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전 국민의 영웅이었던 ‘박치기왕’ 김일이 마침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어린 시절 가슴졸이며 만화방 TV로 그의 모든 경기를 지켜보았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2020년 5월 22일 · zznz
↑ 김일이 박치기 하는 모습
by 김지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전 국민을 열광시켰던 전설의 프로레슬러이자 ‘박치기왕’ 김일의 유해가 2020년 5월 22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동안 유해는 그의 고향인 전남 고흥에 묻혀 있었다.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이 국립묘역에 안장된 것은 2002년 고 손기정(마라톤), 2006년 고 민관식(전 대한체육회장), 2019년 고 서윤복(마라톤), 고 김성집(역도) 이후 다섯 번째다. 김일은 2006년 10월 77세의 일기로 타계하고 2018년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헌액되었다.
거구의 서양 선수들을 일거에 거꾸러뜨리는 김일의 모습에 국민들은 환호하고 열광
김일(1929~2006)은 젊어서 유명한 씨름꾼이었다. 체구도 183㎝, 90㎏이나 되어 당당했다. 전남 고흥의 섬마을인 금산면 거금도에서 태어난 그는 여수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일본 잡지에서 역도산(1924~1963)과 관련된 기사를 읽고 그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김일이 아내와 4남매를 집에 남겨둔 채 일본 시모노세키로 건너간 것은 27살이던 1956년 10월이었다. 일본과 아직 수교 전이라 밀항이었다.
김일은 도쿄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요코하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강제송환을 기다리던 중 “제자가 되고 싶다”고 역도산에게 편지를 썼다. 주소를 몰라 겉봉에 ‘도쿄 역도산’이라고 썼는데도 편지는 역도산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역도산은 일본에서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김일은 역도산이 손을 쓴 덕분에 수감 4개월만인 1957년 2월 석방되었다.
김일은 역도산 도장 문하생 제1기 제자로 입문을 했다. 1년 뒤 10살 아래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도 역도산의 제자가 되었다. 훈련은 온몸이 매일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힘들었다. 몸에 난 상처 때문에 병원에서 상처 부위를 꿰메고 돌아오면 역도산은 그 상처 부위를 다시 때려서 피가 터지도록 만들곤 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장사의 이름에서 딴 김일의 일본식 이름 오키 긴타로도 역도산이 지어주었다.
김일은 1958년 5월에 데뷔했다. 초반 성적이 좋지 않자 일찍부터 평양 박치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역도산이 “너는 조선 사람이니 박치기 기술을 익혀라”라며 박치기를 권했다. 이마를 단련시키는 과정은 고행길이었다. 새끼줄을 감은 기둥에 처박기를 하루 수백 번, 부었다가 찢어진 상처 위에 딱지가 앉으면서 굳은살이 박였다.
야구광이었던 김일은 일본 프로야구의 강타자 왕정치의 외다리 타법을 보고,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한쪽 다리를 들었다가 상대의 머리를 내리찍는 박치기 자세를 완성했다. 기술 종류도 늘려 박치기 외에 헤드시저스와 드롭킥을 익혔고 상대 선수를 만(卍)자로 감는 ‘코브라 트위스트’도 연마했다.
“너는 조선 사람이니 박치기 기술을 익혀라”
1963년 9월 김일은 역도산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열리는 WWA(세계레슬링연맹) 세계 태그챔피언대회에 도전장을 냈다. WWA는 NWA(전미 레슬링협회), WWWF(전세계 레슬링협회) 등과 더불어 세계 레슬링계를 주도하던 대표 단체였다. 시합 하루 전인 12월 9일 일본에서 역도산이 칼을 맞았다는 전화가 미국으로 걸려왔으나 다행히 경미하다는 말을 듣고 시합에 나가 WWA 세계 태그챔피언이 되었다. 그러나 12월 15일 역도산의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오갈 데 없는 국제 미아가 되었다. 보증인이 죽었으니 일본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김일은 미국 일대를 떠돌며 방랑 매치를 펼쳤다. 1965년 4월에는 세계 최강 루 테즈에게 도전했다가 눈언저리가 찢겨 분패했다.
