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던 진보정치인… 34년 전 피살되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검찰이 사건을 공식 종결해 스웨덴 현대사 최대 미스터리로 남을 전망

↑ 올로프 팔메

 

by 김지지

 

스웨덴 검찰이 34년간 미제로 남아 있던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암살 사건을 종결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모든 정황이 사건 초기부터 지목해온 유력 용의자를 가리키고 있지만 그가 2000년 이미 숨졌기 때문에 추가 취조, 수사,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수사 진전 상황도 밝히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스웨덴 현대사 최대 미스터리로 남을 전망이다.

 

스웨덴과 제3세계에서 사랑받았던 지도자… 호불호는 극명하게 갈려

2012년 스웨덴의 한 대학이 국민을 상대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1위는 넬슨 만델라(8.9%), 2위는 어머니(8.5%), 3위는 올로프 팔메(7.9%)였다. 만델라는 외국인이고 어머니는 특정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팔메가 사실상 1위였던 셈이다.

올로프 팔메(1927~1986)는 현대 스웨덴과 제3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탈하고 용기 있는 정치지도자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호불호가 분명해 그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 또한 호불호로 극명하게 갈렸다. 그러다 보니 “스웨덴 정치에는 친팔메와 반팔메 그리고 팔메 이렇게 셋만 있다”, “팔메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딱 두 가지”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회자되었다.

팔메와 아내

 

팔메는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톡홀름대 법학과를 다니다가 1947년 미국 오하이오주 케니언대로 유학을 떠나 1년간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시 팔메의 눈에 들어온 것은 풍요로운 미국이 아니라 미국식 자유의 이면이었다.

미국 사회의 엄청난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에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 평등의 가치를 통해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자유는 결국 심각한 불평등을 낳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발견되는 독재와 가난의 평등도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시장 자유라는 이름 아래 양산되는 양극화의 불평등 역시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이다. 그렇다고 소련이 모델은 아니었다.

 

“팔메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딱 두 가지”

팔메는 스톡홀름대를 졸업한 뒤 1952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사민당은 1932년 정권을 잡은 이래 줄곧 집권당이었다. 집권 초기 사민당은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대신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고 국민경제를 위한 상호공존을 택했다. 노·사·정 3자 협약도 중재했다. 수년간의 산통 끝에 1938년 12월 체결된 것이 독점자본과 복지국가의 공존을 가능케 한 ‘살트셰바덴 협약’이다. 스웨덴은 이 협약으로 노사 갈등을 조정해 2차대전의 와중에도 빠르게 발전하면서 경제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특히 사민당의 타게 에를란데르(1901~1985) 총리는 1946년부터 1969년까지 23년간 총리 자리를 지키며 경제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스웨덴을 세계에서 고소득군의 나라로 이끌었다.

타게 에를란데르

 

팔메는 1953년 에를란데르 총리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30살에 상원의원(1957)에 당선되고, 무임소장관(1963~1965), 교통통신부 장관(1965~1967), 교육부 장관(1967~1969)으로 활동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68년에는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에 반대하는 반전 시위에 참가해 미국을 격렬히 비난, 스웨덴과 미국 관계를 얼어붙게 했다. 그해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할 때도 항의 시위 참가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팔메는 1969년 10월 에를란데르의 뒤를 이어 역대 최연소(42세)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개인들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게 하겠다는 신념 아래 개혁을 하나씩 단행했다. 팔메는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를 거부했다. 사민당의 집권 후 계속 진화해온 복지제도도 그의 등장 후 더욱 단단해졌다. 나이든 노동자에 대한 ‘차별 금지법’, 실업과 부당해고를 막기 위한 ‘고용안정법’, 작업장의 민주주의 확보를 위한 ‘임금노동자 경영참여법’ 등을 잇따라 제정해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공고히 했다.

 

미국 사회의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에 충격받아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거부

그중에서도 가장 야심에 찬 기획은 ‘노동자 투자 기금안’이었다. 기금안이 모색되기 전까지 스웨덴에서는 노사 협상을 거쳐 모든 사업장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연대임금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연대임금제는 1951년에 도입되었는데 배경은 노노(勞勞) 갈등이었다. 1938년 ‘살트셰바덴 협약’ 후 노사관계의 안정 덕에 대기업은 번영을 누렸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임금 격차가 커지면서 부자 노동자와 가난한 노동자의 갈등으로 사회 양극화가 심해진 게 노노 갈등의 원인이었다.

‘살트셰바덴 협약’ 모습(1938년)

 

그러자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LO)의 두 경제연구원이 ‘이대로 가면 사회 갈등이 다시 극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들은 노동자 임금 격차도 줄이지 못하면서 사회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느냐며 대기업 노동자 임금은 인상을 억제하고 중소기업은 높이며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노동의 질이 같으면 임금을 같게 하자는 파격적인 ‘연대임금’을 제안했다.

스웨덴 사회는 다시 격랑에 휘말렸지만 결국 연구원들의 이름을 따 ‘렌-메이드네르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1951년 노동자단체와 경영자단체 간에 대타협을 이뤄냈다. 1938년 ‘살트셰바덴 협약’에 이은 스웨덴 사회의 두 번째 노사정 대타협이었다. ‘렌-메이드네르’ 협약이 경제에 불어넣은 활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노동 시장은 안정되고 상생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기록적인 경제 성장을 뒷받침했다.

