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성사회정치연맹’ 결성…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설 것을 천명

↑ 왼쪽부터 에멀린과 두 딸 크리스타벨,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강력한 지도력과 단호한 카리스마로 영국의 여성참정권을 획득한 일등 공신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는 20세기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의 상징이다. 투쟁 방식은 과격했다. 관공서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방화도 서슴지 않았다.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투표권이 없는 여성의 차별 대우를 어떻게든 뿌리뽑겠다는 그 자신의 의지가 1차 이유겠지만 집안에 면면히 흐르는 피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팽크허스트는 영국 맨체스터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렬한 노예해방론자였고 부모 모두 남녀가 평등하게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팽크허스트가 영국 여성운동의 선구자 리디아 베커의 강연을 듣고 여성운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4살 때였다. 15살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3년간 공부하고 21살 때인 1879년 24살 연상의 리처드 팽크허스트(1834~1898)와 결혼했다.

남편은 1860년대 말 영국 여성의 권리 신장을 적극 옹호한 진보적인 변호사였다. 그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수입과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혼여성재산법안 제정에도 공을 들였다. 1893년 독립노동당(노동당의 전신)이 창당할 때도 지도급 인사로 활동했다. 결혼 후 굴든에서 팽크허스트로 성이 바뀐 에멀린은 5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바쁜 와중에도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889년 남편과 함께 창설한 ‘여성참정권연맹’을 기반으로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부단히 노력했다. 부부는 독립노동당 안에 여성을 위한 각종 위원회를 설치해 여성의 정치·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근거지로 활용했다. 그러던 중 1898년 남편이 세상을 떠나 팽크허스트의 활동이 한동안 주춤했다.

그러나 짬짬이 빈민구호소 후원회원, 맨체스터 교육위원, 지역 노동자 대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가난한 여성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남성들이 만든 법이 여성들의 삶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성참정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러나 남편의 손때가 묻어 있는 독립노동당 등 진보적 인사들까지 여성참정권 문제에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해 대책을 강구했다.

 

부모 기질 쏙 빼닮은 세 딸과 ‘여성사회정치연맹’ 결성

마침 그에게는 부모의 기질을 쏙 빼닮은 세 딸 크리스타벨, 실비아, 아델라가 있었다. 에멀린은 1903년 10월 10일 자신과 딸을 포함해 모두 6명으로 구성된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을 맨체스터 자신의 집에서 결성하면서 “낡아빠진 선교사적 방법을 버리고 즉각적 참정권을 쟁취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여성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정당과도 제휴하지 않으며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설 것”을 천명했다.

여성사회정치연맹이 맞은 최초의 효과적 선전기는 총선이 실시된 1905년이었다. 큰딸 크리스타벨은 1905년 10월 13일 한 여공과 함께 총선에서 승리 가능성이 높은 자유당 집회장에 침입하는 것으로 행동에 돌입했다. 들고 온 플래카드에는 “당신들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줄 것인가?”라고 씌어 있었다. 물론 자유당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크리스타벨은 자유당이 불러들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사실 ‘체포되기’는 작전이었다. 영국인들은 두 수감자에게 동정적으로 반응했고 크리스타벨은 감옥에서 환영을 받았다. 에멀린과 크리스타벨 모녀는 이후에도 경찰이 접근하면 침을 뱉어 ‘체포되기’를 유도했고, 그들의 의도대로 구속되면 동정 여론이 쏟아졌다.

팽크허스트의 참정권 요구는 성별 구분 없이 현재 투표장에 갈 수 있는 계급 안에서부터 먼저 성 평등을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팽크허스트와 노선을 같이해온 노동당은 여성의 참정권 요구에 소극적이었다. ‘성인 참정권’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보통선거권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이 부르주아들과 동등한 투표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르주아 여성들의 여성참정권 요구가 노동자들의 참정권 획득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결국 팽크허스트는 크리스타벨과 함께 노동당을 탈퇴했다.