김일은 1965년 6월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귀국했다. 8월 11일 장영철, 천규덕 등과 함께 극동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전에 출전했다. 국내파 장영철이 2회전에서 패해 그 동안 국내에서 쌓아온 70연승에 제동이 걸린 것과 달리 김일은 챔피언이 되었다. 그것은 한국 레슬링의 맹주가 장영철에서 김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해 11월 25일부터 5개국 초청 프로레슬링대회가 열렸다. 대회 마지막날인 11월 27일 장영철은 일본 선수와, 김일은 스웨덴 선수와 격돌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먼저 시합을 한 장영철이 일본 선수의 허리꺾기에 걸려 비명을 지르자 링 아래의 제자들이 황급히 뛰어올라 일본 선수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리치는 바람에 한국 레슬링계에 일시적으로 수난이 찾아왔다.
제자들과 함께 즉심에 회부된 장영철이 경찰 조사과정에서 “레슬링은 쇼”라고 말한 것이 다음날자 신문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박진감 있던 프로레슬링이 미리 짜고 각본대로 하는 쇼라니?”, 팬들이 놀라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후 장영철은 프로레슬링 쇠락의 주범으로 낙인찍혔고 김일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장영철은 2년이 지나서야 다시 링에 오를 수 있었다. 잠시 팬들의 관심이 줄어들긴 했으나 김일이 건재하는 한 레슬링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관중이 “박치기!” “박치기!”를 외치면 박치기로 경기 뒤집어
김일은 1966년 12월 도쿄에서 아시아태그 챔피언에 오른 뒤 여세를 몰아 마크 루인 WWA 세계헤비급 챔피언에게 도전했다. 루인은 1966년 10월 루 테즈를, 1967년 3월 복면의 디스트로이어를 물리친 세계 최고 선수였지만 김일은 1967년 4월 2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박치기로 그를 물리쳐 세계 정상에 올랐다. 한국 프로레슬링 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신문을 보면 스포츠면 1단 크기로 처리할 만큼 프로레슬링을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국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 달 뒤 미국 LA에서 루인과 리턴매치를 벌였을 때 루인은 면도칼로 김일의 머리를 그었다. 김일이 피투성이가 된 이마로 박치기를 해 루인을 다운시키고 챔피언 벨트를 매자 링 사이드의 교포들은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합창했다.
가난하고 힘들던 그 시절, 김일의 프로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서민들은 너나없이 동네에 몇 안되는 흑백TV 앞에 모여들었다. 만화방에도 모였는데 당시 만화방에서는 TV를 설치해놓고 돈을 내면 시청할 수 있게 했다. 초반엔 늘 상대편의 잔악무도한 반칙에 당하다가도 꼭 막판 박치기 한방으로 내로라 하는 거구의 서양 선수들을 일거에 거꾸러뜨리는 김일의 모습에 국민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상대가 의자로 내려쳐 머리에서 피가 나오거나 시종 밀리다가도 관중과 TV 앞에 모인 국민들이 “박치기!”, “박치기!”를 외치면 김일은 기다렸다는 듯 박치기로 경기를 뒤집었다. 그러면 승부를 끝내는 종소리가 “땡땡땡” 울렸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1974년과 1975년 일본의 프로레슬링 영웅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라이벌전은 온 국민을 TV 브라운관 앞으로 모이게 한 화제의 경기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김일을 좋아해 고향에 전기를 넣어달라는 김일의 부탁을 받고 바로 전신주 공사를 해 주었다. 1975년에는 서울 정동에 김일체육관을 지어 주었다.
김일은 1980년 5월 제주도에서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하고 은퇴했다. 그 동안 3,000여 회의 경기를 치르고 세계 타이틀을 20차례나 방어했다. 이후 TV에서는 프로레슬링도 김일도 볼 수 없었다. 빈 화면에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채워졌다. 은퇴 후 김일은 레슬링 후유증과 스트레스 때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2006년 10월 26일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