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반, 제3한강교 다리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 멀리 남산타워와 외인아파트(1994년 11월 철거)가 보인다.
by 김지지
제3한강교를 세운 이유는 서울 인구의 강남 분산과 안보 문제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는 대한민국 부의 상징이다. 이 두 구(區)가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1963년 1월 1일. 그렇다고 뭐가 달라진 건 아니고 여전히 논밭으로 이뤄진 시골이었다.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이곳에 상전벽해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66년이었다. 11월 27일, 제3한강교(현재 한남대교)의 기공(착공식은 1월 19일)과 함께 강남이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당시 한강에는 제1한강교(한강대교), 제2한강교(양화대교)와 광진교뿐이었다.
제3한강교를 세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넘쳐나는 서울의 인구를 강 건너로 분산하기 위한 것이 첫 번째이고 안보상의 목적이 두 번째였다. 인구 급증에 따른 교통난과 주택난 해결을 위해 강남과 강북을 이어줄 다리가 무엇보다 절실했지만 6·25 때 서울시민이 겪어야 했던 피난의 쓰라린 아픔을 또다시 겪지 않으려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하나 더 필요했다.
1966년은 ‘강남 신화’가 시작된 첫해였다. 서울시가 ‘강남지구개발’ 계획을 발표(1월)한 것도, 서울시가 건설부에 영동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지구 지정을 요청(9월)한 것도 1966년이었다. 강남 개발은 경부고속도로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고 강남에 뉴타운 도시를 만들려는 도시행정상의 필요도 있었다. 제3한강교에서 남쪽으로 7.6㎞, 9만2000평에 달하는 고속도로 용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듯 소설가 이호철은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동아일보에 연재(2.8~11.26, 250회)했다.
강남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서울시가 자연상태에 있는 지주들의 땅에 길을 내고 공공시설을 만들어 구획을 정리해주는 대신 개발이익의 수혜자가 될 지주들로부터 일정한 토지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식이었다. 제3한강교 건립은 이땅에 ‘땅투기’와 ‘복부인’이란 말을 등장시켰다. 징후는 제3한강교 착공 1년 만에 나타났다. 착공 때만 해도 평당 200~300원에 불과하던 강남 일대의 땅값이 착공 1년 만에 평당 3000~4000원으로 급등한 것이다. 기록상 언론에서 ‘복부인’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동아일보 1978년 2월 2일자 ‘횡설수설’ 칼럼이다. 경향신문은 땅투기와 복부인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현대판 불가사리’ 제목의 시리즈(1978.2.13-3.3) 기사를 보도하면서 별도로 ‘복부인 부대’를 다뤘다.
제3한강교 준공과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강남 개발’의 서막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성동구 신사동(강남구가 신설된 것은 1975년)의 경부고속도로 입구를 잇는 길이 915m, 너비 27m의 제3한강교가 준공된 것은 지금부터 50년 전인 1969년 12월 26일이었다. 강남 영동개발의 주요 계기가 된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 준공되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반포동, 잠원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 신사동 등이 여기에 속한다.
제3한강교의 준공과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그해 8월 15일, 길이 1530m, 너비 10.8m의 남산1호 터널까지 개통됨으로써 서울 도심에서도 경부고속도로로 바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남산 2호 터널은 그해 12월 4일 개통되었다.
제3한강교가 강남 땅값 상승에 불을 붙였다면 경부고속도로는 그 불에 뿌려진 기름이었다. 365만평의 영동 1지구에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된 것은 1968년 봄이었다. 472만평의 영동 2지구는 이보다 4년 늦은 1972년 시작되었다. 허허벌판이던 영동에 도로를 내고 상하수도와 전기시설 등을 설치하는 토지구획 정리사업은 수년간 계속되었다. 구획정리를 마친 압구정지구, 청담지구, 도곡지구, 신반포지구 등에 건설부가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한 것은 1976년 8월. 한동안 땅 파는 소리와 망치 소리가 영동 전역에서 끊이질 않았다.
서울의 강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강남특별시
강남에서 영동지구보다 먼저 개발된 곳은 구반포지구(당시 행정지명은 영등포구 동작동)였다. 구반포지구 개발은 소양강 다목점댐 등으로 홍수위험이 사라진 한강 하류의 유수지나 둔치 등의 공유수면을 매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70년 7월부터 1972년 6월까지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한 결과 지금의 동작대교 남단에 16만 평의 택지가 조성되었다. 주택공사가 이곳에 22~42평 규모의 5~6층 아파트 3700여 호를 지은 것은 1973~1974년이었다. 지금의 구반포다.
영동아파트 단지는 아파트값 프리미엄과 아파트 가수요라는 새로운 현상을 만들고 또 국민의 주생활이 개인주택에서 아파트로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강남 고속터미널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해 영동개발을 촉진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강남 고속터미널은 1976년 4월 착공되어 9월 1일부터 승객을 실어날랐다. 1977년 7월 1일을 기해 강북의 터미널이 모두 폐쇄되면서 고속터미널의 강남시대가 개막했다.
강남 개발의 또 다른 축은 잠실 개발이었다. 잠실은 오랫동안의 모래 퇴적으로 생겨난 하중도였다. 이곳 역시 다목적댐 건설로 홍수 걱정이 사라지자 1971년 6월부터 공유수면을 매립하는 방식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공유수면 매립지와 국공유 하천부지를 합친 땅은 340만 평이나 되었다.
주택공사가 잠실 1~4단지에 5층 높이의 7.5~17평 아파트 334개동(1만5250가구)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75년 2월이었고, 잠실 5단지에 15층짜리 34~36평의 중형아파트 30동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76년 8월이었다. 입주는 1978년 7월 1~5단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7.5~36평 아파트 364개동 1만9180가구분을 3년 9개월 만에 완성해 10만 명의 주거단지를 조성한 것은 한국 아파트공사 사상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세계적으로도 10위권 안에 들었던 대역사였다.
개발이 완료될 당시만 해도 강남은 전 국토의 0.1%에 불과한 서울의 강남이었다. 그러나 점차 땅값이 폭등하고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강남은 서울의 강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강남특별시로 신분 상승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