 

그들을 지칭하는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20세기 초 세계 여성 인권운동가들을 상징하는 단어

그러던 중 1911년 정부가 재산이 있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다고 약속했다가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에멀린과 동지들은 분노했다. 그들이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한 것은 1912년 3월이었다. 연맹 회원들은 주요 거리의 건물 유리창을 모조리 깨부수고 화랑의 그림은 훼손했다. 우체국의 편지는 불태우고 전신용 전선은 절단했으며 철도역·축구장·골프장·교회 등에 불을 질렀다. 왕실이 자신들을 볼 수 있도록 버킹엄궁 난간에 몸을 매달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경찰관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모녀는 투옥과 석방을 반복했다.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그들을 ‘참정권’을 뜻하는 영단어 ‘Suffrage’를 본 따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는 20세기 초 세계 여성 인권운동가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들의 과격한 행동이 곤혹스러웠다. 특히 골치 아픈 존재는 단식투쟁을 하는 수감자들이었다. 정부가 음식을 거절하는 여성들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면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어 여론으로부터 호된 질타가 쏟아졌다. 정부는 묘안을 짜냈다. 단식 수감자들의 건강이 악화되면 석방했다가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수감하는 ‘단식 죄수 가출옥법’ 이른바 ‘고양이와 쥐 법’을 1913년 제정한 것이다. 팽크허스트는 1913년 무려 12차례의 단식투쟁을 통해 영국 정부의 부당함을 폭로했다. 단식투쟁이라면 둘째딸 실비아도 누구 못지않게 전투적이었다.

여성참정권 운동은 1913년 6월 4일 런던 남부 엡섬다운스 경마장에서 일어난 경마 사고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7만여 명의 관중이 온통 함성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고 말들이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열렬 여성참정권 운동자 에밀리 데이비슨이 “투표권을 달라”고 부르짖으며 질풍처럼 내달리는 조지 5세 국왕 소유의 말고삐를 잡으려다 발굽에 밟혀 4일 뒤 숨진 것이다. 정황상 자살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지만 영국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여성들의 성난 외침은 데이비슨의 죽음으로 활화산처럼 폭발했고, 시위는 더욱 폭력적으로 치달았다.

 

여성참정권 확보를 위한 과격한 투쟁으로 감옥을 제집처럼 드나들어

여성참정권 운동의 추진력은 점차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하지만 결실을 보기까지에는 1차대전이라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에멀린과 크리스타벨 등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투쟁을 중단하고 전쟁 지원에 나섰다. 전쟁 기금을 모금하고 미국과 러시아를 돌며 여성의 전시 산업체 동원을 독려했다. 대중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해 여성참정권 운동을 새롭게 평가했다.

이처럼 여성참정권에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영국 정부는 종전 후 다시 극렬한 참정권 운동이 재개되는 것을 꺼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18년 2월 6일,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과 30세 이상 중산층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21세 이상 남녀의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한 ‘인민대표법’이 통과되기까지는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 의회가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1928년 7월 2일이었다. 평생의 소임을 다한 팽크허스트가 70세로 숨을 거둔 6월 14일로부터 20일이 지난 뒤였다.

둘째딸 실비아는 시민계급 운동에 충실했던 어머니·언니와 별도 노선을 걸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어머니와 언니의 운동을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 규정하고 여성사회정치연맹을 탈퇴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녀는 1차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 반전운동을 펼치며 노동자계급과 연대해 새로운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여성의 억압, 전쟁과 파시즘, 빈곤, 이탈리아 제국주의의 에티오피아 침공 등 실로 전선을 가리지 않았다. 1918년 마침내 30살·중산층 이상 여성의 참정권이 관철되었을 때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그의 관심은 여성의 참정권운동이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에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딸 아델라는 1914년 영연방인 호주로 건너가 호주 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1차대전 중엔 여성평화군을 조직했다가 전쟁 후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껴 탈당한 뒤 1928년 반공산당 단체를 결성했다.

오늘날 팽크허스트는 강력한 지도력과 단호한 카리스마로 영국의 여성참정권을 획득한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지나치게 독재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고, 모든 계급의 여성을 망라하는 조직을 만들고도 노동계급 여성이 아니라 중산층 여성 위주로 운동을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평가가 무엇이든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 문제와 사회 개혁이라는 대의에 일관되게 바쳐졌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을 비롯한 모든 개인적인 삶을 희생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의 타임지는 1999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여성 인물 100명 중 한 명으로, 영국의 BBC는 2002년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중 27위로 펭크허스트를 선정했다.

여성에게 세계 최초로 참정권을 부여한 나라는 1893년 뉴질랜드다. 한참 지나 1902년 호주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했고 핀란드(1906), 소련(1917), 독일(1919) 등이 뒤를 이었다. 미국의 여성은 1920년 참정권을 쟁취했다. 이후 스페인(1931)과 프랑스(1944)를 거쳐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1945), 중국(1947), 한국(1948)이 뒤를 이었다. 유럽 국가에서는 스위스(1971)가 가장 늦었으며 사우다아라비아는 2015년에야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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