‘렌-메이드네르 모델’의 두 주역 루돌프 메이드네르(왼쪽)와 고스타 렌

 

‘노동자 투자 기금’의 법제화 추진했으나 성공하진 못해

그러나 팔메가 집권할 무렵 연대임금제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연대임금제를 채택하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주는 급여의 중간쯤에서 연대임금이 책정되기 때문에 대기업이 연대임금제의 최대 수혜자가 되는 역설적 현상이 생긴 것이다. 결국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임금은 수익률에 비례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국노동자연맹(LO)이 들고 나온 게 ‘노동자 투자 기금안’이었다.

기금안은 연대 임금제로 이득을 본 대기업이 벌어들인 초과이윤의 20%를 의무적으로 떼 내 신규 주식 형태로 발행하고 이를 노동조합이 소유하고 관리하는 안이었다. 기금으로 주식을 구입하기 때문에 기금이 쌓이면 조합의 보유 주식 비중도 늘어나고 장기적으로 노동조합이 민간 대기업의 지배주주가 되는 대단히 급진적인 안이었다.

사기업 지배의 현실을 인정하되 점진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소유권을 확보해간다는 이 구상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평등사회의 이상을 구현하겠다는 사회민주주의의 밑그림에 근접했다. 팔메는 고심 끝에 임금 노동자 기금의 법제화를 추진했다.

당연히 자본가와 보수진영이 반발했다. 그들은 스웨덴이 동유럽 국가처럼 되고 국가가 파산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국민들도 크게 공감하지 않았고, 사민당 안에서도 찬반이 갈렸다. 결국 사민당이 1976년 선거에서 보수연합에 패하자 노동자 투자 기금안의 법제화도 보류되었다.

그러나 기금안은 1982년 사민당과 팔메가 재집권했을 때 다시 살아나 의회를 통과했다. 다만 통과된 법안은 핵심이 사라져 초기 취지와는 크게 멀어졌다. 기금의 규모가 줄고 운용 주체도 조합이 아닌 정부로 바뀌었다. 결국 노동자가 다수 지분을 확보해 기업의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1990년 집권에 성공한 보수파가 기금을 해체해버려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올로프 팔메

 

미국·소련의 패권주의는 비판하고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약소국은 적극 대변

팔메는 여성의 사회 참여를 돕기 위해 1971년 부부 개별 세금 제도를 도입했다. 여성만 쓰던 모성 휴가를 부모 휴가로 확대해 남성도 육아에 참여하는 것을 공식화했으며 탁아시설을 크게 확충했다. 낙태를 합법화하고 이혼 후 공동 양육권을 도입했다.

팔메는 역대 스웨덴의 어떤 총리보다도 국제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팔메는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약소국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특히 인권 침해와 약소국에 대한 공격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강하게 대응했다. 스웨덴은 베트남, 칠레, 쿠바, 포르투갈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중동 분쟁에도 중재자로 활약했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환담하는 팔메 (1975년)

 

하지만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경기 악화, 과도한 세금 부과, 44년을 집권해 관료주의 집단처럼 비친 사민당의 이미지, 핵발전소 건설을 둘러싼 환경 논쟁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결국 사민당은 1976년 10월 선거에서 5석 차이로 보수연합에 패배했다. 팔메는 총리에서 내려온 뒤에도 국제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국적을 초월한 사회민주당의 협의체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을 근거지로 삼아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지원하고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 힘썼다. SI가 군비축소를 위해 발족한 ‘군축과 안전보장에 관한 독립위원회’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위원회는 군비축소를 위한 초안을 만들어 1982년 유엔 연례총회 군비축소 특별 세션에서 발표했다. 하지만 1981년 취임한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군비 강화 드라이브에 밀려 실질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팔메와 사민당은 1982년 10월의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되찾았다.

 

팔메 암살은 스웨덴 현대사 최대 미스터리

1986년 2월 28일 밤, 팔메 총리는 아내, 아들 내외와 함께 스톡홀름 시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팔메는 오전에 이미 경호원 두 사람에게 해산해도 좋다고 했기 때문에 경호원은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아들 부부를 보내고 아내와 함께 근처 지하철역 입구로 향했다. 그들이 입구 바로 앞에 갔을 때 총 소리가 울렸고 가슴을 관통당한 팔메는 쓰러졌다. 밤 11시 21분이었다. 범인은 아내에게도 총을 쏜 뒤 달아났다. 부부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팔메는 병원에 도착한 지 46분 만에 사망하고 부인은 생명을 유지했다.

스톡홀름 시내에 있는 팔메의 묘지

 

당시 현장에는 목격자들도 있었고 몇 분 거리의 가까운 곳에 경찰들도 있었다. 게다가 34년 동안 134명이 “내가 살해범”이라고 주장하고 수사당국이 총 1만 명을 조사했는데도 범인을 찾지 못했다. 이에 팔메의 좌파적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던 스웨덴 군 등 우파 세력은 물론,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나 러시아 KGB, 심지어 터키의 쿠르드 분리주의 무장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 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첩보기관이 배후에 있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제기돼왔다. 스웨덴 정부는 특별법을 제정해 2011년 2월, 25년이던 공소시효를 연장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해 2020년 6월 10일 검찰이 34년간 미제로 남아 있던 이 사건을 종결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팔메 암살은 스웨덴 현대사 최대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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