했으나 그것은 다른 첩자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위한 전술일 뿐이었다.

모스크바에서 포착된 킴 필비(1968년)

 

블런트는 전쟁이 끝난 후 M15를 떠나 영국 왕실의 미술품 매입과 수집품에 대한 자문역을 맡았다. 1956년에는 기사 작위를 받아 영국 최고의 미술품 감정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면서도 소련을 위한 첩보활동을 계속하다가 1963년 꼬리가 잡혔다.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한 M15가 블런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사면해주겠다”고 제안하자 블런트는 “존 케른크로스도 5인의 고리”라는 사실 등 몇 가지 알짜 정보를 내놓았다.

케른크로스 역시 소환되어 자백했으나 사실 케른크로스는 다른 네 명과는 친분이 별로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중하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공부를 잘해 케임브리지대에 진학하긴 했으나 당시 영국은 철저한 계급사회인데다 케른크로스 자신도 사교성이 부족해 상류층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케임브리지 5인방’으로 불렸다. 케른크로스는 재무부에서 안보 관련 예산을 담당했다. 핵 개발에서 부대 배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기 때문에 안보와 관련되는 온갖 정보가 케른크로스에게 들어왔다. 덕분에 소련은 그를 통해 영국의 핵 개발, 육·해·공군의 군비 확충,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등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M15는 블런트·케인크로스와의 거래 내용을 비밀로 덮어두었다. 그러나 이 거래 내용이 앤서니 보일이라는 작가에게 넘어가고 1979년 보일이 ‘제4의 사나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블런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미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케른크로스는 재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대처 영국 총리가 1979년 11월 그런 거래가 있었음을 시인하자 블런트는 기사 작위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1983년 죽었다.

앤서니 블런트

 

스탈린의 6·25 남침 의욕 부추기는 정보 제공자도 ‘5인의 고리’

러시아 외교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녹취록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침 계획을 승인받기 위해 1949년 3월 7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김일성이 “북한군이 남한군보다 더 강하고 남침 시 남쪽의 빨치산 부대와 남로당 당원들이 호응할 것”이라며 남침 승인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때가 이르다며 승인하지 않았다. 당시 스탈린이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미국의 대응이었다. 그런데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이 느닷없이 평양 주재 스티코프 대사에게 김일성의 남침 요청을 승낙하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스티코프는 당일로 김일성을 만나 스탈린의 뜻을 전했다.

스탈린은 왜 갑자기 남침을 승인한 것일까? 10개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 미국을 비롯 서방에는 코민테른 등이 심어놓은 소련 스파이들이 득실거렸다. 그 중에서도 도널드 매클린은 특히 믿을 만한 존재였다. 매클린은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며 필비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상황을 비롯 영·미 정상 간에 오간 통신문이나 정책 발전에 대한 기밀을 계속 소련에 보고해온 1급 스파이였다.

스탈린

 

소련은 1948년 6월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할 때도 매클린의 정보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때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B-29 폭격기를 유럽에 배치하면서 폭격기에 마치 원자폭탄을 장착한 양 행동했지만 매클린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재래식 무기를 장착했을 뿐이라는 극비정보를 소련에 보고했다.

매클린은 1950년 1월 초 영국 외무부 내 미국 과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을 확정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골자는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을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으로 한다”는 것으로, 방어선에서 남한과 대만을 제외한다는 내용이었다.

매클린은 ‘애치슨 라인’에 대한 좀더 상세한 정보를 파악해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그 중에는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라는 2개의 결의안도 있었다. 1949년 12월 23일 결의된 48쪽의 NSC 48-1호와 1949년 12월 30일 결의된 9쪽의 NSC 48-2호에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미국은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며,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아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워싱턴의 영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킴 필비로부터도 미국에는 원자폭탄 비축량이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는 등 쓸 만한 정보가 속속 들어오자 스탈린은 이들 정보를 토대로 미국은 원자폭탄을 쓰지 않을 것이고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950년 1월 30일 김일성에게 남침 계획을 승인한 것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 또다시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로 달려가 4월 25일까지 거의 한 달간 머물며 남침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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